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賦, fu (중국 문학)

hanngill 2008. 11. 3. 08:35


'賦'는

굴원(屈原:BC 343경~289경)의 〈이소 離騷〉에서부터 발달한 형식인데,

한대(BC 206~AD 220)에 와서 보다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소'(騷)와는 대조적으로 묘사와 해설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 운율은 소에 비해 자유롭고 운(韻)의 양식은 덜 제한적이었다.

긴 행, 중간 휴지(休止), 균형잡힌 대구(對句)의 요소들을 갖는다.

운의 사용은 부를 순수산문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시와 산문의 중간에 놓는 요소이다.

 

부 형식은 한대에 사소하고 진부한 묘사를 목적으로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일부 작가들이 이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기도 했지만, 생소한 낱말이나 미사여구를 남발하고 필요없는 군더더기 말을 많이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백 년이 지나 송대(960~1279)의 구양수(歐陽修:1007~72)와 소동파(蘇東坡:1036~1101)에 이르러 그 수준이 현격히 높아졌다.

이들은 부를 시보다 산문 쪽에 더 가깝게 했으며, 철학적 관심사를 표현하는 데 이용했다.

 

한국의 경우는 최치원의 〈영효부 詠曉賦〉가 가장 처음 나타난 작품이며, 〈동문선〉에는 김부식의 〈아계부 啞鷄賦〉를 필두로 이규보·이인로·최자·이색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도 부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이행이 66수의 풍작을 보였고, 강희맹·김종직·박상·박은·백광홍·최립·이산해·장유·이정구·김창협 등의 작품이 간혹 보이나, 내용에 있어서 천편일률적인 진부함을 보일 뿐이었다.

영·정조 이후에는 고부(古賦)의 변형인 과부(科賦)가 과거에 출제되면서 부가 성행하게 되었다. 과부는 옛 시문 중의 한 구절을 따서 부제를 삼아 1구 6언으로 30구나 60구를 채우되, 운을 달지 않고 매 구절 넷째 글자마다 허자(虛字)를 넣어 짓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 역시 형식에 치중하여 내용이 빈약하기 쉬웠고, 사부로써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 비판이 일어 큰 발전을 보지는 못했다. 과부가 필요없게 된 한말에 몇 편의 고부가 다시 등장했다가 사라졌는데 김택영·이건창·이중균·조긍섭·변영만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