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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운들 - 이청준

hanngill 2008. 8. 13. 21:34

제민濟珉이 버스에서 내려 주막을 찾아든 지는 벌써 한 시간여. 또 한 대의 버스가 저쪽 초등학교 담벼락 곁으로  뽀얀 먼지 구름을 끌며 달려왔다. 그새 이 한적한 시골 면소 길을 지나간 버스만도 벌써 세 대째다. 버스는 이내 약방 가게께의 정류소 앞에 속력을 멈추고 느릿느릿 손님들을 몇 사람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흔히 시골 버스들이 그렇듯이 차 속의 운전사는 한동안 옆 유리창으로 검은 얼굴을 내어민 채 매표원 사내와 욕설 섞인 쌍소리 농지거리를 걸찍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차속의 승객들은 그쯤 운전사 녀석들의 수작엔 버릇이 배긴 듯 말없이 수작이 다하기만 기다리는 꼴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손님들은 그새 어디론가 제 갈길들을 찾아들었는지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운전사의 수작이 다하고 난 버스도 부릉부릉 시꺼먼 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약방 가게앞을 떠나갔다.

 

유리창 밖 면소 거리는다시 지루하고 답답한 늦여름날 오후의 정적만 가득했다. 더위 때문에 그런지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드물었다.하물며 그 유리창 밖 길거리로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를 바라기란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노릇 같기만 했다.

 

버스가 떠나간 빈 거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제민은 갑자기 다시 가슴속이 텅 빈 듯 황량스런 절망기가 엄습해 왔다. 부질없이 자꾸 시간만 초조해졌다. 혹시 아는 얼굴이 한 사람쯤 길을 지나칠까 싶어 차를 내리는 길로 곧장 이 길가 주막으로 숨어 들어와 뽀얗게 먼지가 낀 유리창 가에 주저앉아 홀짝거리기 시작한 낮 술기가 어느새 가슴속을 그토록 더 황량스럽게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민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참나뭇골 사람이든 누구든, 사정을 알 만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야했다.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무턱고 자리를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여기 술 한 되 더 주시오."

가게 안쪽마저 너무 조용했다. 그야 대낮부터 술손이 붐빌 리는 없었다. 손님이라곤 다만 제민 한 사람뿐. 주점 여편네는 이  안주도 시키지 않는 뜨내기 술 손 따위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문을 보탤 때마다 간신히 술 한 되씩을 가져다놓곤 번번이 다시 술청 안쪽 내실로 모습을 거둬가버리곤 했다. 

 

그는 여자를 보지도 않고 부턱대고 내실 쪽을 향해 술 한 되를 더 청하고는 다시 창 밖을 지키기 시작했다. 길거리 건너편 기와 지붕 너머로 묵연스런 여름 하늘이 끝없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꽃이 핀들 아는가.

새가 운들 아는가!

그 하늘의 어느 한 자락에서처럼 노인의 목소리가 문득 그이 상념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꽃이 핀들 아는가, 새가 운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 소리의 환청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간 어느새 또 마음이 부쩍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노인을 찾는다?'

 

 

그새 여자가 놓아두고 간 술 주전자를 새로 비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새삼스레 다시 창 밖을 열심히 지키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지간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를 내리고도 어느 쪽 어느 동네로 노인을 찾아나설지 막막한 맹랑한 귀향길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민으로서도 이번에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철 장산가 뭔가, 일대에선 술꾼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던 그의 형이란 위인이 술값을 대다 대다 마침낸 그 고철 장사를 시작한다는 구실로 선대로부터의 집기등을 팔아치울 모사를 꾸미고 나섰을 떄부터 그이 귀향길은 늘 그런 식이었었다.

 

제민이 K시에서 고등학교 3학년을 다니고 있었을 때였다. 

그해 여름, 제민은 방학이 되어서도 고향 마을 참나뭇골엔 내려가 볼 생각을 못하고 K시에서 그냥 밀린 진학 공부를 계속하고 있던참이었다. 하루는 시골집 노인으로부터 심상찮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야 아무리 진학 공부가 급하기로 하루 이틀 시골 내러가 노인을 뵙고 올 수는 있었지만 술꾼인 형의 행패가 보기 싫어 처음부터 아예 K시에서 진학 준비에나 전념을 하기로 작정을 세우고 있던 그였다.

그의 형이란 위인은 전서부터도 그런 술꾼이었다. 남자 다섯 형제 중에 가운이 기우느라 그랬던지 8.15 해방을 전후한 2,3년 사이에 그의 아버지와 3형제 네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등져갔다. 그러고 나서 남은 두 형제 중에 형이 된 사람이라도 좀 온전한 정신을 지녀줬으면 별 탈이 없었을 것을 하나뿐인 형이란 위인조차 무슨 비운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일찌감치 술을 배워 취중몽생의 가련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남은 형제에게서나마 이른 손을 보고 싶어진 노인이 남달리 서둘러 장가까지 들여줬건만 형이란 사람은 자신의 여자나 아이들마저 돌봄이 없었다. 사람만 만나면 술을 사고 싶어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함께 취해서 주유천하를 하고 다녔다. 시골 살림으로 농사가 모자란 편도 아니었지만 그 형의 술값 때문에 가계마저 온전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마침내 아들이 주벽에 체념을 하고 말았다. 살림이 다 무너져나더라도 집안이나 조용했으면 싶겠다는 식이 되었다. 집안에 분란이 끊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집안 남정의 주벽을 견디다 못한 형수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피해가버린 뒤로는 노인 혼자 도맡아 곤욕을 치러내야 했기때문이다.

이꼴저꼴이 다 보기 싫어 제민은 아예 시골집엔 내려가 볼 생각조차 안 들었다. 형의 주정이 미웠고, 그것을 곧잘 견뎌내는 노인의 처지가 짜증스러웠고, 거기에 더욱 술만 취하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형의 행패가 귀찮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 쯤되어 있던 여름이었다.

그리고 집안 꼴이 그렇고 보니 필경엔 어느 쪽에서든 어떤 몹쓸 변고가 일고 말 것갗은 망연스런 예감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마침내 그 심상찮은 글월이 날아든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이 형에게서 온 글이 아니었다. 글씨도 쓸 줄 모르는 노인이 다른 사람을 시켜 쓴 대필 편지였다. 안에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하루만 틈을 내어 당신을 좀 보고 가라는 당부였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그 길로 참나뭇골 시골집 노인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그 불길한 예감이 부질없는 기우가 아니었음을 목도하게 됐다.

제민의 시골집은 참나뭇골 동네로 들어서서도 한 100여 미터쯤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골목길 오침께에는 그의 어렸을 적부터 먼 친척간 되는 누님 한 분이 가난한 오막집 살립을 살고 있었다. 그 누님이란 사람이 저녁 어스름 속에 골목길을 들어서는 그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골각담 너머로 불쑥 그의  발길을 불러세웠다. 그녀가 혀를 차며 그에게 일러준 소린즉, 그이 집이 이미 동네 다른 사람에게 팔려 넘어갔다는 통기였다.

집도 팔리고 세간도 이미 다른 이웃으로 옮겨간 다음이니 집엘 가봐야 노인은 그곳에 계시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노인을 찾아 모시고 와서 자기가 두 모자를 위해 모처럼 저녁이라도 짓겟노라, 서글픈 위로의 당부였다.

그녀의 귀띔에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불시에 그 기둥 위의 모진 도끼질 자국부터 머리에 떠올랐다.몇 대 조부가 그랬다던가. 가난한 유민으로 마을엘 들어와서 그 가난과 유랑살이에 지치다 못해 집이라도 한 칸 큼지막하게 지어 살고 싶은

소망에서 벌어들인 것, 있는 것을 다 털어바쳐 힘에 겨운 집 짓기를 시작했었더라고 했다.

집을 한꺼번에 다 세운 게 아니라 집터만 우선 잡아놓고 힘이 조금씩 모아질 때마다 당신의 손으로 방 한 칸 들이고 마루 한 칸 놓고 하는 식으로 몇 해씩 세월을 끌어가면서. 

그런데 그 집 짓기가 하도 고되고 긴 세월을 끌다보니 그 조부는 어느 날 설움에 겨운 팔자 원망 끝에

당신이 세운 마루 앞 기둥에 정신없이 도끼질을 하다 말고 어린애처럼 엉엉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더라고. 그 조부의 도끼 자국이. 그 조부의 기막힌 원망과 통곡 소리가 무슨 가훈처럼 흔적지워져 있던 그런 집이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정결스런 노인의 싸리지질 자국이 마당가에 참빗살처럼 남아 있던 그런 집이었다.

돌보지도 않은 접시꽃과 봉숭아가 해마다 장독 뒤에서 탐스런 여름을 꾸미던 집이었다.

 

'그런 집을 팔아치우다니.'

머지않아 무슨 변고가 나고 말리라는 예상을 지녀온 터엿찌만 형이란 위인이 하필이면 그 집에서부터 먼저 손을 대기 시작하리라곤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손을 댄다면 논밭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선산 터를 제외한 3정보짜리 산판 정도나 요절이 나리라 예상햬오던 그였다.

그런데; 위인이 제일 먼저 집부터 덜렁 팔아 치우고 말았댔다. 그는 머릿속이 다 멍해져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팔려버린 집을 찾아가본달 수는 없는일이었다. 남 보기가 부끄러워 누님 대신 노인을 찾아나서겠달 수도 없었다. 그는 공연히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남의 집 담벼락 뒤에 숨어서서 서성서성 하염없이 노인을 찾아나간 누님이 돌아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둘씩 저녁 하늘에 돋아나기 시작한 밤 별들마저 유난히 멀어만 보이던 저녁이었다.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을까.

"여기가 뉘집인데 내 자식이 여기 이러고 서 있더냐!"

소식을 듣고 누님을 앞장서 달려온 노인이 어둠 속으로 불쑥 사립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노인은 사립을 들어서자마자 핀잔부터 앞세우며 그를 골목길로 끌어내갔다.

"어서 가자. 집이 없더냐. 길이 없더냐. 동네를 들어섰으면 곧 에미한테로 오지 않고 

 어째서 그리 집도 절도 없는 길손 꼴로 남의 집 사립을 들어섰더란 말이냐."

뜻밖에도 노인은 옛날 집으로 그를 데려가고 있었다.노인은 이날도 그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제민은 처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집이 팔렸다는 말이 헛소리일 수는 없었다.

노인은 아마 이날까지 그를 위해 새 주인의 이사를 막고 며칠 동안 그 곳에서 아들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노인은 그가 아직 집이 팔린 줄 모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집이 팔린 사실을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노인의 거동이었다. 

그 노인 앞에 그는 아무 말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노인을 따라 묵묵히 그 어두운 골목길을 뒤쫓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노인 쪽도 집이 팔리고 안 팔린 일에 대해선 가부간 말이 없었다.

하지만 노인과 그가 그 옛날 집 문간을 들어섰을 땐 이미 모든것이 분명했다. 아니 노인네가 아직 그에게 집이 팔린 사실을 모르고 있기를 바란 것같았다는 소리초자 쓸데없는 그의 추측이었을뿐이다. 집 안 풍경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집 안에선 온통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할 뿐 변변한 살림 도구 하나 눈에 띄어오는것이 없었다. 마당가 군데군데에선 삐죽삐죽 여름 잡초들까지 돋아나 있었다. 살림 사는 집이 아니었다. 세간을 비운 지가 한 주일은 넘은 집안 꼴이었다. 아들에게 마지막 하룻밤을 지내게 해주기 위해 그날까지 노인이새 집주인의 이사를 미루게 해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서 노인은 어디선가 이날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 하니까 물론 집 안에선 그 노인 이외에 이미 친정으로 간 며느리뿐만 아니라 당신의 큰 아들조차도 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집이 팔리면서사람과 가재 도구들이 제풀에 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갔을 터이었다.

한데도 노인은 아직 안방 아랫목에 당신이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낡고 작은 옷장 하나와 이불

뙈기 몇 조각을 사람 사는 집 치장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노인에게선 이날 밤까지도 아직 제민이 그의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은 아무것도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노인은 다른 떄 그가 방학을 맞아 집을 다니러 갔을 때 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두운 부엌에서 저녁을 지어 내왔고, 호롱불 아래 모자가 말없이겸상으로 저녁을 끝내고 나서도 겨우,

"이제 내일은 이 집을 비워줘야 한다. 마지막 밤이니 편히 쉬거라."

앞도 뒤도 없이 한마디를 건네고는 그대로 그냥 잠자리를 깔아 버린 것이었다. 제민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긴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는 노인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고, 노인 쪽 역시 그의 심중을 환히 다 들여다보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말은 없어도 이미 모든 일이 그렇게 너무 분명해져 있었다.

"고철 장사 때문이란다. 네 형이 이번엔 맘을 좀 고쳐먹었는지 그걸 시작해보고 싶다는구나.

이곳저곳 시골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헌 쇳조각을 모아다가 도회지 주물 공장에다 팔아넘기

는 일이라더구나. 시골 구석에 무슨 쇳조각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마는. 네 형이 그래도 뭘

좀 해보겠다고 나선 일이니, 집 없앤 것을 너무 상심해하지 말고 네 할 공부나 부지런히 계속

해 나가거라. 마음을 늘 독하게 다잡아먹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노인이 당부삼아 그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인은 그 아침서부터 벌써 그를 K시로 돌아가랬다.제민 역시 이젠 남의 집이 되어버린 곳에서 기분 언짢은 날을 보내고 있기는 뭣하던 참이었다. 노인이 집을 비우고 마지막 살림을 옮겨가는 곳이라도 알아두고 나선 아무래도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하지만 노인은 그에게 그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집을 비우기 전에 그부터 길을 나서라는 재촉이었다.

"네 형 일이 잘돼 나가면 몰라도 내년에는 네 웃학교 입학 시험도 치러야 한다면서. 지금 이런

형편으로야 어디 입학금 마련인들 손쉬울 수 있겠더냐. 그래서 이번 일은 네 형을 핑계삼아 그것도 좀 함께 마련해볼 양으로 저지른 일이었더니라."

그러면서 입학 시험이 반년도 더 남은 그의 대학 진학 자금조로 베보자기 속에 꽁꽁 눌러 묶은 20만 환짜리 지폐 뭉치 하나를 옷장 속 어디선가 꺼내 건네주던 것이었다. 제민은 물론 형의 술값 때문이 아니라고 고철 장사 밑천 마련을 위해 집을 처분했다는 노인의 말은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고철 장사라도 시작하겠노라는 형의 설득과 다짐이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노인이 그것을 곧이 들었을리는 없었고, 

설사 그의 형이 정말로 그런 일을 시작했다고 해도 거기 무슨 기대를 걸었을 노인도 아니었다. 막상 마음을 고쳐먹고 고철 장사 일을 시작했다는 형의 근황이나 행방에 대해서는 여하간 말이 없이 입을 다물고 넘긴 노인이었다. 형의 술값으로 고스란히 집을 없애느니 거기서 얼마간 그의 학자금이라도 건져내 보자는 노인의 생각이 제민은 듣지 않아도 다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당신을 좀 보고 가라던 노인의 사연도 그 돈을 그에게 안전하게 전해주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했다. 노인의 말은 모두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소리일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쯤에서 다시 길을 나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신이 몸을 옮겨담을 곳이나 보고 가재도 한사코 거짓 노여움을 꾸며 짓는 노인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노인의 말년 방황이었고, 그때부터 시작된 그의 딱한  고향길이었다.

고향 동네라는 델 찾아들 때마다 노인이 몸담고 있는 곳을 몰라 동네를 들어서면 우선 그것부터 물어 찾아야 하는 그의 그 거북살스럽기 그지없는 귀향 절차는 그때부터 그렇게 마련돼 온 것이었다.

 

 

 

약방 앞에 다시 한 대의 버스가 들어와 섰고, 몇 사람의 손님이 내린 다음 예의 약방 쪽 매표원과 운전사 녀석 간의 실없는 농지거리가 한동안 계속되고 난 다음, 그 버스도 느릿느릿 다시 정류소를 떠나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노인의 행방을 물을 만한 얼굴은 아직 한 사람도 창가를 스치지 않았다.

술집 아낙은 이제 파리채를 들고 슬금슬금 술청 한구석 걸상으로 나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물론 파리를 쫓자는 것이 아니었다. 무작정 시간만 기다리고 앉아 있는 낯선 손님의 거동이 그녀에게 아무래도 수상쩍어진 모양이었다.

흘끔흘끔 언제부턴가 자주 이쪽 동정을 훔쳐보는 기색이 여간만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자의 거동 같은 건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어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 새삼 사지를 건들건들 길거리를 헤매기도 견딜 만한 노릇이 못 되었다. 소식을 들을 만한 얼굴이 뜨일 때까지는 자리를 좀 더 지키고 앉아 있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노인이 어느 동네 쪽을 떠도는 줄이나 알고 있을때는 그래도 사정이 한결 수월한 편이었다. 노인의 거차가 있는 동네라도 알고 있었을 때는 차를 내려서부터 발길을 못 잡고 어성대는 곤욕까진 치룰 필요가 없었다.

 

집을 팔아 없애버린 후 처음으로 다시 노인을 찾은 것은 그러니까 그가 대학 2년을 다니다 중도에 군복무 3년을 끝내고 나와 다시 다섯 학기째 학교 등록을 마쳐놓고 있을 때였다.

노인은 한 번 집을 팔아버린 후로는 당신의 주변 일을 알려오는 일이 없었고, 그 역시 집안 일이나 노인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소식을 물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알아봐야 반가운 소식은 있을리 없어 그는 혼자서 그럭저럭 학비 마련을 해나갔고, 훈련소 입영을 해갔을 때마저도 그는 군복으로 갈아입은 민간복을 노인 앞으로 부쳐 보낸 것으로 입영 소식을 대신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제대를 하고 나서 들려온 풍문이 이젠 노인이 아예 참나뭇골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형이란 사람이 그 고철 장사를 핑계로 집을 팔고 논밭을 팔고, 마지막엔 조상들의 뼈가 묻힌 선산까지 팔아 없애자 노인은 동네 사람 얼굴 보기가 부끄럽다며 온다간다 말없이 참나뭇골을 등져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제민은 거기까지 소문을 듣고도 모른체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형이란 사람이 정말로 선산까지 팔아마셨는지 어쨌는지 사실이나마 확인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인의 행방이라도 알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다시 고향 마을을 찾아내려갔다. 

이번에는 참나뭇골까지 노인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차를 내리자마자 면소 정류소 앞에서 마침 아는 사람을 하나만나 그쪽에서 먼저 노인의 거처지를 알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턴 아예 버스를 내려서부터 노인이 몸을 의탁하고 있을 마을을 번번이 다시 물어야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인은 그 무렵부터 옛날 참나뭇골에서 10여 리쯤 떨어진 같은 면내의 한 일가댁에다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거기서 당신 혼자 끼니를 끓여가고 있었다. 그의 형이 논밭에 선산을 모두 팔아 없앴다는 소문도 물론 사실과 어긋남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제민은 노인의 주변에서 이상스럽게 언짢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노인의 방 선반 위에 커다란 소나무관 하나가 길게 얹혀져 있었다. 노인의 집(노인은 한사코 그걸 당신의 집이라고 말했다)이라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육신조차 의탁할 데가 없는 팔자에..........

노인에겐 언젠가 당신의 사후를 위해 미리 생전의 모습을 담아 놓은 커다란 사진 한 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집을 팔아 없애면서 생전의 육신도 간수할 기이 없는 팔자가 죽음뒤의 사진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싶어 당신 손으로 사진을 갈갈이 찢어 없애고 말았다 했다. 

그리고 그 사진 대신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의 몸을 담아갈 집이라도 미리 마련해두어야 마음이 놓일 것같아 당신 자신의 주선으로 그 내세의 집을 마렪해놓았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마음이 언짢기는커녕 할 일을 다 끝내놓은 사람처럼 그것이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속에다간 당신이 입고 갈 수의감까지 차곡차곡 다 마련을 해두었을 정도로 마음이 답답해져 있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마침내 당신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집을 끔찍히 소중스러워하듯 노인은 당신의 마지막을 가까이 익히고 그것과 허물없이 친숙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허지만 제민이 그 노인의 진짜 깊은 소망을 본 것은 거기서도 아직 하루가 지난 다음날의 일이었다.

"그새 산들이 많이도 헐었으리라마는 형이란 사람이 어디 웃대 무덤을 덮고 들어온 푸나무 한 가진들 손질해 놓을 중정을 지닌 위인이더냐?"

다음날 아침 노인은 제민이 내려온 김에 이젠 남의 땅에 묻혀 있는 조부들 무덤에서 잡초라도 거둬주자고 10리가 넘는 산길로 참나뭇골 선산까지 그를 재촉해 끌고 갔다. 제민이 막상 선산엘 당도해보니 노인이 형의 게으름을 탓한 것 역시 모두가 헛핑계에 불과한 소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상의 묘지들은 손을 더 볼 필요가 없을 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것은 물론 형의 부지런함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이 자주 산을 찾아가 말끔히 손을 보아둔 것이었다.

남의 땅에 묻혀 있는 선대들의 무덤을 찾아 다니는 것이 마지막 의무요 취미가 된 것처럼 노인은 그곳을 자주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민에게 함께 헐은 곳을 손보러 가자던 소리는 그를 끌어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노인은 그에게 선대들의 무덤을 둘러보게 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노인은 이날도 묘지들의 주변을 낫질해나가면서 버릇처럼 흥얼흥얼 혼자소리를 응얼대고

있었다.

꽃이 핀들 아는가.

새가 운들 아는가..............

그것은 언젠가 제민이 스물을 넘겨 살다 죽은 맏형의 무덤을 따라갔을 때 노인이 먼저 간 자식을 두고 노랫가락처럼 원망스럽게 되뇌이던 그 소리. 그 가락 그대로였다. 뿐더러 노인은 이따금 굽혔던 허리를 펴 일으키며 한숨이라도 토하듯 말없는 무덤들을 향해 아픈 푸념들을 들어놓곤 했다.

"..........어이 그리 말들이 없소.여기가 그래 뉘 땅이 되었는데. 이이 그리 무심히들 말도 없이 누워들만 계시오. 눈이 없다고 남의 땅이 된 줄을 모르시오. 입이 없다고 할말들도 없으시오. 어이 그리 무정들하시오. 남의 땅에 누워서도 자리들이 편하시오......."

산을 찾을 때마다 되씹고 곱씹던 조상 원망의 소리였다.

그날 제민이 그 노인의 깊은 소망을 보게 된 것은 그러나 그 노인의 푸념에서뿐이 아니었다.

묘지 주변에 울창하던 소나무들 가운데에 유독히 기억에 깊이 남아 있던 거목 파나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나무를 베어낸 자국이 오래된 것 같지가 않았다. 알고  보니 산을 팔기 전에 노인이 바로 그 나무를 베어다 당신의 집을 지었노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토록 당신의 마지막 길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거꾸로 그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처럼 평온스럽게 그것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지만 노인에게 당신의 몸을 묻을 땅이 없었다. 선산은 이미 남의 땅이 되어 있었다. 

___어찌 그리 무정들도 하시오. 남의 땅에 누워서도 마음들이 편하시오....노인의 조상 푸념은

그러니까 결국 당신 자신의 육신을 묻을 땅을 잃은 데 대한 원망이요. 불안이었다. 당신의 육신이나마 안심하고 묻어갈 땅에 대한 안타까운 소망이었다. 가련한 노인이었다.

 

그는 마침내 노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산 때문에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집이나 논밭은 모르더라도 선산은 어떻게 다시 찾을 길을

마련해 보겠어요.'

제민은 적어도 노인이 땅에 묻히는 일이 오기 전에 선산을 되찾을 마련을 해보겠으니 얼마간 목돈이 손에 잡히 때까지 시일을 좀 기다려보자고 노인의 심사부터 안심을 시켜두었다.

그리고 노인이 제법 마음을 놓은 표정을 보고 서울로 돌아온 그였었다. 

허풍을 섞어서라도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처지였다. 정말로 그런 목돈이 손에 잡힐 날이 올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로선 제민의 심경 역시 어떻게 해서든 선산이라도 다시 찾아놓은 다음에 마음 놓고 노인이 눈을 감게 해드리고 싶은 것이 거짓없는 진심이었었다.

허지만 그 뒤로 도대체 그의 처지라는 게 어떻게 되어왔던가. 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노인에게 선산을 되돌려 갖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돈을 좀 모아보자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것은 물론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잡지사 기자 노릇을 시작하면서부터의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노인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고 그것을 실현시켜볼 노력을 기울였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늘 마음 같지가 않았다. 그는 선산을 돌려 받을 만한 진짜 목돈을 쥐어야만 노인을 찾아갈 수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을 더 기다렸으나 일은 여전히 뜻 같지 않았다.

노인을 실망시킬 소식 같은 건 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노인을 찾아볼 기회만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노인 쪽에서도 물론 소식이 있을리 없었다. 노인이 어디로 또 몸을 옮겼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노인에 대한 그의 약속은 뒤늦게나마 노인을자주 찾아뵙기라도 해야겠다던 결심마저 깡그리 허사로 만들어버렸다.

 

제민이 다시 노인을 찾아 고향길을 나선 것은 노인에게 그 소중스런 약속을 지니게 한 지 4년이 훨씬 더 흐른 다음의 어느 해 가을이었다.

 

 

 

 

버스가 다시 한 번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초등학교 담벼락 곁을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은 아직도 길을 스쳐갈 기미가 안 보였다.

길고 먼 여름 해도 이젠 어지간히 열기가 기울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같았다.

 무작정 기다리고만 앉아 있다간 남의 술청에 눌러붙어 밤까지 새우게 될 판이었다. 

순서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제민은 마침내 자리를 일어섰다.그리고는 여태도 아직 술청구석 탁자에 기대어 조을조을 파리를 쫓고 앉아 있는 아낙에게 술값을 치르고 천천히 가게 문을나섰다.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다면 해 있을 때 먼저 참나뭇골이라도 다녀오는게 좋을 것같았다.

그는 그 참나뭇골의 산길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선산을 넘겨 사간 참나뭇골의 새 산주인 

영감을 만나보기 위애서였다. 차에서 내려 노인을 찾아본 다음 새 산주인을 만나보려던 것이 그의 애초 계획이었다. 노인의 행방을 찾아낼 수 없다면 산주인을 먼저 만나 노인의 집터부터 결판을 내놓는 것도 방법일 수 있었다. 노인을 먼저 만난대도 다음엔 어차피 서둘러 찾아봐야 할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수로든지 그를 만나 노인의 집터 문제를 결판내야했다.

참나뭇골을 찾아가보면 노인의 행방도 알아볼 길이 생길 수 있었다.

그는 해지기 전에 참나뭇골을 들어서기 위해 발길을 더욱 다잡아 대기 시작했다. 하니까 그 선산을 

두고 노인에게 다짐한 제민의 약속은 4년뒤에 그가 다시 노인을 찾아 갔을 때도 여전히 실현 불능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4년 뒤에 갑자기 그가 고향을 찾게 된 것도 노인과의 약속 때문이 이니었다.

 

그 해 가을 추석 전날의 오후였다. 어물어물 퇴근을 미적거리고 있는 그에게 느닷없이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되어왔다.

'형 사망, 장례 완료.'

장례까지 모두 끝내놓고 띄운 전보였지만 어쨌거나 그가 아무 마련도 없이 고향 차를 탄 것은 그 한 장의 전보 때문이었다. 제민이 그 전보를 받고 형이란 사람이 마지막까지 술을 마셨다는 마을을 찾아가보니 아닌게아니라 그는 훨씬 전에 벌써 매장 일까지 꺠끗이 끝이 난 다음이었다.

집과 논밭과 선산까지 모두 팔아마신 형은 동네 아이들에게 술단지와 소주병을 지워 강물 가를 찾아다니며 약을 풀어 장어를 잡고 그 장어를 강가에서 끓여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는 그 술값 마저 더이상 마련할 길이 없게 되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장어 약을 털어마시고 강물 가에서 숨을 거둬가고 말았다는 거였다. 어째서 그에겐 형의 자살을 곧바로 알리지 않았느냐니까

그게 모두 노인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노인에게 가지고

갔지만 노인은 아들의 매장도 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형의 육신을 담을 집을 지을 재목이 구하기 힘들어 당신의 집을 아들에게 주고 다음에 다시 당신의 

집을 지어주겠노라 설득을 해봤으나 노인은 절대로 당신의 집을 내 놓을 수가 없노라며 어미가 

어찌 먼저 간 자식 놈의 집까지 마련해줘야겠느냐더라는것이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당신의 매정스런 외면은 고사하고 노인은 서울 가 있는 제민에게마저 절대로

 형의 일을 알리지 말라는 비정한 당부까지 덧붙이더랬다. 제민이 형의 죽음을 보러 갔을 때도 노인은 아직 아들의 육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조차 찾아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아들의 무덤 근처를 찾아 보기는커녕 노인은 처음 당신의 행방조차 아리송해진 형편이었다.

알기 쉬운 길로 제민이 형의 무덤을 먼저 찾아보고 그리고 노인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당신이 몸담고 있는 마을을 찾아가 보았지만 노인은 거기서도 벌써 자취를 감춘지가 며칠째나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에겐 따로 갈 곳이 있을 수 없었다. 하룬가 이틀 뒤에 어슴프레 당신의 행적을 뒤쫓아가 

노인을 만난 곳이 역시 그 참나뭇골 선산의 조상들 무덤 가에서였다.

노인은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모른 채 며칠 동안 어디론가 발길을 헤매고 다니다가 종당엔

다시 조상들의 동네를 찾아간 것이었다.

'꽃이 핀들 아는가. 새가 운들 아는가. 귀가 있어 들을손가. 입이 있어 말할손가.'

그날도 노인은 말없는 그 조상들 원망으로 한숨과 눈물이 마르던 참이었다. 

'어리석고 못난 자식, 집이 없던가 산이 없던가. 제집 살림 다 없애고 개미 새끼도 돌 볼 이

없는 남의 땅을 뉘라서 쫓겨가 묻혀 누우랬던가.'

노인의 푸념 속에는 이제 형에 대한 원망까지 새로 더해져 있었다. 당신의 배를 앓아 낳은 자식인데

 가산을 팔아마시고 간 혼령인들 어찌 정을 지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제 손으로 산을

팔아버린 허물로 제 육신도 조상들의 산 발치에 묻히지 못한 못난 못난 자식에 대한 푸념이었다. 

남의 땅에 집터를 잡아야 할 당신 자신의 사후에 대한 불안스럽고 서글픈 신세 한탄이었다.

노인에 대한 약속을 실현해주지 못하고 있던 제민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민망한 푸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 그런 아들에 대해선 별로 기대를 남기고 있지 않는 눈치였다.

"산주인 영감을 남나 사정을 했었더니라. 이 늙은 것 하나 선산 발치에 붇히게 해주시라고...

그렇게 해줘야 늙은 것이 맘을 놓고 눈을 감겠다고..."

노인은 이윽고 그를 끌고 조상들의 무덤 맨 발치계로 내려가더니 거기 양지바른 잔디밭 한구

석에 자리를 잡고 차분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벌써부터 당신의 터를 자주 찾아와 익혀둔 듯 

아늑한 표정이 되며 말을 이어갔다.

"남의 땅에 뼈를 묻고 누워 자리가 어디 편할까 보냐마는 그래도 그 영감이 마음이 넓어 내 집터

한 자린 눈감아 떼어 넘겨주겠다는구나."

선산만은 어떻게든지 다시 찾아내겠노라, 노인에게 어떻게든지 남의 땅 아닌 당신 선산에 뼈를

묻게 해드리겠노라-- 노인을 위해 다시 한번 그는 그런 다짐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물론 그런 다짐에 새삼스런 기대를 지녀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노인은 그에게 희망을 지니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에 대한 노인의 말없는 기대를

알고 있었다. 노인을 혼자 두고 떠나기가 뭣해 이제부터 그와 함께 서울로 가서 살재도 그를 

위해 그럴 수가 없다던 노인이었다.

"박복한 년의 팔자가 드세어 자식의 팔자를 모두 그르친 것 같다며, 하나 남은 아들에게 어찌

여생을 함께하고 싶은 소망이 없을까마는, 그렇게 되었다간 당신의 드센 팔자가 어떻게 또 남

은 아들의 운세를 꺾어놓을지 모른다는 핑계로 한사코 동행을 사양하고 만 것이다.

"너나 가서 잘 살거라. 오래가지도 않을 목숨 난 여기서 그럭저럭 기다리다 눈을 감으면 그만

아니냐."

남은 아들만은 잘 살게 되기를 바라왔고, 또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있는 노인이었다.그의 형이

한 사발의 술과 마지막 장어 약을 먹었을 때마저 그에게는 절대 소식을 알리지 말랬다던 노인이

었다. 가버린 사람은 가버린 사람, 남은 아들에게까지 쓸데없는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더너 노인

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노인에게 마음이라도 늘 편히 지니고 지내시라니까, 마음 편하게

안가질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치렁치렁 이삭을 출렁이며 지고 가는 볏단 등짐만 보면 가슴이

울렁울렁 힘대로 논밭일하던 시절일이 되살아오더라며 그이 눈치를 살피던 노인이었다.

당신 자신만 미리 조심을 해주면 자릴 것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아들인 셈이었다.

그리고 제 생각만 있으면 선산이나 논밭쯤 언제라도 다시 되물려낼 능력을 지닌 자랑스런 아들

이었다. 선산을 되찾아주겠다는 아들의 장담을 외면할 리 없는 노인이었다.

아들이 당장 약속을 실현해보이지 않았을지라도 언젠가는 결국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 분명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뭐래도 아들이 되찾아낸 선산 땅에 당신의 뼈를 묻고 싶은 것

이었다. 사실은 바로 그의 귀향길이 이토록 다시 늦어진 것도 그 점이 너무 분명했기 떄문이었다.

서울로 돌아오자 이번에도 그는 그 일부터 우선 매듭을 지으려 맘먹었다. 산을 되찾아내자면

무멋보다 그만한 돈을 꾸리는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은 늘 그만한 마련조차도 아직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이 

한 달 두 달이 되고 한 달 두 달이 다시 한 해 두 해가 되도록 사정이 전혀 달라지질 못했다.

그는 언제나 주변머리 없는 잡지사 기자였고, 1년에 한두 번쯤 일요판 신문 구석에 실린 몇 줄자리

 시행詩行 앞에 자신의 이름이 박혀나온 것으로 위안을 삼는 초라한 시인일 뿐이었다.돈 마련이 

미처 안 되었노라는 못난 변명을 노인에게 전해드릴 수도 없었다. 그런 소리는 아들에 대한 

노인의 미더움마저 저버릴 위험이 있었다. 노인에겐 그저 아들이 좀 분주해서, 신문에까지 가끔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이라, 바쁜 사람이 일에 바빠 틈을 낼 수 없어 그러거니 당신의 그 자랑스런 신뢰

감이라도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했다.

그는 노인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돈 마련만 끝나면 노인을 칙접 찾아가뵈리라. 1년 2년 시일이 

흐르다보니 변명만 자주 쉬워지고 그 쉬운 변명만 실없이 늘어갔다. 노인에 대한 죄스러움

도 세월따라 덜해갔다. 종내는 노인 쪽에서 먼저 그를 향한 기대가 스스로 허물러져 나가기를

은근히  바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노인의 소망을 끝내 외면해버릴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소식을 끊고 지낼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선산 일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는 천연스런 문안 편지를

노인에게 올려보았다. 노인에게선 이렇다 저렇다 소식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번엔 노인과

형수와 조카들이 몸을 의탁하고 지낼 만한 동네마다 글을 띄워보았으나 그도 번번이 허사였다.

어렸을 적 마을 친구 쪽에다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 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생각이 미쳐왔다. 노인의 노여움이 이만저만 깊어진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노인이 노여뭄을 더 이상 모른 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당신의

집터 일을 매듭지어드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해서 서둘러 내려 온 5년만의 고향이었다.

그러니까 이젠 노인의 연세가 여든도 몇 해 남기지 않고 계시던가...?

길가엔 어느새 서늘한 산 그늘이 내리고 있었지만 발길을 서두르는 바람에 이마에선 

찐득찐득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마치 이날 하루를 위해 일부러 그 5년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갈

수록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허둥대는 걸음걸이를 참나뭇골까지의 산길을 반 

너머 가량 꺾어들 무렵이었다.

 

 

그는 마침내 참나뭇골 동네 쬭에서 면소 쪽으로 길을 거슬러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다. 길을 거슬러 나오던 사람은 면소 쪽 상점 동네로 막물 참외를 팔러나가던 팽나무 아랫

집 윤 과부 아주머니였다.

"고향도 잊으셨소. 노모도 잊으셨소. 고향 동네 찾는 길이 어찌 그리 더디시오."

집을 팔아 없애고 나선 한 번도 참나뭇골 동네를 찾은 일이 없었던 터라, 윤 과부 아주머니는

제민을 알아보자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시골 아낙들 특유의 흉허물없는 수다부터 늘어 놓았다.

머리에 떠이고 있는 자신의 외광주리, 그리고 전에는 그리 말거래조차 많지 못하던 그렇고 그런

한동네 이웃간이었을 뿐이라는 것도 아랑곳을 안 했다.

하지만 제민은 그 윤 과부로부터 뜻밖에 고마운 소식 한 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식구들 말씀이요. 식구들은 이제 다 참나뭇골로 돌아와 살고 있지라우. 형수님이랑 

조카님들이랑 모두 참나뭇골로 돌아와서 말이오예."

흩어진 식구들에 관한 소식을 알려준 것이었다.노인의 행방을 묻는 말에도 윤 과부는 다시,

"노인도 이제 옛고향 동네로 돌아와 편히 쉬고 계시지라우."

노인도 이제 참나뭇골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윤 과부는 다시,

"하지만 노인 양반을 만나뵐라면 산으로 먼저 가봐얄 게라요. 노인네가 전부터 늘 찾아올라가

계시던 당신네 선산 쪽 말이오예."

친절하게도 노인이 가 있을 만한 곳까지 일러주었다. 윤 과부를 헤어져 보내고 난 제민은 

그래서 이번엔 다시 발길을 옛날 선산 쪽으로 휘어잡기 시작했다. 아직도 노인은 조상들의 무덤과

당신의 집터 근처만 맴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집터가 마음놓고 뼈를 묻고 당신의 

땅이 될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그 땅을 지키면서, 그를 기다려 온 모양이었다. 어슴푸레나마 이젠

이미 그에 대한 노인의 소망이 허물어졌기를 바랐던 그의 기대는 너무도 어리석었음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노인의 행방이 확인된 이상 이젠 산주인 영감보다 노인을 먼저 찾아가보아야 했다.

마을로 돌아와 함께 살고 있다는 형수나 조카들을 보는 것은 나중나중 문제였다.

선산길은 참나뭇골로 들어가는 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샛길을 꺾어들어 골짜기를 하나 건

넌 곳이었다. 

'어머니, 이젠 제가 왔으니 안심하십시오. 선산을 되찾으러 제가 왔습니다. 이번엔 제가 산을 되찾아놓고 가겠습니다.'

그는 새삼스레 다시 가슴이 뛰어오름을 느끼며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다.

'노인을 뵙고 나면 그 일부터 우선 안심을 시켜드려야 한다. 노인을 안심시켜놓은 다음 어떻게든지 

새 산주인 영감을 만나서 사정을 해보자.어차피 노인의 집터 한 자리를 눈을 감아주겠노란다던

 영감님이 아니던가. 간곡한 말로 설득을 하면 이해를 못할 사람은 아니리라....가엾은 제 노친네 

사정을 어르신네께서 좀 살펴주십시오. 어르신께서는 어차피 제 노친네 집터를 주신분이 아니십니까. 

노친네가 편히 눈을 감고 가실 수 있도록, 노친네가 당신  땅에다 맘놓고 당신의

뼈를 묻는다고 편안히 눈을 감고 가실 수 있도록. 그때까지만 다시 저희 땅이 된것으로 해 주십시오. 

그걸 구실로 산을다시 넘보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아무쪼록 그런 염려는 마시구요. 

전 사실 그럴 염치도 능력도 없는 놈입니다. 어르신께서 제 노친네를 위해 그때까지만 좀 눈을 감아

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산그늘이 짙게 깔려 내려오는 골짜기 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골짜기 건너 선산

 터가 눈 안에 멀리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산 그늘이 덮여 내려와 그런지

선산 터나 그 근방 일대에선 노인의 모습 같은 걸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발길을 재촉해나가며

노인이 언젠가 당신의 집터로 자리를 얻어놓았다던 그 선산 발치께의 풀밭 근처를 살펴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멀리서부터 노인의 모습이 가물가물 떠올라 보여야 할 산비탈께에는 머리

가 하얗게 세었을 당신의 형적 대신 웬 조그만 둔덕 같은 것이 새로 거뭇이 돋아 올라와 있었다. 

새삼스럽게 다시 가슴이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턱밑까지 치받쳐올랐다. 그는 그것을 확인해 

볼 틈도 없이 허둥지둥 정신없이 골짜기를 치달려 올라갔다.

'그럴 리가.......설마 하면 그럴 리가........'

급한 발걸음으로 그가 순식간에 골짜기를 달려올라 선산 발치깨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노인의 집터 자리에 거뭇하게 돋아올라온 둔덕 같은 것이 그의 첫 예감대로 누군가의 

육신과 혼령을 함께 잠재우고 있는 새 무덤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났을 때였다. 그것으로 

그만 그의 소망과 조심스런 계획들은 모든 것이 일시에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전에 없었던 새 무덤은---, 

당신의 소망대로 언젠가 노인이 새로 지어간 당신의 마지막 집터임은 물어볼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

'노인도 이젠 옛 고향 동네로 돌아와 편히 쉬고 계시지라우. 하지만 노인 양반을 만나뵐라면

산으로 먼저 가봐얄게라요.'

어쩐지 무얼 숨기는 사람처럼 과장 섞인 몸짓으로 수다를 늘어놓던 윤 과부 아주머니의 

말소리가 새삼 귀청을 울려왔다. 그리고 그 노인의 소식을 전하고 나서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길을 비켜가면서도 혼자서 끌끌 혀를 차대며 한번 더 근심스런 뒷눈길을 보내오던 그녀의

거동들이 불현듯 다시 눈앞에 떠 올랐다.

'그래서 그녀가 눈물을 보였던 것을. 그래서 노인에게선 그토록 소식이 없었던 것을.'

형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도 그에겐 소식을 못 알리게 했다는 노인이었다. 잘나고 잘난 서울의

아들에게 당신의 일을 알리게 했을리가 없는 노인이었다. 노인을 만나려면 선산으로 가라던 윤 

과부 아주머니의 말을 그토록 헛듣고 있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불시에 전신의 힘이 다 빠져 나간 긋 머릿속이 아득해왔다.

'하지만, 아아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인가. 나는 이제 노인을 위해 산주인을 만날 일조차 없어지고 만 것인가. 

그나마도 노인은 지레 나를 기다릴 수가 없었더란 말인가.'

그는 그 말없는 노인의 집터 앞에 자꾸만 힘없이 허물어져 내리려는 사지를 버티고 서서 언제까지나 

그 뜻없는 원망만 되씹고 있었다.

조로롱 조롱......어디선가 저녁 산새 울음 소리가 그늘진 나뭇가지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노인의 손길이 그친 선산 터 한 구석에 무성히 자란 엉겅퀴 한 포기가 자줏빛 꽃망울을 탐스럽게 빼어물고 있었다. 

하지만 새소리도 꽃망울도 이제 그에게는 모두가 부질없고 허무할 뿐이었다. 

꽃이 핀들 아는가.새가 운들 아는가...............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이제 그 귓가에 생생하던 노인의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부질없고 허무한 것이 새소리나 꽃빛뿐이랴. 노인은 이제 당신의 그 잘난 아들이 당신의

곁에 당신을 속이려 왔다. 눈물 짓고 서 있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 <새가 운들>을 쓴 이듬해 아내와 함께 시골집 어머니를 찾아가 그 새벽길의 뒷이야기를 듣고 <

눈길>을 다시 썼으니,<새가 운들>은 곧 <눈길>의 밑작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