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인생/Philosophy·LOGICS

KANT - DAUM.NET

hanngill 2008. 3. 16. 11:16
개요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이마누엘 칸트는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합리론과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했다.
그는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인식론·윤리학·미학에 걸친 종합적·체계적인 작업은 뒤에 생겨난 철학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생애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1946년부터 소련에 속하게 되었음)에서 태어나, 전생애를 거기에서 보냈다. 칸트는 마구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이민온 사람의 자손이라고 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 어머니는 독일인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인품과 지성으로 유명했다.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다. 이 교파는 검소한 내적 삶도덕법에 대한 복종을 가르쳤다. 이 교파 목회자의 영향으로 칸트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8세 때 담임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들어갔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이 학교에서 8년 6개월 동안 배웠는데, 일생에 걸쳐 라틴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신학과정을 이수하면서 때때로 설교도 했지만, 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수학물리학이었다.
합리론 철학을 체계화시킨 크리스티안 볼프를 연구했으며, 동시에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열렬히 신봉했던 어떤 젊은 교수의 도움으로 뉴턴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1744년에는 최초의 책을 썼는데, 주제는 운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지만, 1746년 아버지가 죽고, 대학부속학교에서 조교직을 얻는 데 실패하자 그는 가정교사직을 구해서 9년 동안 일했다. 1755년에 친구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무급(無給) 대학강사가 되었다.
15년 동안의 강사 시기는 칸트가 강사와 저술가로서 점점 큰 명성을 얻게 되는 시절이다. 첫 강의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고, 과학 발전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관심의 수준이 아마추어 이상이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인종, 바람의 본질, 지진의 원인, 천체에 대한 일반이론 등을 다룬 과학저작들을 다수 발간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된 강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논리학·형이상학·도덕철학 등 철학의 주요분야 및 자연지리학에 이르기까지 강의 주제가 넓어졌다.
글을 쓰는 스타일과 달리 강의는 유머와 박진감이 넘쳤으며, 영국·프랑스의 문학은 물론, 여행기와 지리학, 과학과 철학 등 광범위한 독서에서 얻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실감 있고 생기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2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로 데리고 가려 한 다른 대학의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를린대학교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까지 시학 교수로 초빙했으나 이것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다.
이 시기에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과학적 내용과 철학적 함축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했다. 칸트는 뉴턴의 사유방법과 당시 볼프와 알렉산더 코틀리프 바움가르텐에 의해 체계화되고 대중화되어 독일대학에 널리 퍼져 있던 코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뉴턴을 지지하고 라이프니츠를 비판했지만, 1750년대에는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전제들에 관해 노골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760년대에 들어서는 라이프니츠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어떤 제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바움가르텐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뉴턴의 추종자로 선언했고, 장 자크 루소의 도덕철학에 큰 찬사를 표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철학은 수학을 모델로 하여 자명한 전제들에 근거해서 증명된 진리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라이프니츠주의 철학의 방법적 주장을 공격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주의자의 핵심적인 이론들을 비판했다. 모순과 인과에 대한 논리주의적 입장, 존재론적 신의 증명, 공간개념 등이 주요한 비판의 쟁점이었다. 마침내 1770년 칸트는 15년간의 무급 대학강사 생활을 마감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서 논리학·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죽기 몇 년 전까지 그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놀랄 만큼 독창적인 저작들을 연달아 발표한다. 이미 비판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던 1770년의 교수취임논문 이후 11년 동안 아무 글도 발표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한 끝에 1781년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비판철학 시기가 시작된다.

 

 

 

 
비판철학 시기
 
1781년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이후 9년 동안 위대하고 독창적인 저술들이 계속 나옴으로써 단기간 동안 철학 사상에서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철학의 나아갈 방향이 정립된다. 〈순수이성비판〉은 칸트가 10년 동안 생각하고 명상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여러 번 연기하면서 주저한 끝에 초판을 발간했다. 자기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해명을 제대로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은 적중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해석자들의 비판이 많은 오해를 범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바로 잡기 위해 〈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입문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1783)을 썼고, 1789년에는 초판을 개정하여 재판을 발간했다. 이 두 판의 장단점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관념론적인 해석을 선호하는 독자들은 보통 초판을 더 좋아하고, 반면에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재판을 선호한다. 그러나 읽고 이해하기 어렵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책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고도의 전문적 기법과 엄밀성을 추구하던 볼프나 바움가르텐의 저작을 철학 저술의 모범으로 삼고 썼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에 대한 저술이다. 칸트는 여기서 자기 이전의 형이상학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기초를 닦고자 했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이었다.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은 신, 인간의 자유, 영혼불멸 등 본성상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인간 정신이 순수사유를 통해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간 정신은 결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은 다 속임수라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진정한 학으로서 형이상학이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학의 원리들이 한편으로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이것은 모든 학적 인식의 조건임)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포함해 탐구자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즉 그 의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 이상을 알 수 있게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인식이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연적인 경험들로부터 분리되어 선험적일 때에만 필연적일 수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주어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술어가 포함하고 있으면서 종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는 명제는 종합적이지 않고 분석적이다. 왜냐하면 연장개념이 물체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라는 명제는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무게는 물체 개념에 덧붙여서 물체들이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문제를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즉 어떤 조건 아래에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정식화했고, 이 문제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가 된다(→ 선험적 관념론 , 선험적 지식).
칸트에 따르면 이 문제는 수학·물리학·형이상학의 세 영역에서 제기된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의 1부 '초월적 원리론'의 세 부분이 각각 한 영역씩 다룬다. '초월적 감성론'에서 칸트는 수학이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것을 논증했고, 또 시간과 공간은 둘 다 인간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감관을 통해 포착되는 것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초월적 분석론'에서는 물리학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데 그 이유는 물리학이 경험을 질서지울 때 특별한 종류의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칸트가 '범주'라고 불렀던 이 개념들은 경험을 통해 생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험을 해석하는 전제가 되기 때문에 선험적이며, 경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범주는 그 기원 면에서만 경험적 개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식에서의 역할이 전혀 다르다. 경험적 개념은 특정한 경험들을 서로 관련지어서 구체적으로 질서지워진 경험을 산출하는 반면, 범주는 이 구체적인 질서지움이 따라야 할 일반 형식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범주는 인식의 틀에 해당한다. 그러나 비록 범주가 객관적 인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범주가 줄 수 있는 인식은 단지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이다. 범주는 감각을 통해 시공 중에 주어지는 것을 질서지울 때만 타당하고 실질적인 인식을 줄 수 있다. '초월적 변증론'에서는 형이상학의 선험적 종합판단들을 검토한다. 칸트에 따르면 여기서는 상황이 수학이나 물리학과는 반대이다. 형이상학은 감각경험을 초월하여 절대적 무제약자를 추구하기 때문에 감각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해버린다. 이때문에 진정한 선험적 종합판단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칸트는 형이상학이 영혼·세계·신과 같은 무제약자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여, 형이상학의 시도가 이율배반에 빠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밝히려 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성취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근대 천문학을 기초한 코페르니쿠스가 겉으로 보기에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사실은 관찰자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마음의 선험적인 원리가 대상에 적용됨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에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은 결코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형이상학을 '확실한 학의 길 위에' 올려놓으려 했고 이것이 비판철학의 진정한 의도였다. 이런 의도 때문에 칸트는 앞서 발간한 〈도덕형이상학기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를 체계적으로 확대하여 1788년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발간함으로써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하려 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확립한 원리를 구체적인 차원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1797년에 발간된 사회철학저술인 〈도덕형이상학 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는 덕의 문제를 검토하고 법과 정치의 기초를 제시한다.
 
비판철학을 마감하는 제3비판서인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에서는 크게 2가지 문제를 다룬다. 첫째, 미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최초의 체계적인 미학을 제시하고 있으며, 둘째, 자연에서 목적론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말년
 
비판철학은 곧 독일어를 쓰는 모든 중요한 대학에서 강의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철학의 성지가 된 쾨니히스베르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신탁을 구하듯이 칸트에게서 온갖 종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했다. 이런 존경을 받으면서도 칸트는 자신의 규칙적인 습관을 어긴 적이 없으며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 5피트가 채 되지 않는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칸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평생 엄격한 식생활을 했다. 칸트 때문에 '철학자의 산책로'라 이름붙여진 거리를 규칙적으로 산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산책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그는 노령으로 산책이 힘들어질 때까지 루소의 〈에밀 Émile〉을 읽는 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제외하고는 1번도 규칙적 산책을 어긴 적이 없었다.

 


〈판단력비판〉이 출판됨으로써 칸트의 중요한 철학 저작은 완성된 셈이다. 1790년부터 그는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는 많은 저술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루 2~3시간 이상 저술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그가 완성한 저작들은 한편으로는 전에는 자세히 다룬 적이 없는 주제들을 정교하게 다루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과 명확한 오해들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1793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를 출간하면서 칸트는 프로이센 당국과 종교의 믿음을 표현할 권리에 대한 논쟁에 휘말려들었다. 이 책에서 종교에 접근해가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정통종교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칸트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많은 근본 교리를 왜곡한 책임을 지고,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나 저술활동을 금지당했다. 칸트는 일단 수긍했지만 이 금지를 왕에 대한 개인적 약속으로 여겼고, 1797년 왕이 죽자 스스로 이 금지에서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1798년에는 그의 마지막 주요저서인 〈학부들의 논쟁 Der Streit der Fakultäten〉에서 금지된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쓴 방대한 유고는 베를린판 전집의 마지막 2권에 모아져 있는데, 내용은 주로 비판철학을 더욱 발전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유고들은 미완성 저작이라기보다는 어떤 저작을 준비하기 위한 단편적인 메모들이다. 그가 쓰려 한 책의 제목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로부터 물리학으로의 이행 Übergang von den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zur Physik〉이었다. 이 책은 〈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1786)에서 제시한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자연과학의 일반적 체제만이 아니라 상당히 자세한 부분까지도 선험적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유고들로 판단해볼 때, 비록 유고의 양이 많기는 하지만, 그 유고가 완성되었더라도 비판철학의 체계와 명성에 중요한 내용이 덧붙여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점점 쇠약해지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1804년 2월 12일 칸트는 쾨니히스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제2비판의 결론에서 선언한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다. "더욱더 자주, 그리고 더욱더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내 위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속의 도덕법칙은 더욱더 새롭고 큰 존경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준다."
O. A. Bird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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