時事 · 나의 時論

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hanngill 2007. 12. 12. 00:38

1. 동북공정

 

중국의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는 2002년 2월부터 ‘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5년간 추진하고 있다. 중국 동북 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 문제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학제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중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동북공정’에서 다루는 문제 중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과 발해 등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2. 동북공정의 배경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 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자 중국 당국은 조선족 문제와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된 문제 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2001년 북한이 고구려의 고분군을 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신청하자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기획하고 추진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게 되면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명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많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방해하고, 2003년 봄 오히려 집안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한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 통일 후의 국경 문제를 비롯한 영토 문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3. 동북공정의 내용

 

‘동북공정’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에 걸쳐있지만 가장 핵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고구려로서 전문 주제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우리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문제인데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일개 지방 민족 정권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으나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하여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단정하여 공식적 견해로 확정하여 버린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제시를 하고 있으나 사실에 기초하여 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궁색한 이야기들이다. 고구려가 중국 영역 내의 민족이 건립한 지방 정권이라는 것, 활동 중심에 있어 몇 번의 천도가 있었으나 결코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 고구려가 줄곧 중국 역대 중앙 왕조와 군신 관계를 유지하였고, 중국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그 관계를 스스로 끊지 않았다는 것,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주체 집단이 한족에 융합되었다는 것 등을 내세워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 민족 정권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고려 및 조선족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씨와 고려의 왕씨는 혈연적으로 다르며 시간적으로 250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사적 계승성이 없다는 것이다.

* 중국  VS 한국 6대 쟁점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고구려가 탄생한 지역은 기원전 3세기 모두 연(燕)의 영역이었고, 진(秦)이 6국을 통일한 뒤에는 진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이 때 고구려는 현도군의 한 현이었다. 주몽이 고구려 5부를 통일하고 나라를 세운 곳도 현도군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건국은 이처럼 모두 중국의 영토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오늘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론>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고조선 ? 부여 ? 예맥 등 고구려에 선행하는 역사는 명백한 우리 역사이다. 현재 자국 영토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 역사까지 모두 자기네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한사군의 실체와 성격에 대한 중국측 주장은 일방적인 것이다. 실상은 고조선과 한(漢)나라의 변경에 있었던 국경 분쟁이며 현도군은 광역의 식민지 군현으로서 기능했다기보다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창구의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발원했다.

2)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

 

주몽의 건국 이래 고구려현은 이미 한(漢)의 현도군에 속했다. 동한(東漢) 180년 동안 고구려는 모두 동한 왕조의 신하였다. 220년부터 426년까지 고구려는 중국 중앙 정권의 신하로 예속되어 고구려후 ? 고구려왕 ? 정동대장군 등의 관직을 받았다. 남북조 시기에는 북위 ? 북제 및 남조의 각 정권에 공물을 바쳤다. 이처럼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국의 한 지방 민족 정권이었다.

<반박> 명백한 독자 국가였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조공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가 강성했을 때 조공이 많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조공과 책봉을 외교적 목적에서 활용했다는 의미이다. 조공과 책봉만으로 지방이라 규정한다면 마찬가지로 조공했던 일본 ? 신라 ? 베트남 등도 모두 중국의 지방 정권이란 말인가. 고구려가 영락 ? 영가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도 중원의 조공국이 아니라 중원 왕조에 대응하는 독자적 국가였음을 말해준다.

 3) 고구려 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민족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는 중원 ? 돌궐 ? 발해 등으로 들어가 모두 중국의 각 종족에 융화되었다.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들만 신라로 넘어갔다. 오늘날 한(韓)민족의 선조는 주로 고대 삼한(三韓) 곧 신라인이고 조선 반도로 옮겨간 중국의 각 종족도 상당 수 섞여 있다. 고구려의 후예는 극소수이다.

 <반론> 설득력 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고대 중국은 자기네 민족만 중화로 부르고 나머지는 동이 ? 서융 ? 남만 ? 북적 등 오랑캐로 단정했다. 이는 각종 사료에도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와서 고구려가 중국 민족이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고조선 ? 부여 ? 예맥을 중국 민족이라고 규정하는 주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주장이었다.

4) 수 ?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 전쟁이었다.

 

고구려가 자리했던 곳은 1,000년 간(낙랑군 400년 + 기씨 ? 위씨조선) 중국 한 족이 지배하던 곳이기 때문에 수 ? 당이 고구려를 친 것은 중국 국내 민족간 전쟁이었다. 고조선 - 위씨조선 - 낙랑으로 바뀐 것도 모두 한족이기 때문에 같은 민족의 통일 전쟁이며 고구려가 낙랑군을 차지한 것도 중국 내에서 전개된 민족 간의 침범이었다.

<반론>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이었다.

  수?당 전쟁은 고구려만 참여한 게 아니었다. 백제 ? 신라 ? 왜 등이 모두 참여한 동북아의 세계 대전의 성격이 짙었다. 더구나 수나라와의 전쟁은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를 침공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었다. 세계의 어느 지방 정권이 중앙 정권에 대해 그처럼 대규모의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 고구려가 자리했던 곳은 고조선 - 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는 한(韓)민족의 강역이다.

5) 왕씨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

 

왕건은 신라 장군이었고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했다. 왕건은 신라 김씨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의 위(位)를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 왕씨 고려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고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 땅이지 고구려의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오늘날 한(韓)민족의 선조가 건국한 것이지만 고씨 고려는 중국 역사로써 오늘날 중국 각 민족의 선조가 세운 것이다.

<반론> 명백한 고구려 계승 국가였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라고 지었다. 이것은 고려가 고구려가 이어받았다는 명백한 역사 의식의 산물이었다. 고려는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까지 진격해 갔다.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송나라 때의 『송사(宋史)』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측의 주장은 자신들의 정사(正史)까지 부인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6) 한반도 북부(북한) 지역도 중국의 역사다.

 

한반도가 오늘날 한(韓)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5세기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놓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 된다. 15세기 이후의 이씨 조선과 기씨 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 조선(기원전 2세기) 등은 모두 조선이라 불렀으나 민족 구성과 국가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씨 조선은 오늘날 한민족이 세운 조선으로 한국의 역사에 속하고 기씨 조선과 위씨 조선은 한족(漢族)을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

<반박>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다.

  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하나의 구획으로 했던 한(韓)민족의 역사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진 것은 고려 이후의 고려 이후이며 한반도 유사 이래 변함없이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는 중국측의 주장은 정도를 넘어서는 억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사 ? 신라지리적 의미에서 중국의 범위는 만리장성 이남일 뿐이다. 현재의 중국 국경선 자체가 만주족의 정복 왕조인 청(淸)나라가 개척한 것으로 만주족의 역사 또한 한독 중심의 중국사에 편입될 수 없다.

4.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방안

 

 ‘동북공정’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하기 위한 역사 왜곡은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 왜곡 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중에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왜곡은 중국의 정부 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훨씬 크다. 더구나 고구려 역사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 밖에 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고구려 연구 재단을 중심으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먼저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와 근거를 확실히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를 개발하고 사실을 왜곡한 부분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또한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해 장기적으로 대비하기 위하여 중국의 동북 지방(만주)에 대한 역사와 지리 및 민족 문제에 대한 관련 자료 수집, 중장기적 기초 연구, 학문 후속 세대 양성, 민간 전문 기관 육성, 중국의 역사 왜곡 실태 홍보 등의 제반 임무를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만주 지역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였으며, 이에 대한 연구는 일천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편 ‘동북공정’이 시작된 직접적 계기이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북한이 UNESCO에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약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마치 중국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남과 북 어느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이므로 남북공조로서 고구려의 역사를 지켜낸다면 남북공조의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요      약

쟁 점

중국의 주장

한국의 반박

고구려
종족

중국 고이(高夷)의 후예

고조선, 부여와 같은 예맥족

▶주나라 역사서인 《일주서》<왕회편>에 나오는 고이(高夷)를 고구려의 조상으로 설정해 ‘고구려가 신하 국가로서 서주(西周)에 조공을 바쳤다’고 주장

◀《일주서》는 신뢰할 만한 사료 아님

◀고구려 건국 세력은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농경 생활을 하던 예맥 계열 주민

조공의
성격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침

 

▶고구려왕들이 한대(漢代)이래로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는 대신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자처했다고 파악

◀한나라의 팽창에 따라 조공과 책봉이 나라 간에도 나타남

◀중국에 조공을 바친 신라, 백제, 일본의 역사는 중국사라 주장하지 않음

평양 천도 후 고구려

역사

 

현재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중국사로 간주하는 기존의 주장과 모순

▶과거 중국의 영토 내에 존재했던 나라의 역사도 중국사라는 주장을 폄

▶평양이 한나라의 낙랑군 영역 내에 존재했으므로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 역사까지 중국사임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민족의 역사,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범주라고 간주했던 기존의 그들 주장과 모순

수당과의 전쟁

변강의 소수민족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중국 통일 전쟁(내전)

 

▶고구려 지배 세력의 잔혹한 수탈과 침략 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수당이 출정한 중앙 정권과 지방 정권의 전쟁

◀동북아 일대에서의 생존권 보전 및 패권을 추구하는 고구려의 대륙 정책 동아시아를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로 재편하려던 수당 제국의 세계 정책

유민의
거취

 

다수가 신라로 가거나 발해 건국에 기여

▶《구당서》,《신당서》에 고구려 멸망 후 총 69만7000호 가운데 중국으로 들어간 유민은 2만 8000호, 《자치통감》에는 3만 8000호

▶이들 중 다수는 왕족이나 귀족들이었는데 이들이 한족과 융화됐으므로 고구려 역사는 중국사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것임

◀이외에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신라로 흘러들거나 발해 건국에 참여, 돌궐 등 유목민에 편입

고구려와 고려의 연계성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의 국가

 

▶건국 시기에 큰 차이

▶관할 구역 내의 구성원이 다름

 - 고려는 신라 사람 위주

▶고려의 건국자들도 고구려의 후예라고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음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따올 정도로 정신적으로 고구려 계승

◀북진 정책을 추진해 개경과 함께 서경(평양)을 양대 수도로 삼을 정도로 실제 고구려는 계승한 국가

◀발해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는데 발해 멸망 후 고려는 발해의 유민들을 고구려의 후예들이라며 받아줌

내용출처 : 전국역사교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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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이 가속화되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 동북쪽의 만주 지역에 공을 들인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동북쪽을 불길한 방위로 생각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영향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동북쪽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 까닭도 있으리라.

그들이 가장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에 의해 참패를 당한 사건이다.
그때 고구려를 제압했다면 지금 중국의 영토는 한반도까지 확장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아우르는 고구려의 영토를 오늘날 조망하면 중국대륙에 훨씬 치우쳐 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돌궐, 몽골, 여진, 거란 등등 한족과 더불어 중국을 지배했던 북방계열 민족들의 역사를 배제하면 찬란한 중국의 역사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금나라, 요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이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다. 그러므로 한족 위주로만 중국의 역사를 쓴다면 상황이 좀 복잡해진다.

한족들과 주변 민족들의 전쟁사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2003년 교과서를 통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기틀을 잡았다.

한족과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의 배경은 공산주의의 맹주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 유일하게 남은 사회주의 대국인 중국의 위기감에서 비롯된다.

소련이 무수한 독립국으로 갈갈이 찢어졌듯 중국도 여차하면 민족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리될 가능성이 상존해있기 때문이다.

회교도 분포가 높은 신장, 위구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대세에 따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처럼 독립국이 되길 원하고 있으며 티베트도 마찬가지다.

광대한 면적의 내몽골도 몽골로 편입되는 게 원칙이고 연변자치주가 통일한국으로 귀속된다면 중국의 영토는 형편없이 축소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낙후된 서쪽 지역의 경제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동북쪽에는 역사 강화에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이 가로 막은 지형적 장애 때문에 본격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고, 북한은 핵개발과 관련한 국제적 고립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한 터라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동북공정을 지켜보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의 역사논쟁을 떠나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넘보고 있다고 한다.
연해주는 근세에 부동항을 얻기 위해 제정러시아의 군대가 진출하면서 소유권 말뚝을 박았지만 사실 그 전까지는 무주공산의 땅이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연해주에는 많은 민족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인들이 가장 많았으며 중국, 러시아, 일본인들이 오가며 경제활동을 했다.

유럽의 집시들까지 몰려왔다고 하니 그 시기에 연해주는 극동아시아의 교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터지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야심이 부딪히면서 연해주에도 폭풍이 일었다.
레닌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1937년부터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켰다.

스탈린이 그처럼 무모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고려인들이 일본군의 첩자 역할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원래 연해주의 고려인 이주민들은 한반도에 흉년이 들어 두만강을 건너 간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정치적으로 망명하거나 피신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일본 정부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략 17만 명 쯤 되는 연해주 교민들 중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구가 무려 7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규모 아닌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를 비롯해 안중근, 계봉우, 장도빈, 김상진, 김규면, 김경천, 이범진, 이동녕, 이동휘, 이상설, 신채호, 이위종, 최봉설, 최재형 선생 등이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분들이다.

아무튼 스탈린의 황당한 결정에 따라 1937년 9월부터 두 달 간에 걸쳐 17만 명에 달하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됐다.

1860년부터 70여년 간 연해주의 동토를 개간하고 정 붙여 살아온 고려인들이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의 빈들에 버려진 거였다.
그때 어린아이들의 60%에 해당하는 수가 추위와 질병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맨손으로 갈대밭을 파고 곡식을 심어 생명을 유지해야 했다.

그렇지만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슬러 올라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메기. 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근면했던 고려인들은 그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농업의 기적을 일으키며 우뚝 일어선다.

그 무렵 소련에서 전국적으로 노력영웅 1,200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 750명이 고려인들이었으니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민족이 바로 고려인들이었던 것이다.

그 연해주가 지금 중국인들의 대거유입과 경제공습에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벌써 연해주 인구의 10%를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뿐만 아니라 육류시장과 채소, 과일 및 공산품 시장도 중국의 저가공세에 무너졌다고 한다.

시베리아 철도 개발과 천연가스 송유관 개발에 따른 경제효과를 감안해 중국은 앞으로도 연해주에 눈독을 들일 것이다.
훗날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을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곳이 바로 연해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