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인생/World Economy

그림자정부 Shadow Government 경제편에서

hanngill 2014. 10. 31. 20:49

환전꾼


기원전 200년경 로마는 고리대금업을 금하였다. 율리우스 시저는 화폐였던 동전을 정부가 직접 관리하여 그동안 환전꾼 들에게 돌아갔던 이익금으로 콜로세움같은 거대한 공공건물을 세우고 상하수도시설을 설치하는 등, 로마인들의 생활향상에 힘썼다. 그 결과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추앙을 받은 반면 환전꾼 들로부터는 미움을 샀다. 그러나 시저가 죽고 나자 동전을 만드는 권리가 환전꾼 들의 손으로 다시 넘어갔고 이들이 통화량을 90%까지 줄인 결과 로마인들은 많은 땅과 재산을 잃게 되어 가난해졌다.

마태복음 21장 12절을 보면,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환전꾼 들의 상을 뒤엎고 그들을 내쫓으며 강도에 비유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고대부터 환전꾼 들은 사회의 거머리로 여겨졌으나 유대교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인간의 금전욕을 인정하였다. 중세후기 수공업의 발달로 사회의 부가 증대되자, 기독교인들도 이자를 받게 되었다. 당시 환전꾼 들은 지금으로 치면 ‘금 거래상’이었다. 이들은 금이나 귀금속을 보관하는 튼튼한 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들에게 금을 맡겨놓고 그에 해당하는 증서를 받았다.

사용이 편리한 이 증서는 지폐의 시초가 되었고, 금 거래상 들은 은행의 시초가 되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끼리 어떤 물건을 화폐라고 인정하면 그 물건은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지폐도 사회 구성원들이 지폐를 상품교환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무언의 동의를 했으므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아무튼 유대인 환전꾼 들은 지폐를 만들어 널리 유통시켰다. 언제 박해가 시작될지 몰랐기 때문에, 무거운 동전보다는 가벼우면서도 고액인 지폐가 편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유대인 금 거래상 들은 왕후나 귀족들에 의해 중용된 ‘궁정(宮庭)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사회는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산재하였으며 이들은 같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국경을 초월하여 장사와 금융 분야에서 서로를 도왔다. 그들끼리는 현금없이 신용장이나 수표로 거래하는 일이 가능했으며, 지참인이 지불하는 수표도 고안하여 현금을 들고 다니면서 생기는 위험하고 불편한 일을 없앴다. 이것은 근대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유대인들 모습과 똑 같다.

한편 금 거래상 들은 금을 맡겼던 이들 가운데 소수만이 금을 되찾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금이 없으면서도 금이 있는 것처럼 증서를 만들어주고 고리대금업을 하기 시작하여 실제로 보관된 금보다 점점 더 많은 증서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부분지급준비금 보유은행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 System)의 시초이다. 이 부분지준은 제도는 있지도 않는 돈을 빌려간 고객이 시중에 유통되는 돈을 긁어모아 바쳐야 하는 사기성 제도로서, 일반 대중을 가난하게 만들뿐 아니라 남의 돈으로 부를 챙기는 부도덕한 상행위이다.

또 중세의 금 거래상 들은 이미 시중에 유통되는 돈을 때때로 넘쳐나게 또는 부족하게 만들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 거래상 들은 돈을 많이 만들어 쉽게 빌려쓰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게 했다가, 어느 시기에 갑자기 돈을 거두어들였다. 시중에 돈이 귀해지면 융자를 받은 이들은 장사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만큼 빚진 돈을 갚기도 어려워지므로 돈을 빌려준 금 거래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금 거래상 들은 약속 불이행을 문제삼아 상대의 담보물을 헐값으로 빼앗았다. 지금의 실태와 똑 같다.

17세기 말 50여 년에 걸친 대외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한 영국정부는 환전꾼 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으며 그 대가로 개인 소유의 중앙은행을 허가해 주었다. 이래서 1694년 개인소유의 영국은행이 탄생하여 이자를 받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정부는 국민들의 세금을 담보로 이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이 영국은행을 모델로 사설 중앙은행이 설립되었다. 여하튼 영국정부는 이후, 계속 은행돈을 꾸어 통화량을 늘렸다. 시중에 돈이 늘어나니 경제상황도 호전되었다. 누구나 쉽게 은행에 가서 돈을 빌려 사업을 벌일 수 있었고, 취직하기가 쉬워지니 국민들의 수입도 나아졌다. 그러나 이후 중앙은행은 시중의 돈을 다시 거둬들여 국민들이 빌린 돈을 갚기 어렵게 하였다. 융자액은 그대로 있는데 이자로 은행에 계속 시중돈이 빨려 들어가고 있으므로 시중 통화량이 줄어 든다. 그러니 갚을 원금에 해당하는 통화량이 부족한 것. 이런 상황에서 공황이 일어난다.

그동안 영국은 계속되는 큰 전쟁으로 영국은행에 1억 4천만 파운드라는 큰 빚을 지게 되자 미국을 비롯한 식민지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당시 미국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금, 은 등 귀금속으로 만든 돈 대신에 식민지유가증권(Colonial Script)이라는 지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생산자의 물건이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적당량의 지폐를 찍어냈던 것이다. 미국이 제대로 된 화폐의 역할을 터득한 것에 크게 놀란 영국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가 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예를 따르기 전에 미국의 지폐제도를 없애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764년 영국의회는 화폐법(Currency Act)을 통과시키고 세금으로 금전이나 은전만 지불하도록 하였다.

로스차일드 왕국
이제 금권정치를 실현한 M. A. 로스차일드 및 그의 가문을 알아볼 차례다. 18세기 중반 프랑스혁명이 시작될 때까지 유대인은 재력을 쥘 기회가 기독교인들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 M. A. 로스차일드는 174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ghetto)지역인 유대인 빈민촌에서 골동품상 겸 고물상인 암셀 모세스 바우어(Amschel Moses Bauer)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M. A. 로스차일드의 아버지가 하는 가게에는 붉은 바탕에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진 방패모양의 간판이 달려 있었고, 가게이름도 '붉은 방패(Rot-Schild)'여서 후에 그의 성도 로스차일드(Rothschild)가 되었다.

M. A. 로스차일드는 10세 때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유대교의 랍비(rabbi)양성학교에 들어가 공부했으나, 도중에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가 하던 장사를 하였다. 그는 헌옷, 골동품, 가구 등을 취급하면서 다른 나라나 지역의 돈과 엽전, 그리고 옛날 훈장 등을 사들여 광을 내고 장식하여 귀족들에게 판매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돈을 벌어 귀족들과도 잘 알고 지내게 되었다. 당시의 독일은 여러 개의 작은 독립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황태자 빌헬름은 20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돈을 물쓰듯하였다. M. A. 로스차일드는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자신의 힘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황태자 가족의 일에만 극히 충성하여 결국 자기 가게에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특별 허가를 얻었으며 소규모 금융사업도 하게 되었다.

이윽고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이 지역 헤세하나우(Hesse Hanau)를 점령하자 빌헬름은 처가인 덴마크로 피신하면서 자신의 300만 달러가 넘는 큰돈을 M. A. 로스차일드의 은행에 맡겼다. M. A. 로스차일드는 이 돈을 기반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에 1억 파운드 이상을 빌려주어 단기간에 큰돈을 벌게 되었다. 그 당시 전비와 군수품 조달로 거대한 부를 쌓은 유대인 가문으로는 로스차일드가(家)외에도 오펜하임가(家)와 하이네가(家), 멘델스존가(家)가 있었다.  전쟁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은 오늘날 미국 그림자 정부와 똑 같다.

이 막대한 돈을 M. A.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첫째아들 암셀(Amschel)은 독일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가 나중에 통일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었으며, 둘째아들 살로몬(Salomon)은 오스트리아, 셋째아들 나탄(Nathan)은 영국, 넷째아들 칼만(Kalmann)은 이탈리아, 다섯째아들 야콥(Jacob)은 프랑스로 보내 경제권을 장악하게 했다.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각 지역의 상황을 알기 위해 서로 정보를 교환했으므로 다른 민족들에 비해 장사에 필요한 기회를 빨리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금력을 이용, 적국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유럽 각 나라에 분산되어 있는 형제들간의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잘 훈련된 비둘기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로스차일드 가는 서로 빈번하게 정보를 교환했으며, 그 정보의 양과 속도는 한 나라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정보망으로 한 순간에 큰 돈을 번 대표적인 예가 1815년의 워털루(Waterloo)전투였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부가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파악하기 전에 이를 이미 입수하였으며 나중에 반드시 급등할 공채를 많이 사두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나탄 로스차일드는 런던의 주식 시장에 나타나 ‘팔아라(Sell them)!’라고 외치고는 사라졌다. 그를 주시하던 사람들은 나탄이 팔라고 할 때에는 영국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앞다투어 주식을 팔려고 하였다. 자연 주식가격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나탄은 미리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다른 회사의 명의로 그 주식들을 몽땅 사들여 돈을 2천 5백 배로 불렸다. 재미를 본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때부터 항상 전쟁을 일으키려고 돈을 빌려주면서 군대를 양성하게 한 다음, 이웃 국가와 실력 대결을 벌이도록 하였다. 오늘날에는 실제로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가격에 해당하는 증서만 써주어 신용으로 물자를 사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의 독립과 링컨 대통령
M. A. 로스차일드는 미국이 독립하자 미국에도 손을 뻗쳤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자기 집에서 같이 살던 랍비의 손자 야콥 시프(Jacob Schiff)를 뉴욕으로 보내 미국총책을 맡겼다. 야콥 시프는 금융 회사인 쿤롭사와 동업을 한 후 동업자인 솔로몬 롭(Solomon Loeb)의 딸 테레사와 결혼하였다. 그후 철강산업의 카네기(Andrew Carnegie), 철도산업의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석유산업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등에게 자금을 대준 J. P. 모건(John Piermont Morgan)도 야콥 시프의 지휘 아래 움직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꾼이었다. 그의 소유로 알려져 있던 재산 중 19%만이 그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로스차일드의 것이었다.

1802년 M. A. 로스차일드는 독일계 유대인인 와벅 3형제중, 둘째 폴 와벅(Paul Warburg)과 막내 펠릭스 와벅(Felix Warburg)을 미국으로 보내 야콥 시프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첫째인 맥스 와벅(Max Warburg)은 독일에 그대로 남아 화벤(I. G. Faben: Hoechst, Bayer, BASF의 전신)이란 화학회사의 대표가 되어 나치 독일의 재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00년대 중반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이 가문은 각 나라 중앙은행의 주도권뿐 아니라 산업 분야의 주도권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하는 ‘시프, 와벅, 쿤롭’가문, 미국 출신의 은행가를 대표하는 ‘모건, 록펠러, 올드리치’가문 등이 혼인관계를 맺어 금권주의 황족을 이루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는 세실 로드(Cecil Rhodes)를 보내 다이아몬드 광을 위주로 막대한 돈과 정치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남미에는 미국 사업가들을 앞세워 각국의 중앙은행을 모두 차지하게 하였다. 나머지 지역은 자원을 공급하고 생산품을 소모하는 지역이 되었다.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은 독립 이후 가장 큰 시련이었다. 전쟁 전 미국북부 산업가들 은 남부에서 유럽의 값싼 물품을 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라고 요구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그 의견을 반영하였다. 그러자 수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유럽은 보복정책으로 미국 남부의 목화수입을 전면 중단했다. 그 결과 남부에서는 수입품의 가격인상에 따라 물가는 상승한 반면, 목화의 수출로가 막혀 수입은 줄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괄목할만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나라의 부흥을 즐기던 터였다. 그런 만큼 남부의 일반 대중들은 갑자기 실업자가 늘고 경제가 침체된 이유가 북부의 노예제 폐지 움직임 때문이라는 금융가들의 선전에 쉽게 동요되었다. 금융가 들은 그런 대중을 더욱 부추기고 전의(戰意)를 갖게 하여 자발적으로 군에 지원하도록 하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 등 국제금융가 들은 링컨이 그들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은 시간문제라 믿었으나 링컨 대통령은 개인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고, 1861년 2월부터 그린백이란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하였다. 링컨의 그린백은 정부가 중앙은행을 소유하고 화폐를 찍어낸다는 것, 돈이 필요할 때에는 무이자로 정부자신이 돈을 만들어 쓰고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원금만 갚는 것이었다.”
링컨은 1864년 재당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41일 째인 1865년 4월 14일 국제 금융가들의 사주로 극장에서 저격당하였다. ‘링컨의 서거는 크리스텐돔(기독교 세상)의 커다란 재앙이다. 지금 미국에는 그가 짊어졌던 짐을 질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다. 음흉하고 사악한 흉계로 가득 찬 외국 은행가들이 미국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미국을 조직적으로 부패시킬까 두렵다.’ 여하튼 그린백은 계속 통용되면서도 그 통화량이 늘어나지 않아 인플레없이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연방지급준비제도

마침내 1913년 미국 헌법상 보장되는 개인의 사업, 이름하여 연준은(연방지급준비제도: Federal Reserve Bank)이라는 중앙은행이 탄생하였다. 인플레와 디플레, 통화량의 증가와 수축 등 실제로 미국국민의 경제수준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된 이 연준은의 실제 주인은 미국의 록펠러, 골드만삭스, 레먼 등 세 가문, 그리고 유럽의 로스차일드, 와벅, 라자드, 쿤롭, 시프 등 다섯 가문이었다.

미국은 l863년에 마지막으로 '헌법에 의한 정부의 돈(Constitutional Money)'을 만든 이후 연준은의 국제금융가 들에게 미국의 경제 운명을, 아니 미국 국민들의 운명을 맡기게 된 것이다.

연준은 이사회는 이자율을 시계추처럼 약간씩 변동시켜 가면서 경기를 완만하게 올렸다 내렸다 하거나, 이자율을 크게 변화시켜 경기가 격렬하게 변동하도록 조작할 수 있었다. 또 현재의 연방지급준비법에 의하면 연준은이 10억 달러의 정부 공채를 샀다면 150억 달러의 새로운 여신을 만들 수 있으며, 중앙 정부를 포함한 지방 정부와 일반 사업체나 개인에게까지도 돈을 빌려줄 수 있다.

연준은이 진정 미국 정부의 것이라면 결국에는 미국 국민들이 부자가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정부는 연준은의 돈과는 관계가 없다. 미국정부는 오히려 돈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허수아비 기관이 되어 버렸다.

연준은의 은행가들은 사실상 미국의 주인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번 돈으로 석유 회사와 다국적 기업, 언론, 무기상, 마약상, 제약회사, 정치가, 정치 참모 등 자신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사들이는 것이다. 한 예로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두 가문이 갖고 있는 은행, 석유 회사, 항공사 등 다국적 기업체의 수만도 엄청나다. 더욱이 이 두 가문이 소유한 체이스 맨해튼 은행은 단독으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일으킬 수 있다.

1929년 대공황
공황조작의 첫 단계는 연준은이 통화량을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1921년 6월 317억 달러였던 통화량이 1929년 6월에는 457억 달러가 되어 44%나 늘어났다. 이렇게 돈이 넘쳐나자 돈벌기가 쉬어졌고 무엇이든 투자하는 대로 이익이 되어 돌아왔으며 특히 주식 매매가 가장 인기가 높아 주식을 사지않는 사람들은 바보취급을 당할 정도였다. 이는 바로 금융가 들이 제도적으로 주식을 사기 쉽도록 만들고 모든 언론 매체를 총동원하여 주식매매를 권장한 결과였다. ‘국제금융가 들과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대부분의 주요 신문을 소유하고 칼럼니스트들까지 장악했다. 그래서 부패한 그들 일당이 보이지 않는 정부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공직자들을 순종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사회에서 매장시키고 있다.’

이윽고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큰 은행들은 산하 모든 브로커 기관들에게 ‘24시간 이내 지불조항’을 적용하여 융자해준 모든 콜 대출을 24시간 내에 전부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주식 브로커나 주식을 산 모든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금액에 관계없이 소유한 주식을 몽땅 급히 팔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 주식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일어난 악명 높은 1929년의 위대한 몰락(The Great Crash 1929)이며, 그 여파로 전 세계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다.

공황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거래 은행으로 달려가, 있는 대로 돈을 찾아 증권 회사에 대출금을 갚으려 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거기에다가 당시 연준은은 무자비하게 통화량을 수축시켜 1929년 457억 달러에 달하던 통화량을 4년 후인 1933년에는 3백억 달러로 만들어 극심한 디플레를 조성하였다. 결국 전 미국에서 1만 6천개의 은행이 도산하고 기업체의 2/3가 파산하였다. 재산을 빼앗겨 가난해진 사람들은 늘고 공장의 생산량은 줄어들어 실업자 수는 급증하였다. 돈이 귀하니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도 어렵다.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면 모든 물가는 내려가, 돈 있는 사람들은 헐값에 부동산이나 동산을 사들이게 된다. 바로 1929년 대공황은 이렇게 조작되어 실업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다니는 극심한 경제파탄현상을 보였다. 이 대공황으로 잃은 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소수의 부자들에게 들어갔다. 즉 주식파동의 내막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들은 미리 주식을 팔아 안전한 금을 사두었고, 공황이 일어난 다음에는 이전 가치의 불과 몇% 가격으로 자산을 긁어모았다. 어쩐지 우리나라의 IMF사태와 형태가 비슷하지 않은가?

IMF와 BIS 그리고 IBRD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턴우즈에서 세계적인 경제회의가 열려 IMF(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와 BIS(the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국제결제은행)가 세워졌고, 다음해인 1945년에는 UN(국제연합)이란 세계 정부를 탄생시켰으며, 곧 이어서 국제사법재판소(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까지 설립되었다. 이후 미국의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연준은처럼, IMF, BIS, 그리고 IBRD(the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세계은행)는 전 세계의 화폐공급을 조작하여 세계 경제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 셰계은행은 그들의 구미에 맞춰 민중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며 BIS는 미국의 금융 카르텔(International Banking Cartel)인 연준은 같은 조직들을 도와 미국의 경제와 이자율 등을 결정한다.

한 예로 1988년에 BIS는 전 세계 은행들이 1992년까지 자본금을 늘려 전체 융자액의 최소 8%를 지급 준비금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들은 부분지준은 제도를 만끽하는 세계의 은행들에게 최소현금준비금과 마찬가지로 자본금과 예금 액수의 하한선을 8%로 잡은 것이다. 이러한 규칙을 정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지급준비금이 낮았던 일본이 1988년에 가장 먼저 큰 시련을 겪었다. 일본은 거의 즉각적으로 경제 침체를 맞게 되어 1990년부터는 50%나 주식 시세가 낮아졌고, 부동산 가격도 60% 하향 조정되었다. 이를 만회하고자 일본 은행이 1.5%라는 낮은 이자로 (거의 무료로) 융자해 주기 시작했는데도 경제는 계속 침체되기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사는 국가들이 빚에 쪼들려 곤란해지면 도와주는 기관이 IMF라고 믿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선 한 국가가 파산지경에 이르면 IMF가 나타나서 구제해 줄 테니 사회에 대한 '구조조정프로그램(Structural Adjustment Program; SAP)'을 이행하라고 한다. 우선 기업체들은 종업원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줄이고 임금을 가능한 한 대폭 낮추며, 노동법을 개조하고, 부실기업들을 정리하라고 하며, 미화(달러)에 대한 환율저하와 무역자유화를 요구하고 정부의 사회복지사업을 대폭 줄이도록 요구한다.

그러면서 IMF는 파산 직전의 국가들에게 경제정책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주지 않고 대신 몇몇 선진국에서 세금 명목으로 걷었다는 IMF의 자금으로 자기네에게 지고 있는 빚을 대신 갚도록 하여, 도움을 받는 국가의 사회 조건을 더욱 악화시킨다. 결국 이들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구조조정, 환율조정, 이자율조정, 노동법개조 등을 거치면서 다시 돈을 더 빌려 상환이 완전히 불가능한 지경으로 빠뜨린다. 그런 후 IMF는 더욱 구체적으로 내정에 관여하여 식량공급을 줄여 국민들을 더욱 헐벗게 만들며, 보건복지예산을 줄여 국민 건강을 피폐하게 만든다. 더욱 교육비용을 삭감하여 교육수준이 땅에 떨어지게 한다.

국제 엘리트들의 이러한 소위 '스팅오퍼레이션(sting operation)'에 걸린 국가들은 공유(公有)건 사유(私有)건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외국인에게 팔려고 한다. 돈이 될만한 것은 대개 그 국가의 자주권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기간산업인데, 이들을 판다는 것은 나라를 외국인들에게 내주고 국민들을 하인으로 격하시키는 격이다. 그런데도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현자(賢者)들은 상품과 화폐가 자유로이 교류될 수 있도록 경제적 국경을 없애는 경제적 세계화만이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라고 강조한다. 국민들이 가난하여 배가 고프면 그만큼 통솔하기가 쉽고, 일단 가난하게 만들어 기근이나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인구 조정에도 도움이 된다.

세계 금융 카르텔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정상에는 ‘전시안(全視眼, All Seeing Eye)'에 해당하는 엘리트 13인이 있다. 그들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1972년 스위스 제네바에 조직해 놓은 ‘국제은행위원회(International Banking Commission : IBC)의 대표들이다. 이 위원회는 미국의 연준은, 영국의 영국은행,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의 중앙은행에서 각각 2명씩, 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에서 각각 1명씩 선출된 멤버로 되어있다. 또한 그들은 ‘4 I(Four-I)' 라고 부르는 정보처를 갖고 있다. 4 I의 원래 이름은 국제정보보급연구소로 로스차일드, 록펠러, 빌트, 골드벅 등의 가문이 조종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BIS와도 연결되어 있다. 엘리트들인 국제금융가 들은 세상의 돈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조작하며, 여신을 통괄한다. 그 밑에는 삼위일체식의 IMF, BIS, 세계은행과 방계 조직인 OECD가 있으며, 그 산하에 연준은을 위시한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의 경제가 빚을 조작하는 개인은행 중심으로 만들어진 경제체제에서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빚의 함정으로 빠지게 된다. 엘리트들은 러시아의 황정을 무너뜨리면서 제정 러시아의 금을 훔쳐갔고, 일본에서도 전후에 금을 훔쳐갔으며, 포트낙스 금괴 보관소에서도 금 등을 훔쳐갔다. 이렇게 모은 금이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부근의 멜리놈이라는 미 공군 기지에서 미군 2만 명의 보호하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스위스 취리히 근처의 클라우텐 귀금속 보관소와 제네바 근처의 움브레아 귀금속 보관소, 빈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라인 공군 기지 등에 각각 나뉘어 보관되고 있는데, 이 금만도 4천 7백조 달러(4.7 Quadrillion)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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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은 재산이 아니다. 주식도 채권도 재산이 아니다. 언제나 휴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떨어질 수 없는 것은 부동산이다. 그 중에서도 땅이다. 실제 이용하고 있는 아파트도 땅 다음은 간다. 상가나 오피스텔은 감가상각을 고려하면 별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면 안된다. 돈은 임기응변의 도구일 뿐이다.

Cash 보유는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real estate 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Realty를 팔아서 cash로 몽땅 가지고 있거나 투자나 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