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인생/Philosophy·LOGICS

칸트 『실천이성비판』

hanngill 2008. 3. 17. 05:38
칸트 『실천이성비판』
 박  정  하
 
 
목차
 
제1부 『실천 이성 비판』 저자의 생애와 전체 개관
1. 칸트의 생애
2. 책의 개관
 
제2부 개념 체계도
1. 원전의 목차
2. 개념 체계도
3. 연관 관계도
 
제3부 주요 개념 분석
<1> 실천 이성
1.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
2. 실천 이성의 우위
3. 실천 이성 비판
<2> 도덕 법칙
1. 도덕 법칙과 이성
2. 도덕 법칙의 위상
3. 도덕 법칙과 준칙
4. 이론 철학에서의 법칙 개념
(1) 규칙과 법칙
(2) 자연 법칙의 두 종류
(3)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
5. 질료와 형식
6. 도덕 법칙과 행복
(1) 자기 행복의 원리
(2) 자기 행복의 원리와 도덕 법칙(윤리성의 원리)의 차이
(3) 칸트 처벌론 ― 응보주의
(4) 도덕 감각(정)에 대한 비판
7.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과 이성의 사실
<3> 자유
1. 칸트 철학에서 자유 개념의 위상
2. 초월적 자유
3. 실천적 자유
4. 자유와 필연의 양립가능성
(1) 문제 상황
(2) 흄의 양립 가능론
(3) 칸트의 양립 가능론
5. 자유 개념의 확장: 역사 철학
<4> 최고선.
1.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2. 덕과 행복의 결합
(1) 분석적 결합에 대한 검토 ―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주의에 대한 비판
(2) 종합적 결합 ―실천이성의 이율배반과 그 지양
3. 최고선 개념의 사회 역사 철학에의 확장
<5> 실천 이성의 요청.
1. 요청이란 무엇인가?
(1) 최고선의 필연적 전제
(2) 실천적 의도에서의 순수 이성의 확장
2. 최상선, 즉 덕의 필연적 전제로서의 영혼의 불멸성
3. 최고선의 필연적 전제로서의 신의 현존
4.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
 
참고문헌
 
제1부 『실천 이성 비판』 저자의 생애와 전체 개관
 
1. 칸트의 생애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궁핍한 마구 직공의 아들로서 태어나 평생을 거기에서만 살았다. 아버지는 마구 상인이었다. 어머니는 독일 여자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인품과 타고난 지성 때문에 유명했다.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여서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8살 때 칸트는 어떤 현명하고 마음씨 좋은 목사의 눈에 띄어 그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이 학교에서 8년 반 동안 배웠는데 일생에 걸쳐 라틴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의 학교 교육 탓이다.
16세 때인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신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때때로 설교까지 했지만 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수학과 물리학이었다. 합리론 철학은 체계화한 볼프 철학을 배웠으며 동시에 어떤 젊은 교수의 도움으로 뉴턴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동안 그는 가정교사를 해야 할 만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생활동이나 즐거운 오락거리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은 당구를 치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열심히 쳤고 재주도 있어서 돈을 따는 경우도 많았다. 졸업 후,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지만 1746년 부친이 별세하자 우선 먹고살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는 가정교사 일을 구해 9년 동안 이 일을 했다.
1755년 친구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대학의 사강사 생활을 시작한다. 15년 동안의 사강사 기간은 강사와 저술가로서 점점 큰 명성을 얻는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과학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관심의 수준이 아마추어 이상이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몇 해 동안 과학의 여러 분야와 관련된 글을 여럿 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강의도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하여 논리학, 형이상학, 도덕철학 같은 철학의 주요 분야는 물론이고 자연지리학에 이르기까지 주제의 범위가 넓었다. 강의 내용은 유머가 넘치고 박진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문학은 물론이고 여행기와 지리학, 과학과 철학 등 광범위한 독서에서 얻은 풍부한 실례를 들었기 때문에 실감 있고 생기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직을 얻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로 오라던 다른 대학들의 제안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를린 대학은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특권을 주면서까지 시학 교수로 초빙했으나 이것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 가기를 더 원했다. 마침내 1770년 칸트는 15년간의 사강사 생활을 마감하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철학 교수로 임명된다. 정교수가 되자 그는 11년 동안 거의 글을 발표하지 않으면서 연구에 전념한 끝에 1781년 『순수 이성 비판』을 발간하고, 그 뒤 9년 동안 위대하고 독창적인 저술들을 계속 내놓음으로써 짧은 기간에 철학의 혁명적인 방향 전환을 이루어 낸다.
『순수 이성 비판』은 10년 동안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여러 번 연기를 하면서 망설인 끝에 초판을 발간했다. 자기 이론이 참임을 확신하긴 했지만 설명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걱정을 맞아떨어졌고 그는 독자들의 비판이 많은 경우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불만스러워했다. 자신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바로잡기 위해 『순수 이성 비판』의 핵심을 요약한 『형이상학 서론 (프롤레고메나)』(1783)을 썼고, 1789년에는 『순수 이성 비판』 초판을 개정하여 재판을 발간했다. 『순수 이성 비판』의 진정한 의도를 철학을 올바르고 확실한 길에 올려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뜻을 마저 이루기 위해 1785년 『윤리 형이상학 정초』, 1788년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확립한 원리를 사회에 적용하여 1797년의 『윤리 형이상학』에서는 법과 정치와 같은 사회 철학적인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1790년에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미의 문제와 자연의 목적론을 다루면서 비판 철학의 체계를 완결시킨다.
이렇게 체계를 잡은 칸트의 비판 철학은 곧 독일 말을 쓰는 모든 중요한 대학에서 강의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쾨니히스베르크를 새로운 철학의 성지로 여기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칸트에게서 온갖 문제의 답을 얻으려고 했다. 이런 존경을 받으면서도 칸트는 자신의 규칙적인 습관을 어긴 적이 없는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 160cm도 채 되지 않는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칸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평생 엄격한 식생활을 통해 건강을 유지했다. 오늘날 '철학자의 산책로'라 불리는 거리를 규칙적으로 산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산책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노령으로 산책이 힘들어질 때까지, 루소의 『에밀』을 읽는 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빼고는 한 번도 규칙적인 산책을 거른 적이 없다는 이 일화는 칸트가 엄격하게 자기를 관리한 프로철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칸트는 두 번이나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 1787년에는 자기 집을 소유할 만큼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얻었다. 그러나 이미 결혼하기 힘든 나이고 들어서다 보니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793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를 출간하면서 칸트는 프로이센 당국과 종교의 믿음을 표현할 권리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려 들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태도로 종교에 접근한 것이 정통 종교에서 문제가 되어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나 저술 활동을 한동안 금지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72세에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에 변함이 없었다. 만년에 시력과 기억력을 잃어 쓸쓸한 날을 보내다 80세에 서거하였다. 임종시 그는 "좋군(Es ist gut)"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의 묘비에는 『실천 이성 비판』의 결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칸트의 비판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비판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근대철학의 논쟁과 대립을 종합함으로서 근대 자연과학의 기반의 철학적 기초를 밝히는 등 유럽 사상계는 칸트의 출현에 의해 일대 혁명기를 맞아 피히테, 쉘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을 낳았고 이 후 신칸트학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도록 철학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책의 개관
윤리학의 역사에서 보면 칸트는 도덕, 혹은 윤리성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실천 철학을 변혁시킨 이론가로 종종 평가된다. 윤리성의 원천을 자연이나 공동체의 질서, 행복에의 희구, 신의 의지 혹은 도덕적 감정 등에서 찾던 것이 칸트 이전의 전통적 시도들이라면,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이러한 방식으로는 윤리성의 객관적 타당성이 주장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론의 영역에서처럼 실천의 영역에서도 객관성은 주체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모더니티 철학의 핵심 명제인 '주체의 확립'을 철학적으로 논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계몽주의의 완성자로서의 칸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도덕의 원천은 자율(Autonomie), 즉 의지의 자기 입법성에 있다. 자율은 자유(Freihei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근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는 핵심 개념인 자유는 칸트에 의해서 철학적 토대를 얻으며 그 점에서 『실천 이성 비판』은 바로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으로 평가된다.
칸트는 저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이는 물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선험적인 구성 작용에 의해 대상 세계가 인간사유의 보편적인 형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이다. 칸트는 실천적으로도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위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세계는 보편적인 인과율에 따르는 순수하게 기계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 속에서 도덕적 의도 및 목적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이성적 체계를 발견한다. 이런 내적인 체계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게 되며 또한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킨다. 자연은 기계론적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서는 목적론적인 의미가 없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실천만이 목적을 부여한다.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지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부여하는 목적이 자연 속에서 실현되기를 요구하고 세계가 그 목적에 따라 변혁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이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도덕적, 또는 목적론적 이성이 바로 의지의 원리이다. 세계의 목적은 세계 자체를 넘어서 있는 무엇이며, 성취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은 실천이성으로서 작용하는 인간의 의지이다. 『실천 이성 비판』은 바로 이 도덕적 의지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수행한다.
『실천 이성 비판』에서의 칸트에게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천의 주체인 인간이 주관적으로 세운 준칙이 어떤 경우에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론 철학에서 범주와 같은 주관의 순수 지성 개념이 왜 한갓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 실재성,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달리 말해 한갓 주관적인 규칙이 어떻게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통틀어 중요한 문제이며, 그 점에서 칸트는 관념론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천 영역에서 이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크게 보면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 단계는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에 기반하여 도덕 법칙에 의해서만 의지를 규정할 수 있음을 확인하여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확립하는 작업이다. 둘째 단계는 첫째 단계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덕적 의지의 전체적 대상을 규정하는 작업, 즉 도덕행위(=실천)의 결과로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칸트가 둘째 단계에서 제시하는 실천이성의 전체적·무제약적 대상은 바로 최고선(das höchste Gut)이다. 그리고 이 최고선을 확보할 필수적 전제로서 영혼의 불멸성, 신의 현존 같은 요청들을 끄집어냄으로써 이성 신앙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실천 이성 비판』의 작업은 결국 칸트 철학 체계 전체에서 보자면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인 '두 세계론' 중 당위의 세계, 도덕의 세계의 전모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칸트 철학의 두 세계론은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를 엄격히 나누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 즉 '이미 있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으로서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당위의 세계, 즉 '아직 없지만 있어야 할 것'은 우리 행위의 대상으로서 도덕의 세계에 속한다. 안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아는 것이지 아직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은 이미 있는 것의 세계, 즉 현상계로 제한된다. 이미 있는 세계, 즉 자연은 결정론적인 인과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가능하며, 과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중에는 과학의 영역, 사실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또 하나의 풍부하고 오히려 더 중요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의 영역, 도덕의 영역, 가치의 영역이다. 칸트가 오히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이 영역이다. 유명한 『순수 이성 비판』이란 저작에서 칸트가 한 작업은 좁게 보자면 현상 세계로서의 자연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성립 가능함을 밝힌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뉴튼의 자연 과학이 참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넓게 보자면 사실은 과학이 의미 있게 성립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밝혀서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과학의 틀 속에 들어올 수는 없지만 사실은 인간에게서 더 중요한 문제들을 올바로 다룰 수 있는 올바른 철학이 필요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올바른 철학, 즉 '진정한 형이상학'의 중요한 내용이 『실천 이성 비판』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실천 이성 비판』은 칸트의 철학적 탐구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연 철학적인 관심이 강했던 이전의 탐구 작업들은 1781년 『순수 이성 비판』으로 일단락 된다. 그러다가 1784년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1786년까지 한편으로는 역사 철학적인 단편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1785년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거쳐서 1788년 『실천 이성 비판』이 완성된다. 그리고 1790년 『판단력 비판』이 출간된다. 이런 저술의 흐름은 칸트 자신이 이미 세워 놓았던 계획과 물론 관련이 있겠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과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1781년까지 이론 철학을 일단 완료한 칸트는 이후로 프랑스 혁명 전야인 17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자유와 목적론의 문제를 다룬다. 도덕 철학을 통해 당위의 영역을 원리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엄밀한 학문적 탐구는 아니지만 역사의 영역에서 당위로서 설정될 역사의 방향을 목적론적으로 제시하는 1780년대의 칸트의 주된 작업은 프랑스 혁명과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인과 개념이 1781년까지의 칸트의 이론 철학적 작업의 초점이 되는 문제라면, 자유와 목적론의 문제는 1780년대 이후 칸트의 실천 철학에서 초점이 되는 문제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인 1790년 이후의 저작들이 주로 정치 철학과 종교 철학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이러한 관점에 의할 때, 『실천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다루는 자유와 도덕 법칙의 문제는 이론 철학 후 진행될 실천 철학의 원리적 토대를 닦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을 엄격히 나누고 둘이 서로 관계 맺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 칸트의 입장에 대한 가장 유명한 비판자는 바로 헤겔이다. 헤겔은 존재와 당위가, 즉 지금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칸트를 비판했다. 현실은 항상 변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은 동시에 있어야 될 것이었으며, 지금 있어야 될 것은 동시에 있게 될 것이라고 보아 이른바 두 세계에 대한 변증법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는 유명한 헤겔 명제의 의미 심장함 속에는 존재와 당위의 구분을 거부하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과정에도 불구하고 칸트와 헤겔은 양립하는 경쟁 가능한 두 모델로 정착되어 있으며 『실천 이성 비판』은 칸트 모델의 핵심을 논쟁적으로 보여주는 저작인 셈이다.
『실천 이성 비판』에서 보여주는 칸트 윤리학은 실제로 철학사에서 하나의 모델로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신칸트학파를 통해 심지어 사회주의 내부의 논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마르부르크 학파의 헤르만 코헨을 대표로 하는 이른바 '윤리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여, 칸트야말로 사회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항상 목적으로 대우하고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이야말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의 핵심적인 본질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역사 과학이 참이라서 사회주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사실이 사회주의가 바람직하고 선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지해야 된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는 점을 최초로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가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곧, 사회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유물론 외에 다른 근거가 필요한데, 칸트 철학이 바로 그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역사적 유물론 없이 칸트 윤리학에만 근거해서도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칼 포랜더로 대표되는 독일의 신칸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칸트의 도덕 철학이 과학적 사회주의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사회 변혁 의식을 고취하려고 한다면,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될 목표로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목적론적인 관점을 배격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목적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칸트주의를 보완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 이성 비판』에서 제시되는 칸트의 윤리학은 오늘날에도 단순히 역사적 가치를 갖는데 그치지 않고 주류 윤리학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칸트는 도덕적 규범의 정당화에 관한 중요한 대화 상대자로 대접받는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상대자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칸트 윤리학은 현대의 규범 윤리학이 갖추고자 하는 최소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칸트 역시 윤리학에서 상대주의, 회의주의,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행위는 개인적 감정이나 자의적 결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또한 사회적 문화와 유산, 생활양식, 혹은 관습의 문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칸트는 도덕의 원리를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윤리 문제에 접근해 가고자 한다. 그리고 윤리학의 영역에서 현대의 논의를 지배하는 공리주의 이론에 대해 자율과 정언 명법을 내세우면서 도덕 원리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따라서 『실천 이성 비판』은 철학사에서 역사적인 가치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론적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대면해야 할 살아있는 저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제2부 개념 체계도
 
1. 원전의 목차
머리말
 
서설: 실천 이성 비판의 이념
 
제1편  순수 실천 이성의 요소론
   제1권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학
       제1장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들
           §1. 설명
               주해
           §2. 정리 Ⅰ
           §3. 정리 Ⅱ
               계(系)
               주해 Ⅰ
               주해 Ⅱ
           §4. 정리 Ⅲ
               주해
           §5. 과제 Ⅰ
           §6. 과제 Ⅱ
               주해
           §7.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
               주해
               계(系)
               주해
           §8. 정리 Ⅳ
               주해 Ⅰ
               주해 Ⅱ
         Ⅰ. 순수 실천 이성 원칙들의 연역
         Ⅱ. 사변적 사용에서는 그 자체로 가능하지 않은 순수 이성의 확장을 위한 실천적 사용에서의 순수 이성의 권한
 
       제2장 [실천 이성의 분석학]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 개념
           선 및 악의 개념과 관련한 자유의 범주들 표
           순수한 실천적 판단력의 범형[範型]
       제3장 순수 실천 이성의 동기들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학에 대한 비판적 조명
 
   제2권  순수 실천 이성의 변증학
       제1장  순수 실천 이성 일반의 변증학
       제2장  최고선의 개념 규정에서 순수 이성의 변증학
           Ⅰ. 실천 이성의 이율배반
           Ⅱ. 실천 이성의 이율배반의 비판적 지양
           Ⅲ. 사변 이성과의 결합에서 순수 실천 이성의 우위
           Ⅳ.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 영혼의 불멸성
           Ⅴ.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 신의 현존
           Ⅵ.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들 일반
           Ⅶ. 그 인식을 동시에 사변적으로 확장함이 없이 실천적 의도에서 순수 이성 의 확장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Ⅷ. 순수 이성의 요구[필요]에 의한 동의
           Ⅸ. 인간의 실천적 사명에 현명하게 부합하는 인간 인식능력들의 조화
 
제2편 순수 실천 이성의 방법론
 
맺음말
 
2. 개념 체계도
실천 이성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의 비교
  >>하나의 이성
     >>>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의 동일성
     >>> 이성 사용
           >>>>이성의 사변적 사용
           >>>>이성의 실천적 사용
           >>>>이성의 사변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의 비교
     >>> 순수 이성에 대한 탐구의 두 과제
           >>>>첫째 과제
                 >>>>>순수 사변 이성 비판
           >>>>둘째 과제
                 >>>>>실천 이성 비판
>실천 이성의 우위
  >>우위의 의미
  >>사변이성이 우위를 갖는 경우
  >>실천이성이 우위를 갖는 경우
     >>>실천적 의도에서의 이론 이성의 확장
>실천 이성 비판
  >>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닌 이유
  >> 사변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차이
      >>>과제의 차이
           >>>><순수 이성 비판>의 과제
           >>>><실천 이성 비판>의 과제
      >>>탐구 순서의 차이
           >>>>순수 이론 이성의 분석학
           >>>>실천 이성의 분석학
 
도덕 법칙
>순수 실천 이성과 도덕법칙
  >>도덕법칙의 원천
  >>자율
     >>>법칙수립적[입법적]
  >>인간의 양면성
     >>>두 세계론
     >>>칸트 저작에서 인간에 대한 양면적 파악
          >>>>현상으로서의 인간
          >>>>예지체로서의 인간
>도덕 법칙의 위상
  >>절대적 명령
     >>>신명령론
     >>>주지주의
>정언명령으로서 도덕법칙
  >>실천원칙
     >>>주관적 원칙
          >>>>준칙
                >>>>>행위의 주관적 원리
     >>>객관적 원칙
          >>>>실천 법칙
  >>명령
     >>>가언 명령
          >>>>훈계
     >>>정언 명령
          >>>>정언명령만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는 이유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
  >>규칙
     >>>경험적 규칙
     >>>선험적 규칙
          >>>>법칙
  >>규칙과 법칙의 구분
  >>법칙
     >>>자연법칙의 구분
          >>>>초월적 자연법칙
          >>>>경험적 자연법칙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의 비교
     >>>자연 법칙
          >>>>이성의 사변적 사용
          >>>>자유 법칙의 범형
     >>>도덕 법칙
          >>>>이성의 실천적 사용
          >>>>자유의 법칙
>질료와 형식
  >>질료
     >>>욕구능력의 객관
     >>>쾌 또는 불쾌
     >>>질료에 기반한 실천 원리
          >>>>질료적 실천원리들이 법칙이 될 수 없는 이유
  >>형식
      >>>법칙 수립적 형식
      >>>형식적 실천 원리
      >>>자유 의지
>도덕 법칙과 행복
  >>행복
  >>자기 행복의 원리
     >>>질료적 원리
     >>>주관적으로는 필연적인 원리
     >>>객관적으로는 우연적인 원리
  >>자기 행복의 원리가 도덕성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
     >>>상위 욕구 능력과 하위 욕구 능력의 구별
          >>>>대상의 유래에 따른 구별
                >>>>>감관이냐 지성이냐
                >>>>>이러한 구별의 오류
          >>>>질료와 형식을 통한 구별
                >>>>>정념적 욕구능력
                >>>>>순수 실천 이성
  >>자기 행복의 원리와 윤리성의 원리의 차이
     >>>법칙 제시 여부
     >>>인식에서의 차이
     >>>실천에서의 차이
     >>>형벌성 문제
          >>>>칸트의 처벌론
                >>>>>응보주의
                >>>>>공리주의
  >>도덕 감각(정)에 대한 비판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
  >>도덕 법칙들의 최고 원칙
  >>이성의 사실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
      >>>선과 도덕법칙의 관계
 
자유
>자유 개념의 위상
  >>순수이성체계의 마룻돌
  >>칸트 철학에서 중첩된 대립쌍
     >>> 자연과 자유의 대립
     >>> 기계론 자연과 목적론적 자연의 대립
     >>> 인과성·자유·목적론의 역사적 관계
><순수 이성 비판>에서의 자유 개념
  >> 문제성 있는 개념
  >> 우주론적 이념
>초월적 자유
  >> 자유의 소극적 개념
      >>>객관으로부터의 독립성
  >> 절대절 자발성
>실천적 자유
  >> 자유의 적극적 개념
      >>> 실천이성의 법칙 수립
      >>> 자율
  >> 자유와 도덕법칙의 관계
      >>> 자유의 실재성
      >>> 존재 근거
      >>> 인식 근거
  >> 인간의 인격성
      >>> 목적 그 자체
>자유와 필연의 양립가능성
  >> 문제 상황
  >> 자유론
  >> 결정론
      >>> 강한 결정론
  >> 양립가능론
      >>> 약한 결정론
  >> 자유의 종류
      >>> 행위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
          >>>> 행위의 자유
          >>>> 의지의 자유
      >>> 무차별성으로서의 자유와 자발성으로서의 자유
  >> 흄의 양립가능론
  >> 칸트의 양립가능론
> 자유 개념과 역사철학
   >> 정치적 진보
       >>> 계몽
       >>> 공표의 자유
            >>>> 공지성의 원리
   >> 도덕적 진보
       >>> 윤리적 자연상태
       >>> 윤리적 공동체
             >>>> 윤리적 공동체의 의미
             >>>> 윤리적 공동체와 정치적 공동체의 차이
 
최고선
>순수실천이성의 대상(객관)
  >> 규정근거
      >>> 도덕 법칙
>덕과 행복의 일치
  >> 덕
      >>> 최상선
  >> 전체적인 완벽한 선
> 덕과 행복의 결합 방식
  >> 분석적 결합
      >>> 동일율에 따른 결합
      >>>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 에피쿠로스
           >>>> 스토아
           >>>>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의 대비
      >>> 분석적 결합에 대한 비판
  >> 종합적 결합
      >>> 인과율에 따른 결합
      >>> 실천 이성의 이율 배반
            >>>> 행복이 덕의 원인인 경우
            >>>> 덕이 행복의 원인인 경우
      >>> 이율배반의 지양
         >>>> 예지체로서의 인간
> 사회역사철학에의 확장
  >> 역사의 목표로서의 최고선
      >>> 정치적 최고선
      >>> 도덕적 최고선
      >>> 영원한 평화
 
실천 이성의 요청
>요청
  >> 최고선의 필연적 전제
  >> 순수수학과 대조된 순수실천이성의 요청
      >>> 실천이성의 요구
  >> 실천적 의도에서의 순수 이성의 확장
      >>> 이론 이성의 확장
           >>>> 초험적, 규제적
      >>> 실천과 관련된 확장
           >>>> 내재적, 구성적
  >> 요청의 객관적 실재성
> 영혼의 불멸성의 요청
  >> 최상선, 즉 덕의 필연적 전제
      >>> 윤리성의 필연적 완성
           >>>> 무한한 전진을 통한 덕의 실현
      >>> 세속적 종교와 광신적 종교 비판
> 자유의 요청
> 신의 현존의 요청
  >>최고선의 필연적 전제
     >>> 행복과 윤리성의 관계
           >>>>최고의 근원적 선 요청
  >> 그리스 철학의 문제
      >>> 에피쿠로스
      >>> 스토아
  >> 기독교에 대한 평가
      >>> 신의 나라
      >>> 기독교와 스토아의 차이
  >>신의 현존에 대한 논증의 구조 분석
>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
  >> 도덕적 개념으로서의 신
  >> 행복에 대한 도덕의 관심
      >>> 행복의 획득 수단
      >>> 행복의 이성적 조건 (행복을 누릴 자격)
 
3. 연관 관계도
* 표기 형식  :  토픽1  ---  토픽 2     [연관관계]
자유 --- 도덕법칙  [존재 근거]
도덕법칙 --- 자유  [인식 근거]
자유 --- 인간의 인격성  [근거]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의 동일성 --- 하나의 이성  [근거]
실천적 의도에서의 이론 이성의 확장 --- 실천 이성의 우위 [판단 근거]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닌 이유 --- 사변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차이  [판단 근거]
최고선 --- 덕과 행복의 일치  [동일]
주관적 원칙 --- 준칙         [동일]
객관적 원칙 --- 실천 법칙    [동일]
선험적 규칙 --- 법칙         [동일]
이성의 사실 ---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    [동일]
역사의 목표로서의 최고선 --- 영원한 평화  [동일]
도덕법칙 --- 순수이성        [원천]
실천 이성 --- 도덕법칙       [원천]
자연 법칙 --- 이성의 사변적 사용   [원천]
도덕 법칙 --- 이성의 실천적 사용   [원천]
실천 이성의 요구  --- 요청         [원천]
이성의 사변적 사용 --- 순수 사변 이성 비판  [분석대상]
이성의 실천적 사용 --- 실천 이성 비판       [분석대상]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의 동일성 --- 이성의 실천적 사용 [분석결과]
자유 --- 이성의 사변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의 비교 [예시]  
사변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차이 --- 과제의 차이   [예시]
사변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차이 --- 탐구 순서의 차이 [예시]
실천 이성 --- 법칙수립적     [속성]
도덕 법칙 --- 절대적 명령    [속성]
도덕 법칙 --- 자기 행복의 원리     [반대]
자유론 --- 결정론                  [대립]
이성의 사변적 사용 --- 이성의 실천적 사용    [대비]
이성의 실천적 사용 --- 이성의 사변적 사용    [우위]
정언 명령 --- 도덕 법칙      [형식]  
자연 법칙 --- 도덕 법칙            [범형]
예지체로서의 인간 --- 이율배반의 지양  [토대]
실천적 의도에서의 순수 이성의 확장 --- 요청 [도출과정]
자연 법칙 --- 도덕 법칙      [범형]
최고선 --- 실천이성  [객관(대상)]
 
제3부 주요 개념 분석
 
<1> 실천 이성
1.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을 대비적으로 비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이성이 서로 분리된 다른 이성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순수 이성이 다른 의도와 관심에서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일 따름이다. 따라서 "만약 순수 이성이 독자적으로 실천적일 수 있고,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이 입증하듯이,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론적 의도에서건 실천적 의도에서건 선험적 원리들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오로지 동일한 이성일 뿐이다."(218)
결국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은 두 개의 이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성이 서로 다른 관심에서 다르게 사용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우선 하나의 이성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관심의 차이 때문이다. "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관심은 최고의 선험적 원리들까지에 이르는 객관의 인식에 있고, 실천적 사용의 관심은 궁극적인 완전한 목적과 관련하여 의지를 규정하는 데에 있다."(216)
그렇다면 이성의 이론적, 사변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차이가 있는가? 이론적 사용은 인식의 대상들에 관계하지만, 실천적 사용은 의지의 규정 근거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칸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성의 이론적 사용은 순전한 인식 능력의 대상들에 종사하였고, 이런 사용과 관련한 이성 비판은 본래 단지 순수한 인식 능력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 인식 능력은 후에 가서 입증된 바, 쉽사리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혹은 도달할 수 없는 대상들 사이에서 혹은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혐의를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사정이 이미 전혀 다르다. 실천적 사용에서 이성은 의지의 규정 근거들에 종사하는 바, 의지란 표상들에 대응하는 대상들을 산출하거나 이런 대상들을 낳도록([그 자신의] 자연적 능력이 충분하든 그렇지 못하든) 자기 자신을, 다시 말해 자기의 원인성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적어도 이성은 의지를 규정하기에는 충분하고, 의욕만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그것은 언제나 객관적 실재성을 갖기 때문이다."(29, 30)
 
실천 이성은 결국 실천적으로 사용된 이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고 『실천 이성 비판』의 작업은 결국 이러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순수 이성이 이렇게 두 방향으로 작동을 하다보니 각각의 작동 방식에 대한 탐구는 전혀 다른 작업이 될 수밖에 없고 두 작업은 전혀 다른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순수 이성이 한편으로는 객관들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의지의 규정 근거가, 다시 말해 (한낱 법칙으로서의 이성 자신의 준칙의 보편타당성이라는 사상에 의해) 객관들의 현실과 관련하여 이성적 존재자의 원인성의 규정 근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두 과제는 서로 아주 다른 것이다."(77)
그렇다면 두 과제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첫 번째 과제는 순수 사변 이성 비판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없으면 우리에겐 도무지 아무런 객관도 주어질 수가 없고, 그러므로 또한 아무런 것도 종합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직관들이 선험적으로 가능한가가 무엇보다도 먼저 설명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해답인즉, 직관들은 모두 오로지 감성적이며, 따라서 가능한 경험이 미치는 것보다 더 멀리 가는 어떠한 사변적 인식도 가능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저 순수 사변 이성의 모든 원칙들은, 주어진 대상들에 대한 경험이나 또는 무한히 주어질 수는 있겠으나 그러나 결코 완전히 주어질 수는 없는 그런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실천 이성 비판에 속하는 것으로서, 욕구 능력의 객관들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은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이론적 자연 인식의 과제로서 사변 이성 비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설명이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오로지, 어떻게 이성이 의지의 준칙을 규정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일이 단지 규정 근거로서의 경험적 표상에 의거해서만 생기는가, 또는 과연 순수 이성이 또한 실천적이고, 가능한, 전혀 경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자연 질서의 법칙이겠는가이다."(77, 78)
 
그런데 하나의 이성에 대하여 두 가지 관심에서 접근하다 보니 사변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 사이에는 겉보기에 갈등 요소가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변에서는 범주들의 초감성적 사용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고서도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들과 관련해서는 이 실재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이런 결과는 결국 이성에 대한 비판이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라는 비난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8). 그러나 이런 겉보기에 모순인 것들이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하여 이성의 두 가지 사용 방식의 차이가 명료하게 밝혀지면, 모순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실천적 사용의 완전한 분석을 통해, 여기서 말하는 실재성은 범주들의 이론적인 규정이나 인식을 초감성적인 것에까지 확장하는 데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념된 것뿐이라는 것을, 곧 범주들은 필연적인 의지 규정에 선험적으로 포함되어 있거나 의지 규정의 대상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므로, 단지 이런 관계에서 범주들에는 어디서나 하나의 객관이 귀속함을 뜻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게 되면, 저 일관성 없음은 소멸할 것이다. 우리는 저 개념들을 사변 이성이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니 말이다."(8-9)
 
결국 실천 이성에 대한 비판 작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변 이성과 실천이성이 동일한 이성의 다른 활동임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이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전에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던 매우 만족스러운, 사변적 비판의 일관성 있는 사유 방식의 확인이 시작된다. 곧, 사변적 비판은 경험의 대상들 그 자체와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의 주관을 단지 현상들로 보지만, 그럼에도 현상들의 근거에 사물들 그 자체를 두도록, 그래서 모든 초감성적인 것을 가공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것의 개념을 내용에 있어서 공허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가르쳤는데, 실천 이성은 이제 독자적으로, 다시 말해 사변 이성과 협의함이 없이, 인과성 범주의 초감성적 대상, 곧 자유에다 실재성을 부여한다(비록 이 자유가 오로지 실천적 사용을 위한 실천적 개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저 사변 이성에서는 한낱 생각될 수 있던 것이 [실천 이성에서는] 하나의 사실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동시에, 사고하는 주체[주관]조차도 내적 직관에서 그 자신에게는 한낱 현상일 뿐이라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기이한 사변적 비판의 주장 또한 실천 이성 비판에서 완전한 확인을 받는다. 그래서 전자가 이 명제를 결코 증명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런 확인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다."(9-10)
 
여기서 이미 칸트는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 혹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과 실천적 사용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좋은 예가 자유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감성적 직관에 기반해야 하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서는 오직 인과적 질서만이 확인될 수 있기 때문에 예지적 원인인 자유는 승인될 수 없고 이율 배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러나, 지성이 (이론적 인식에서) 대상들과 맺고 있는 관계 외에 지성은 또한 욕구 능력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욕구 능력은 의지라고 일컬어지며, 순수 지성이 ― 이런 경우에는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바 ― 순전한 법칙 표상에 의해 실천적인 한에서는, 순수 의지라고 일컬어진다. 순수 의지의 또는, 같은 말이지만, 순수 실천 이성의 객관적 실재성은 도덕 법칙 안에 선험적으로 마치 하나의 사실에 의해서인 양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불가피한 의지 규정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의지 규정은 경험적 원리들에 의존돼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의지라는 개념 안에는 그런데 원인성의 개념이 이미 함유되어 있고, 그러니까 순수 의지라는 개념 안에는 자유와 함께 하는 원인성 개념이 함유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원인성은 자연 법칙들에 따라 규정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경험적 직관을 끌어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원인성은 순수한 실천 법칙에서 선험적으로 그 객관적 실재성을, (쉽게 통찰되는 바처럼) 이성의 이론적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 완전하게 정당화한다. 무릇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자 개념은 叡智 原因이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이 자기 모순적인 아님은 이미, 원인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순수 지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대상들 일반과 관련하여 그것의 객관적 실재성 개념 또한 연역을 통해 확인된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이때 원인 개념은 그것의 근원상 일체의 감성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이며, 그러므로 스스로 현상들에 국한되지 않고, (이에 대한 이론적 규정적 사용이 이루어진다면), 물론 순수 예지 존재자로서 사물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용의 바탕에는 언제나 감성적으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인 직관이 놓여 있을 수 없으므로, 叡智 原因은 이성의 이론적 사용과 관련하여, 비록 가능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공허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렇기에, 한 존재자가 순수 의지를 갖는 한에서, 그 존재자의 성질을 이론적으로 알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 존재자를 그로써 단지 그러한 존재자라고 표시하고, 그러니까 단지 원인성 개념을 자유 개념과 (그리고 이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 자유의 규정 근거인 도덕 법칙과) 결합하는 일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원인 개념의 순수한, 비경험적인 근원으로 말미암아 물론 그러한 권한이 나에게 허여[許與]된다. 나는 그 개념을 그 개념의 실재성을 규정하는 도덕 법칙과 관련해서만 사용할, 다시 말해 실천적으로만 사용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96-98).
 
결국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 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사변적 이성과 어떻게 다르게 기능하는지도 밝혀지면서 동시에 두 사용이 결국 하나의 이성의 다른 사용임도 밝혀진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2. 실천 이성의 우위
이렇게 이성의 두 사용을 구별한 다음, 칸트는 이 두 사용, 즉 사변 이성과 실천 이성이 결합될 때는 실천 이성이 우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우선 이때 우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성에 의해 결합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것 사이에서 우위란 하나가 나머지 것들과의 결합에서 첫 번째 규정 근거가 되는 우선성을 뜻한다. 좀더 좁은, 실천적 의미에서 우위란 (다른 어떤 것의 뒤에 놓일 수 없는) 하나의 관심에 다른 것들의 관심이 종속하는 한에서, 그 하나의 관심의 우선성을 의미한다. 마음의 각 능력에는 각기 하나의 관심을, 다시 말해 그 아래에서만 그 능력의 실행이 촉진되는 조건을 함유하는 원리를 부여할 수 있다. 원리들의 능력으로서 이성은 마음 능력들의 관심을 규정하고, 그러나 그 자신의 관심은 스스로 규정한다."(215, 216)
 
그렇다면 두 이성 사이의 우열을 따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세 가지이다. 사변 이성이 실천 이성보다 우위에 있거나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우위가 아니고 동등하거나 중 하나가 답일 것이다. 칸트는 세 번째 경우는 검토하지 않고 앞의 두 경우를 대비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만일 사변 이성이 실천 이성보다 우위를 갖는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인가? "만약 실천 이성이 사변 이성이 독자적으로 그 자신의 통찰로부터 그에게 건네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그것만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변 이성이 우위를 갖는 것이다."(216) 달리 말해 "사변 이성이 그 자신의 별개의 관심을 고수하고, 에피쿠로스의 규준학[規準學]에 따라 그 객관적 실재성이 명백한, 경험에서 제시될 수 있는 실례에 의해서 확인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비록 그것들이 실천적인 (순수) 사용의 관심과 아주 잘 짜여 있고, 그 자체로는 이론적 이성과 아무런 모순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변 이성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폐기하고, 사변 이성을 상상력의 온갖 터무니없는 짓과 망상에 내맡겨 버리는 한에서, 실제로 사변 이성의 관심을 파괴한다는 순전히 그 이유에서, 공허한 궤변이라고 몰아낼 권리를 가지고"(217) 있다면 사변 이성이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천 이성이 독자적으로 선험적인 근원적 원리들을 갖고, 일정한 이론적인 정립들이 이것들과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되, (그것들이 설령 사변 이성의 통찰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사변 이성의 모든 가능한 통찰에서 벗어나 있다면, 문제는 어느 관심이 최상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어느 것이 물러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다른 하나와 꼭 모순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곧, 과연 실천 이성이 받아들여 그에게 제공하는 것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바 없는 사변 이성이 이 명제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 설령 그것들이 그에게 과도한 것일지라도, 타자로부터 그에게 넘겨진 소유물인 그것들을 그의 개념들과 통합하는 시도를 해보아야만 하느냐 어떠냐는 것이"(216, 217) 문제가 되고 어느 쪽이 우위인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것이다.
칸트는 이런 두 경우의 수 중 실천 이성이 우위인 쪽을 논증하고자 한다. 물론 "실천 이성이 정념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고, 다시 말해 행복이라는 감성적 원리 아래서 경향성들의 관심만을 돌보면서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인 한에서는"(217) 실천 이성의 우위를 쉽사리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순수 이성이 독자적으로 실천적일 수 있고, […] 이론적 의도에서건 실천적 의도에서건 선험적 원리들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오로지 동일한 이성"(218)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럴 경우는 "비록 이성 능력이 이론적 관점에서 어떤 명제들을 주장하여 확립하는 데 충분치 않다 해도, 이 명제들이 그와 모순되지 않는다면, [이론적 관점은] 바로 이 명제들을, 이것들이 순수 이성의 실천적 관심에 불가분리적으로 속하자마자, 그의 지반 위에서 자라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신용할 만한, 밖으로부터 그에게 제안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명제들을 사변 이성으로서 그가 그의 권한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비교하고 연결해보려고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어디까지나 "이론 이성의 통찰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곧 실천적 의도에서 이론 이성 사용을 확장하는 것"이다(218). 이렇게 이론 이성의 실천적 관심에 종속되어 자신의 고유한 관심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적 관점에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실천 이성의 관심이 더 우선적이라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앞의 저 우위에 대한 정의에 의할 때 실천 이성의 우위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순수 사변 이성과 순수 실천 이성이 한 인식으로 결합함에 있어서, 곧 이 결합이 대략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이성 자신에 기초한, 그러니까 필연적인 것이라 한다면, 실천 이성이 우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런 상하 관계가 없다면 이성의 자기 자신과의 상쟁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양자가 단지 병렬(竝列)돼 있다면, 전자는 독자적으로 자기의 한계를 좁다랗게 치고 후자로부터 자기 영역 내에 아무런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반면에 후자는 그의 한계를 그럼에도 모든 것 너머에까지 넓혀, 필요가 생길 때에는 전자를 그 자신 안에 포섭하려고 할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에 대해 사변 이성에 종속하고 그래서 질서가 거꾸로 될 것을 전혀 요구할 수가 없다. 모든 관심은 궁극적으로는 실천적인 것이고, 사변 이성의 관심조차도 단지 조건적으로만 실천적 사용에서만 완전한 것이니 말이다."(218, 219)
 
3. 실천 이성 비판
앞서 언급한 이성의 두 사용이나 관심의 차이 때문에 사변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은 비판의 이유와 과제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사변 이성을 비판하는 <순수 이성 비판>은 순수한 이론 이성이 순전히 사변적인 개념, 또는 이념에게 월권적으로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고,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까지도 한낱 순수한 이성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참칭하는 것에 대한 순수한 이성의 자기 비판이다. 따라서 여기서 비판의 목적은 순수한 이론 이성이 경험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칸트는 머리말 맨 처음에서 왜 이 책의 제목이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니고 그냥 '실천 이성 비판'인지가 설명되어야 할 문제라고 제기하면서 우선 간략히 이 상황을 언급한다.
 
"이 비판에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니라, 그저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을 병렬시킴은 저런 이름을 요구하는 듯이 보임에도 말이다. 그 까닭은 이 논고가 충분히 해명해 줄 것이다. 이 논고는 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 의도에서 그것의 전 실천적 능력을 비판한다. 만약 이 일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 논고가 (사변 이성에서 능히 일어나는 바와 같이) 혹시 순전히 월권적으로 이성이 그러한 순수 능력을 가지고서 자기 분수를 넘어서지나 않을까를 알기 위해, 순수 능력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순수 이성으로서 실제로 실천적이라면, 이성은 자기의 실재성과 자기 개념들의 실재성을 행위를 통하여 증명할 것이고, 그런 가능성에 반대되는 일체의 궤변은 헛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3)
 
결국 <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은 작업 방향이 반대이다. <순수 이성 비판>은 경험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은 순수 이성이 월권을 범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실천 이성 비판>은 거꾸로 경험에 의해 조건 지워진 의지가 월권을 범하면서 자신이 도덕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참칭하는 것을 비판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이성의 월권을 비판하고 자신에게 허용된 역할에 머무르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작업이다. 순수 이성이 마치 경험에 의해 조건지어진 이성인양 실질적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듯이 활동하는 것이나, 경험에 의해 조건지어진 이성을 통해 규정되는 의지가 마치 도덕 법칙에 의해서만 순수하게 규정되는 의지인양 도덕의 토대 역할을 담당하려는 것이나 모두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단지 비판의 방향이 인식에서는 순수 이성에로 가지만 도덕에서는 경험적으로 조건지어진 이성에로 간다는 점이 다를 따름이다. 이점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기되는 첫 번째 물음은, 과연 순수한 이성이 그 자신만으로 의지를 규정하기에 충분하냐, 아니면 그것은 단지 경험적으로-조건지어진 이성으로서 의지의 규정 근거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정당화되긴 했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험적 서술도 가능치 않은 원인성 개념, 곧 자유 개념이 등장한다. 이제 만약 우리가 이 [자유 원인성의] 성질이 인간의 의지에 (그러니까 또한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실제로 속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로써 순수한 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순수한 이성만이, ― 경험적으로-제약된 이성은 그렇지 못하고 ― 무조건[제약]적으로 실천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니라, 단지 실천 이성 일반의 비판 작업을 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애당초 순수 이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순수 이성은 아무런 비판도 필요하지 않다. 순수 이성이란 그 자신이 그 모든 사용의 비판을 위한 먹줄을 함유하고 있는 그런 것이다. 실천 이성 일반의 비판은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조건지워진 이성이 자기만이 전적으로 의지의 규정 근거를 제공하려고 하는 월권을 방지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순수 이성의 사용은, 만약 순수 이성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확정만 된다면, 유일하게 내재적이다. 이에 반해 월권적으로 전제[專制]를 행하는 경험적으로-조건지어진 [이성] 사용은 초험적인 것으로, 순수 이성 영역을 넘어서는 부당한 요구와 명령으로써 표출된다. 이것은 순수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서 말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관계다."(30, 31)
 
요컨대 칸트에 따르면 <실천 이성 비판>은 <순수 이성 비판>과는 정반대로 순수한 이성 만이 무조적적으로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을 밝혀서, 경험적으로 조건지워진 이성이 초험적인 영역에 대해서까지 "월권적으로 전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실천 이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실천 이성 일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 이성 일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이제야 마음의 두 능력, 곧 인식능력과 욕구능력의 선험적 원리들이 찾아졌고, 그것들의 사용 조건들·범위·한계가 규정되었으며, 이로써 학문으로서 체계적인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을 위한 확실한 기초가 놓여"(21-23)지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접근은 앞서 언급한 차이들 때문에 탐구의 순서는 거꾸로가 된다.
 
"순수 이론 이성의 분석학은 지성에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의 인식을 다루는 것이고, 그러므로 직관에서, 그러니까 (이 직관은 항상 감성적이므로) 감성에서 출발해서, 이로부터 비로소 (이 직관의 대상들의) 개념들에로 전진해야만 했고, 이 두 가지를 앞세운 연후에야 원칙들로써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실천 이성은 대상들을, 그것들을 인식하기 위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능력을, (대상들의 인식에 맞게) 저 대상들을 실현하기 위해, 다룬다. 다시 말해 의지를 다룬다. 의지는 이성이 대상들의 규정 근거를 함유하는 한에서 원인성이다. 이 이성은 따라서 직관의 객관이 아니라, 오히려 (원인성의 개념은 언제나 잡다의 실존을 상호 관계에서 규정하는 법칙과의 관계를 함유하므로) 실천 이성으로서 단지 그것의 법칙만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실천 이성의 분석학의 비판은, 이성이 실천 이성이어야 하는 한에서 ― 이것이 본래적 과제인데 ―, 선험적 실천 원칙들의 가능성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부터만 비판은 실천 이성의 대상들의 개념들, 곧 단적인 선·악의 개념들에로 전진할 수 있었는바, 이것은 이 개념들을 저 원칙들에 맞춰서 비로소 제공하기 위해서였다(왜냐하면, 이 개념들은 저 원리들에 앞서서는 어떠한 인식 능력에 의해서건 선한 것 또는 악한 것으로 주어질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앞장, 곧 순수 실천 이성의 감성과의 관계에 관한, 그리고 그것이 이 감성에 미치는 필연적인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영향, 다시 말해 도덕적 감정에 관한 장이 그 몫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분석학은 이론적인 이성의 그것에 전적으로 유추해서 이성 사용의 모든 조건들의 전 범위를 나누었으되, 그 순서는 거꾸로가 되었다. 이론적인 순수 이성의 분석학은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적 논리학으로 구분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전혀 걸맞지 않을 이 명칭들을 순전히 유추적으로만 이 자리에서 사용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실천적인 이성의 분석학은 거꾸로 순수 실천 이성의 논리학과 감성학으로 구분된다. 논리학은 다시금 저기에서는 개념들의 분석학과 원칙들의 분석학으로 구분되었고, 여기서는 원칙들의 분석학과 개념들의 분석학으로 구분된다. 감성학은 저기서는 감성적 직관의 이중적 방식으로 인해 두 부문을 가졌지만, 여기서는 감성은 전혀 직관 능력으로가 아니라, 한낱 (욕구의 주관적 근거일 수 있는) 감정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이 감정에 관해서 순수 실천 이성은 더 이상의 세분은 허용하지 않는다."(159-161)
 
<2> 도덕 법칙
1. 도덕 법칙과 이성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확립한 서양 근대 계몽 사상의 완성자인 칸트의 경우, 도덕 법칙의 원천은 신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자체이다. 인간은 한 편으로는 자연적 존재자 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예지적 힘, 즉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힘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서 당위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데, 여기서 도덕 법칙이 나온다. 그래서 도덕 법칙의 원천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칸트는 "순수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이고, 우리가 윤리 법칙이라고 부르는 보편적 법칙을 (인간에게) 준다"(32)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순수 실천 이성의 힘에 의해 그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며, 도덕을 위해서는 (…) 결코 어떠한 종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Ⅵ-3)
도덕 법칙은 인간 이성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다(58).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 법칙들과 그에 따르는 의무들의 단 하나의 원리다. 이에 반해 자의의 모든 타율은 무책임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책임 및 의지의 윤리성의 원리에 맞서 있다."(59) 따라서 "인간은 곧 그의 자유의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 법칙의 주체"(158)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도덕 법칙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과하고,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그것에 스스로 복종해야만 하는 법칙이며, 인간이 악으로 나갈 수도 있는 자연적 경향성을 제압하고 스스로를 도덕법칙 아래에 세워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격적 존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판단력 비판, Ⅴ-448).
물론 현실적인 인간은 한 편으로 자연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양면적이다. "동일한 행위자는 현상으로서 (그 자신의 내감에 대해서조차도) 항상 자연의 기계성에 따르는 감성 세계의 인과성을 가지며, 그러나 같은 사건과 관련하여, 그 행위하는 인격이 자신을 동시에 예지체로 (곧, 시간 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그의 현존에서의 순수 예지자로) 보는 한에서, 자연 법칙들에 따르는 저 인과성의 규정 근거를 ― 이 규정 근거 자신은 모든 자연 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 ― 포함할 수 있다"(206), 즉 인간은 "현상들의 자연 법칙, 곧 현상들 상호간의 인과 법칙과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52)는 의지, 곧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도둑질을 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런 행동은 인과의 자연 법칙에 따라서 앞선 시간의 규정 근거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온 결과이고, 그래서 그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음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도덕 법칙에 따른 가치 판단이, ― [도덕] 법칙은 그런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므로 ―, 이 점에서 사정을 변경시켜 그런 행동은 안 할 수도 있었다고 전제할 수 있는가?"(171) 이럴 때 도둑질을 한 사람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바로 그가 예지적 존재자로서는 자연 법칙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도덕 법칙을 준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행위들은 한편으로는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유의 법칙인 하나의 법칙 아래 있고, 따라서 예지적 존재자들의 태도에 속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 세계 안의 사건들로서 현상들에 속하는 것이므로, 실천 이성의 규정들은" 즉 도덕 법칙들은 "후자와 관련해서만, 따라서 지성의 범주들에 의거해서이기는 하지만, 지성의 이론적 사용의 관점에서 (감성적)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인 한 의식 아래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잡다한 욕구들을 도덕 법칙에 의해 명령하는 실천 이성 내지는 선험적 순수 의지의 통일 의식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생길 수 있을 것이다."(116)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순수 실천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종속해 있는 자연의 법칙들과 (의지와 그 자유로운 행위들과의 관계에 관련해서) 의지에 종속해 있는 자연의 법칙들 사이의 차이는 다음의 점에 있다. 곧, 전자에 있어서는 객관들이 의지를 규정하는 표상들의 원인일 수밖에 없는 반면에 후자에 있어서는 의지가 객관들의 원인이어야만 하며, 그래서 객관들의 인과성은 그 규정 근거를 단적으로 순수 이성 능력 중에 갖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순수 이성 능력은 또한 순수 실천 이성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77) 이 순수 실천 이성은 "실천 법칙 안에서 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는 바, 그 사이에 등장하는 쾌와 불쾌의 감정에 의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이 법칙의 도움을 빌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성이 순수한 이성으로서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사실]만이 이성이 법칙 수립적[입법적]임을 가능하게 한다."(45)
인간이 한 편으로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은 칸트 철학의 특징인 두 세계론에 기반하고 있다. 두 세계론이란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를 엄격히 나누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 즉 '이미 있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으로서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당위의 세계, 즉 '아직 없지만 있어야 할 것'은 우리 행위의 대상으로서 도덕의 세계에 속한다. 안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아는 것이지 아직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은 이미 있는 것의 세계, 즉 현상계로 제한된다. 이미 있는 세계, 즉 자연은 결정론적인 인과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가능하며, 과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중에는 과학의 영역, 사실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또 하나의 풍부하고 오히려 더 중요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의 영역, 도덕의 영역, 가치의 영역이다. 칸트가 오히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이 영역이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한 작업은 좁게 보자면 현상 세계로서의 자연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성립 가능함을 밝힌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뉴턴의 자연 과학이 참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넓게 보자면 사실은 과학이 의미 있게 성립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밝혀서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과학의 틀 속에 들어올 수는 없지만 사실은 인간에게서 더 중요한 문제들을 올바로 다룰 수 있는 올바른 철학(칸트 용어로는 '진정한 형이상학')이 필요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칸트 철학의 두 세계론적 특징은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은 존재이다. 인간은 한편으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로서 도덕적으로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욕구와 충동에 지배를 받는 자연적 존재로서 비도덕적 행위도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그의 이중적 견해는 『윤리 형이상학기초』에서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의 현상(Erscheinung)과 사물 자체(Ding an sich)의 구분, 현상계(Phaenomena)와 가상계(Noumena)의 구분에 근거해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감각들의 단순한 지각과 감수(感受)의 면에서 보면, 그는 감성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져야 하지만, 자신 안에서 순수한 활동성일 수 있는 것에 관한 측면에서 보면 그는 예지계(intellectuelle Welt)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Ⅳ-451) 따라서 인간은 "두 가지 관점을 가지게 되는데, 이 관점으로부터 인간은 자신을 관찰하고 또 자기 능력의 사용법칙과 결국 자기의 모든 행위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감성계에 속하는 한에서 자연의 법칙(他律) 밑에 있고, 둘째, 예지계에 속하는 자로서는 자연과는 무관한, 경험적이 아니며 이성에만 근거한 법칙 밑에 있다."(Ⅳ-452) 즉 인간은 현상계, 또는 감성계로서의 일상생활에서는 인간 자신 역시 하나의 현상으로서, 필연성으로서의 자연법칙에 종속된 타율적인 존재이지만, 가상계·예지계로서의 도덕성의 세계에서는 자유 의지를 가진 자율적 존재이다. 이를 『실천이성비판』의 용어법에 따라 표현해 보면, 인간은 한편으로는 본능에 근거하는 충동(Triebfeder)에 의해 행위하기에 경향성(Neigung)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지에 근거하는 동기(Bewegungsgrund)에 의하기에 의무(Pflicht)가 그의 행위원리이다.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는 이 인간의 양면성을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의 투쟁으로 설명하며,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는 야만적인 동물상태와 세계 시민적 상태의 중간에 인간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노력에 있어서 단지 본능적으로만 행동하지도 않으며, 또한 이성적인 세계시민과 같이 정해진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Ⅷ-16) 인간에 대한 이러한 양면적 파악은 두 세계론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론 철학적 견지에서 접근하면 인간은 경험적 인간학의 자연적 대상으로서, 외적·내적 자연적 조건에 의거해 규정된 '현상인(homo phaenomenon)'으로 파악되지만, 실천 철학적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행위와 실천의 주체로서, 욕구나 경향성 같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미리 규정되지 않고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규정하는 '가상인(homo noumenon)'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 자유, 경향성과 의무, 악과 선, 본능과 이성 등의 양면성에 의해 내적인 갈등으로 가득 찬 존재로서의 인간을 보는 칸트의 관점은 사회적으로도 지속적인 갈등의 상태가 필연적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칸트 역사철학에서도 중요한 전제로 작용한다.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는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고 이웃들과 함께 질서 있는 공동체를 이루려는 사회적 속성을 가지는 반면, 이기심으로 인해 이웃에게 자기를 위해서만 좋은 것을 강요하는 반(反) 사회적 경향을 동시에 가진다. 이로 인해 인간의 사회에서는 건설과 파괴, 평화와 전쟁이 혼란하게 난무하게 되며 완전한 사회적 질서를 향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점진적인 진보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2. 도덕 법칙의 위상
칸트의 경우 도덕 법칙은 신조차도 따라야 할 절대적인 것이다. "이성은 윤리성의 이 원리를 동시에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법칙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 그러므로, 이 원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를 가진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에게도, 아니 더 나아가서 최상의 예지자로서 무한한 존재자에게도 함께 유효하다."(57) 인간의 경우에는 도덕 법칙은 명령의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비록 순수한 의지를 전제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온갖 필요들과 감성적 동인들에 의해 촉발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떤 신성한 의지를, 다시 말해 도덕 법칙에 저항하는 어떤 준칙에 대한 소질도 없는 그러한 의지를 전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 법칙은 인간들에게는 정언적으로 명하는 명령이다."(57) 그래서 우리는 이 법칙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게 되며, "책임은, 순전한 이성과 그것의 객관적 법칙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의무라고 일컬어지는 행위를 지시하는 강요다."(57) 그러나 신과 같은 "완전 자족적인 예지자에게 있어서는 자의가, 동시에 객관적으로 법칙이 될 수 없는 어떠한 준칙에 대한 소질도 없다고 표상되는 것은 당연하며, 그 때문에 그에게 부가되는 신성성의 개념은 예지자를 일체의 실천 법칙 너머로 떼어놓지는 않지만, 그러나 모든 실천적으로-제한적인 법칙들, 그러니까 책임과 의무 너머로는 떼어놓는다."(58)
이러한 신의 의지는 "원형으로 쓰일 수밖에 없는 실천 이념"으로서 "이 원형에 무한히 접근해 가는 것이 모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58)
여기서 도덕 법칙과 신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전통적인 문제 중 하나이다. 보통 '신명령론(God Command Theory)'부르는 이 문제는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옳기 때문에 신이 명령하는가, 아니면 신이 명령하기 때문에 옳은 것인가?" 여기서 옳기 때문에 신이 명령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주지주의(intellectualism)의 입장이라면 신이 명령하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주의주의(voluntarism)의 입장이다. 주지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면 신의 전지함은 확보할 수 있지만 신의 전능함을 확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조차도 옳고 그름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옳음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그것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지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면, 신의 전능함은 확보가 된다. 옳고 그름조차도 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가 신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가 신을 찬양하는 이유는 신이 항상 옳은 것을 명령하기 때문인데, 신이 살인은 명한다면 살인도 옳은 것이 되어버려, 단지 우리는 신의 전능함이 두려워서 복종할 따름이지 신을 찬양할 이유는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 구도에 따른다면 칸트의 입장은 주지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덕 법칙은 신조차도 따르는 것이다. 물론 신의 경우에는 자의가 항상 객관적인 법칙에 일치되기 때문에 강제의 형태는 띠지 않지만, 도덕 법칙은 독립적으로 먼저 존재하는 것이지 신의 의지가 도덕법칙을 규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가 제시하는 도덕 법칙은 신보다도 상위에 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3. 도덕 법칙과 준칙
칸트는 우리의 실천을 규정하는 실천 원칙들을 크게 준칙과 실천 법칙으로 나눈다. 실천 원칙은 "의지의 보편적인 규정을 함유하는 명제들로서, 그 아래에 다수의 실천 규칙들을 갖는다." "이 원칙들은, 그 조건이 주관에 의해서 단지 주관의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는, 주관적이다." 이런 원칙이 바로 준칙이다. 그러나 실천 원칙들은 그 조건이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면, 객관적이다. 이것이 바로 즉 실천 법칙들이다(35).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도 칸트는 준칙을 "행위의 주관적 원리"로서 "이성이 주관의 조건에 맞춰 (흔히 주관의 무지나 경향성에 따라) 정한 실천 규칙을 포함하며, 그러므로 주관이 준거로 삼는 원칙"(Ⅳ-420 이하, 주)이라고 하고, 실천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타당한 객관적 원리"로서 "이성적 존재자가 그에 따라 행위해야만 하는 원칙, 다시 말해 명령이다"(Ⅳ-421,주)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순수 이성이 실천적으로, 다시 말해 의지 규정을 위해 충분한 근거를 자기 내에 함유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실천 법칙들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든 실천 원칙들은 순전한 준칙들일 따름일 것이다."(36)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실천 원칙에 종속된 "실천 규칙은 행위를 의도하는 결과를 위한 수단으로서 지정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항상 이성의 산물이다." 그런데 주관적이지 않은 규칙은 모두 명령이다. "그것은 행위의 객관적 강제를 표현하는 당위에 의해 표시되는 규칙으로서, 만약 이성이 의지를 전적으로 규정한다면, 행위는 반드시 이 규칙에 따라서 일어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령들은 객관적으로 타당하고, 그래서 주관적 원칙들인 준칙들과는 전적으로 구별된다."(37) 그런데 명령은 다시 가언 명령과 정언 명령으로 나뉜다. 가언 명령은 "작용하는 원인으로서 이성적 존재자의 원인성의 조건들을 순전히 결과의 관점에서만 그리고 결과를 위해 충분함의 관점에서만 규정"하는 명령이다. 반면에 정언 명령은 "의지가 결과를 낳기에 충분하든 말든, 단지 의지만을 규정"하는 명령이다. 여기서 정언 명령만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 우선 주관적인 "준칙들은 그러므로 원칙들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명령들은 아니다." 명령도 "그것들이 조건적이면, 다시 말해 의지를 의지로서 절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욕구된 결과의 관점에서만 규정한다면, 다시 말해 가언적 명령들이라면, 실천적 훈계들이긴 하겠으나 법칙들은 아니다." 도덕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과연 욕구된 결과를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의지 자체를 충분히 규정해야만 한다. 곧 그것들은 정언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법칙들이 아니다."(37)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비록 순수한 의지를 전제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온갖 필요들과 감성적 동인들에 의해 촉발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떤 신성한 의지를, 다시 말해 도덕 법칙에 저항하는 어떤 준칙에 대한 소질도 없는 그러한 의지를 전제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 법칙은 인간들에게는 정언적으로 명하는 명령"일 수밖에 없다(57).
정언 명령만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명령이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보편적이라면 언제 누구에게나 타당해야 하며, 필연적이라면 무조건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즉 "필연성은, 만약 그것이 실천적인 것이어야 한다면, 감정적인 그러니까 의지에 우연히 붙어있는 조건들에 독립적이어야 한다."(37)
칸트가 들고 있는 예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늙어서 궁핍하지 않기 위해서는 젊어서 일하고 절약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올바르고 또한 동시에 중요한 의지의 실천적 훈계다. 그러나 여기서 의지는 사람들이 그 의지가 욕구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지시되어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바이며, 이 욕구는 그 행위자 자신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주관적인 것이다. 그는 다른 것을 욕구할 수도 있다. 즉 "그가 그 자신이 획득한 재산 외에 다른 원조를 예상하거나, 또는 아예 늙지 않기를 바라거나, 또는 장차 궁핍에 처하는 경우 어떻게든 근근히 꾸려갈 수 있으리라고"(37)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젊어서 일하고 절약해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명령으로 역할을 할 수 없다. 결국 이 명령에서의 "필연성은 단지 주관적인 조건으로, 우리는 그 [훈계의] 필연성을 모든 주관에서 같은 정도로 전제할 수 없다."(38) 결국 "규칙이란 그것이 우연적인 주관적 조건들 ― 이것이 이성적 존재자를 다른 존재자와 구별짓는 것인데 ― 없이 타당할 때만 객관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이성의 법칙 수립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성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의 원인성에 의해 무엇이 거행되는가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의지에 관계"하는 정언 명령만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38).
그렇다면 칸트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천의 주체인 인간이 주관적으로 세운 준칙이 어떤 경우에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론 철학에서 범주와 같은 주관의 순수 지성 개념이 왜 한갓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 실재성,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달리 말해 한갖 주관적인 규칙이 어떻게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통틀어 중요한 문제이며, 그 점에서 칸트는 관념론자라 할 수 있다.
 
4. 이론 철학에서의 법칙 개념
칸트에게서 법칙은 필연성과 보편성을 가진 것이다. 이점은 이론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도덕 법칙 문제와 관련하여 이론 철학에서도 핵심 개념인 법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1) 규칙과 법칙
우선 칸트는 규칙이란 말을 법칙보다 넓은 의미로 쓴다. 실제로 칸트가 자연 현상의 일양성을 가리키기 위해 보통 사용하는 말은 '규칙성(Regelmässigkeit)'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칸트는 '규칙(Regel)'이라는 말을 상당히 애매하게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진 "선험적 규칙"으로 어떤 경우에는 필연성을 부여할 수 없는 "경험적 규칙"(A112)으로 쓴다. 그리고 전자는 법칙과 같은 뜻으로 쓴다. 예를 들어 '제2유추의 원칙'에서도 초판의 원칙에서 쓰인 '규칙'이라는 개념은 재판에서 '법칙'으로 바꾼 것을 보면, 여기서 규칙이라는 말은 인과 연관의 필연성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규칙이란 말을 쓰는 예는 많이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 서론』에서도 칸트는 "규칙은 우리가 일련의 관념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 하도록 해준다"(Ⅵ-305)라고 말한다.
그러나 규칙과 법칙을 구분해 쓰는 경우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도 칸트는 규칙과 법칙을 구분하여 "어떤 잡다(雜多, Mannigfaltige)가 (따라서 한 가지 방식으로) 정립될 수 있도록 하는 보편적인 조건의 표상을 규칙이라고 하고, 잡다가 그런 방식으로만 정립되어야만 할 경우 그 조건을 법칙이라고 부른다"(A113)고 말한다. 또 "규칙은, 그것이 객관적인 한에서 (따라서 대상의 인식에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한에서) 법칙이라고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A126). 또한 칸트에 의하면 "특정 사건이 특정의 현상 뒤에 언제나 일어나게 되는 규칙"(B241) 즉, "어떤 현상에는 딴 현상이 항상 후속 한다는 '관계의 규칙'이 지각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가능하다."(Ⅵ-312) 그러나 인과 관계는 이렇게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관계가 아니다. 인과 관계는 "결과 이전에는 보편적 자연 법칙에 따라 그 원인의 인과성의 어떤 규정이(원인의 그 어떤 상태가) 선행해야 하고, 결과는 어떤 항존적 법칙에 따라 후속 하는"(Ⅵ-343) 관계이다. 이럴 경우에만 "위에서 말한 경험적 규칙이 이제야 법칙으로 파악되고, 그런 중에도 그저 현상들에 타당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가능한 경험을 위해 ― 경험은 전반적으로 따라서 필연적으로 타당한 규칙을 필요로 하지만 ― 현상들에 타당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Ⅵ-312) 칸트는 1776년에서 1780년대 초 사이의 언젠가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미간행된 『Reflexione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험적으로는 규칙을 발견할 따름이지 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후자에는 필연성이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칙들은 선험적으로 인식된다."(R5414, ⅩⅧ-176) 이런 용법으로 쓰인 규칙이라는 말, 혹은 "규칙적으로(regelmässig)"라는 말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일상 용법에 더 가깝다. "그는 6시면 규칙적으로 밥을 먹는다"에서처럼, 이런 의미에서 "규칙적"이란 말은 그것이 필연적이건, 규칙에 따라 일어났건 아니건 간에 상관없이 최대한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런 경우의 "규칙들은 단지 일반적인 타당성(Gemeingültigkeit)을 가진다"라고 말한다(R5226).(보편타당성을 가리키는Allgemeingültigkeit라는 개념과 구분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이처럼 모든 규칙성(Regelmässigkeit)이 다 법칙적(gesetzmässig)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처럼 규칙성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경험적으로는 그것은 단지 흄적인 의미에서의 불변적 결합이나 어떤 대상의 속성들이 항상 공존하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그러나 초월적으로는 이 말은 규칙에 따라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칸트는 이 두 의미를 아예 용어로 구분하려고 했고 이럴 경우 '규칙'을 경험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의 반복적인 계기에 대한 주장으로만 쓰고, 반면에 '법칙'으로는 단지 필연적 규칙만을 의미했다.
 
(2) 자연 법칙의 두 종류
그렇다면 법칙이란 개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칸트는 이론 철학 전체를 통하여 초월적 자연 법칙과 경험적 자연 법칙을 구분하고 있다. 우선 '초월적 분석론'에서 칸트는 순수하고 보편적인 자연 법칙과 더 특수하고 개별적인 자연 법칙들을 구분했다. '원칙의 분석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지성의 원칙들이 바로 전자에 속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필연적인 합법칙성의 근본적 기초는 범주에 기인하는 것이다. 범주에 의해 현상에 대해서 선험적 법칙을 제시해 주는 지성의 순수한 능력으로는 현상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합법칙성들을 다 파악할 수는 없다. 경험적으로 규정된 현상들에 관한 특수한 법칙들은 분명히 선험적 법칙들에 종속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주에서 완벽하게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첨가되어야 한다(B165).
칸트는 『형이상학 서론』 제36절에서도 비슷한 구분을 한다. 여기서 칸트는 자연 법칙을 "자연의 경험적인 법칙"과 "순수한, 또는 보편적인 자연 법칙"으로 나눈다. 전자는 "항상 특수한 지각들을 전제하는 법칙"인 반면에 후자는 "특수한 지각에 근거하지 않고, 경험에서의 지각들의 필연적 결합의 조건만을 포함하고 있는 법칙"이다. 따라서 후자의 지배를 받는 자연은 곧바로 "가능한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Ⅳ-320). 결국 "경험 일반의 가능성은 바로 자연의 보편 법칙이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들은 그 자신 자연의 법칙이다."(Ⅳ-318)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에서 알 수 있는 자연 법칙은 많이 있으나 현상들의 결합에서의 합법칙성, 즉 자연 일반을 우리는 경험에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판단력 비판』으로 넘어가면 지성의 초월적 법칙과 경험적인 개별 법칙 사이의 구분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판단력 비판』 '제1서론'의 제4절에서 칸트는 지성의 보편적 초월 법칙에 의해 자연이 합법칙성을 가진다고 해서, 자연이 개별 경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합법칙성을 가진다는 보장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경험의 모든 대상의 총괄로서의 자연"은 지성 자신이 선험적으로 부여한 "초월적 법칙에 따르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것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살펴본 바이다. 가능한 경험들은 모두 이 초월적 법칙에 의하여 결합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기에 경험 일반은 "한갓 집합"이 아니라 "체계"이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경험적 법칙에 따르는 자연"도 하나의 체계라는 사실이 곧바로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적 법칙들은 "매우 다양하고 이종적(異種的)"이어서 하나로 일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ⅩⅩ-208-9).
『판단력 비판』의 재판의 서론에서도 칸트는 보편 인과 원리와 개별 인과 법칙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우리들이 어떤 경험의 가능 근거들 가운데 맨 먼저 발견하는 것은 물론 어떤 필연적인 것, 즉 보편적 자연 법칙들이다. 이런 보편적 자연 법칙들 없이는 자연 일반은 사유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자연 법칙들은 바로 범주에서 비롯된 것이며, 규정적 판단력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변화는 그 원인을 가진다'는 보편 자연 법칙의 경우에 규정적 판단력은 '인과'라는 선험적 지성 개념 아래에 포섭하기 위한 조건을 지시해 준다. 이 경우 '동일한 사물의 규정들의 계기'라는 것이 바로 이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일반에 대해서는 이 법칙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반면에 경험적 법칙들은 아주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경험적 법칙에 따른 자연의 통일"과 체계는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적 법칙에 따른 통일이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통일도 "반드시 전제되고 상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자연 법칙 만으로는 사실들을 개개의 특수한 자연 존재자들로 파악하여 종에 따라 사물들 사이의 연관을 부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적인 개별 자연 법칙은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감성에 주어지는 잡다를 결합하여 가능한 경험에 이르는 "법칙적 통일"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법칙적 통일은 "해명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생각될 수는 있는 것"이다(Ⅴ-182-184).
예를 들어 이 논의를 인과에 적용시켜 보면 결국 칸트는 보편 인과 원리와 개별 인과 법칙을 엄격하게 구분한 셈이다. '모든 변화는 원인을 가진다'는 원리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이다. 그러나 개별 인과 법칙들은 단지 경험적으로만 발견될 수 있고, 따라서 선험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의 지성이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한에서는 자연이 어떤 경험적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우연적인 사실이며, 단지 상대적 보편성만을 가질 따름이다.
 
(3)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
이상의 용어법을 도덕 법칙과 관련하여 적용시켜보면, 준칙은 일단 주관적인 규칙이라 할 수 있다. 명령은 일단 법칙이지만 이때 가언 명령은 이론 철학의 경험적 자연 법칙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고, 정언 명령은 초월적 자연 법칙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실천 철학의 경우에도 주관적인 규칙인 준칙이 어떻게 필연성과 보편성을 부여받아서 객관적인 도덕 법칙이 될 수 있는지가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은 차이가 있다. 우선 자연 법칙은 이성의 이론적 사용에서 나온 것이고 도덕 법칙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 나온 것이다. 칸트의 주장을 인용해보자.
 
"자연 인식에서는 발생하는 것의 원리들이 (예컨대, 운동의 전달에서 작용 반작용의 같음의 원리가) 동시에 자연의 법칙들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사용이 거기서는 이론적이고, 객관의 성질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실천적 인식, 다시 말해 한낱 의지의 규정 근거들만을 문제삼는 인식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원칙들이라는 것이 바로 그 때문에 아직도 우리가 불가피하게 그 지배를 받는 법칙들이 아니다. 실천적인 것에서 이성은 주관과, 곧 욕구 능력과 관계하고, 규칙은 이것의 특수한 성질에 다양하게 따를 수 있으니 말이다."(36)
 
그래서 도덕 법칙은 자연 법칙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순수 이성의 실천 규칙은 첫째로, 실천적인 것으로서, 객관의 실존에 관한 것이고, 둘째로, 순수 이성의 실천 규칙으로서, 행위의 현존과 관련하여 필연성을 수반하는, 그러니까 실천 법칙이며, 그것도 경험적 규정 근거들에 의한 자연 법칙이 아니라, 그에 따라서 의지가 모든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해 (순전히 법칙 일반의 표상 및 이 법칙의 형식에 의하여) 규정되어야 하는 자유의 법칙이고, 그러면서도 가능한 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경우는 오로지 경험적일 수 있으므로, 다시 말해 경험 및 자연에 속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감성 세계에 있는 한에서 언제나 오직 자연 법칙 아래에 있으면서도 자유의 법칙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를, 곧 감성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개진되어야 할 도덕적 선의 초감성적 이념이 적용될 수 있는 경우를 감성 세계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배리[背理]적인 일로 보인다"(119, 120).
 
나아가 칸트는 도덕 법칙과 자연 법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 법칙의 경우에는, "법칙들에 따르는 한 경우의 도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법칙 자체의 도식이 ?? 만약 이 말이 여기서 적절하다면 ??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법칙에 의한 의지 규정은 (그것의 성과와 관련한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다른 규정 근거 없이, 인과성 개념을 자연의 연결을 이루는 조건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들과 묶기 때문이다."(121)
 
"거기에 감성적 직관의 대상들이 그 자체로 종속해 있는 법칙으로서의 자연 법칙에는 (법칙이 규정하는 순수 지성 개념을 감관들에서 선험적으로 그려내는) 도식, 다시 말해 상상력의 보편적인 수행방식이 부응한다. 그러나 (전혀 감각적으로 조건지워져 있지 않은 원인성인) 자유의 법칙의 기초에는, 그러니까 무조건적-선의 개념의 기초에도 어떠한 직관이, 그러니까 그 개념을 적용하기 위한 어떠한 도식이 구체적으로 놓여 있을 수 없다. 지성은 이성의 이념의 기초에 감성의 도식이 아니라, 법칙을, 그것도 감관의 대상들에서 구체적으로 그려내질 수 있는 그러한 법칙을, 그러니까 자연 법칙을, 그러나 단지 그것의 형식의 면에서, 판단력을 위한 법칙으로서 놓을 수 있고, 이것을 우리는 그래서 윤리 법칙의 범형[範型]이라고 부를 수 있다."(121, 122)
 
이처럼 "자연 법칙은 윤리적 원리들에 따라 행위의 준칙을 평가하는 범형이다. 만약 행위의 준칙이 자연 법칙 일반의 형식에서 검사 받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준칙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상식조차도 그렇게 판단한다. 왜냐하면, 자연 법칙은 상식의 모든 극히 일상적인 판단들, 경험 판단들의 기초에까지도 언제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그래서 자연 법칙을 항상 수중에 가지고 있고, 다만 그것은 자유로부터의 인과성이 판정되어야 할 경우들에 있어서 저 자연 법칙을 순전히 자유 법칙의 범형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상식은 경험의 경우에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수중에 가지지 않고서는 순수 실천 이성의 법칙을 적용 사용할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124)
 
5. 질료와 형식
그렇다면 준칙이 어떤 경우에 도덕 법칙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만약 이성적 존재자가 그의 준칙들을 실천적인 보편적 법칙들로 생각해야 한다면, 그는 이 준칙들을 질료 면에서가 아니라 한낱 형식면에서 의지의 규정 근거를 함유하는 그런 원리들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48) 칸트에 의하면 "욕구 능력의 객관(질료)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전제하는 모든 실천 원리들은 모두 경험적이며, 어떠한 실천 법칙도 제공할 수가 없다."(38) 여기서 "질료는 의지의 대상이다. 이 대상은 의지의 규정 근거이거나 아니거나 이다. 만약 그것이 의지의 규정 근거면, 의지의 규칙은 경험적 조건에 (곧, 규정하는 표상의 쾌 또는 불쾌의 감정에 대한 관계에) 종속할 터고, 따라서 아무런 실천 법칙도 아닐 터다. 무릇 우리가 법칙에서 모든 질료를, 다시 말해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일체 대상을 떼어내고 나면, 보편적 법칙 수립의 순전한 형식 외에 법칙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자는 그의 주관적-실천적 원리들, 다시 말해 준칙들을 전혀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들로 생각할 수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에 따라 저 준칙들이 보편적 법칙 수립에 적합하게 되는 그 순전한 형식이 준칙들을 그것만으로 실천 법칙으로 만든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48, 49)
칸트가 질료를 전제하는 실천 원리들이 도덕 법칙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러한 실천 원리들은 경험적이라서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욕구 능력의 질료라는 말로써 그것의 실현이 욕구되는 대상을 뜻하고, 이 대상에 대한 욕구가 실천 규칙에 선행하고, 실천 규칙을 원리로 삼는 데 조건이 되는 경우, 이 원리를 경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39). 왜냐하면, 이 경우 의지의 규정 근거는 바라는 대상이 실현됨으로써 느끼게 되는 대상의 현실에 대한 [快]가 된다. 그러나 어떠한 대상이 쾌, 혹은 불쾌를 느낄게 할지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자의의 규정 근거는 언제나 경험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
둘째 이유는 이러한 실천 원리들은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쾌 또는 불쾌 ― 이것은 언제나 단지 경험적으로 인식되며,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타당할 수는 없는 것인데 ―라는 수용성의 주관적인 조건에만 근거하는 원리는 그러한 수용성을 지닌 주관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준칙으로 쓰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자신만으로는 (이 원리에는 선험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객관적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법칙으로 쓰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원리는 결코 실천 법칙을 제공할 수가 없다."(39, 40)
 
이러한 실천 원리들이 줄 수 있는 보편성은 기껏해야 조건적인 보편성일 따름이고 따라서 법칙이 될 수 없다.
 
"실천 규칙들의 모든 질료는 항상 주관적인 조건들에 의존하는 바, 이 주관적 조건들은 그것에게 순전히 (내가 이것 또는 저것을 욕구할 때, 그러면 나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만 한다는 식의) 조건적인 보편성 외에 이성적 존재자들을 위한 아무런 보편성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60)
 
설사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들이 그들의 만족이나 고통의 감정의 대상들로 받아들여야 할 것과 관련해서, 그리고 또한 동시에 심지어는 만족을 얻고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이 쓸 수밖에 없는 수단과 관련해서조차 예외 없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래도 자기 사랑의 원리가 그들에 의해 실천 법칙이라고 결코 주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치 자체가 단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규정 근거는 아무래도 언제나 주관적으로만 타당하고, 한낱 경험적인 것으로, 모든 법칙에서 생각되는 그런 필연성, 곧 선험적 근거들에 의한 객관적 필연성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47).
결국 "실천 법칙이란 철저하게 객관적 필연성을 갖는 것이지 한낱 주관적 필연성을 갖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이성에 의해 선험적으로 인식되지, 경험에 의해 ― 이 경험이 비록 경험적으로 제 아무리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47) 자연에 대해서도 법칙이라는 이름이 붙여 질려면 "우리가 그것들을 실제로 선험적으로 인식하거나 또는 적어도 (화학 법칙들에서처럼), 우리들의 통찰이 깊어지면, 그것들이 선험적으로 객관적 근거들에 의해 인식된다고 가정할 때만 자연법칙들 (예컨대, 역학의 자연법칙들)이라고 일컬어" 질 수 있다(48) 실천 법칙의 경우에도 한갓 주관적인 조건에 근거한 것은 결코 법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도덕 법칙의 경우에도 질료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릇 모든 의욕이 역시 대상, 그러니까 질료를 가질 수밖에 없음은 확실히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질료가 곧 준칙의 규정 근거 및 조건인 것은 아니다."(60) 질료가 준칙의 규정근거가 되어서는 결코 그 준칙이 도덕 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대상의 실존에 대한 기대가 자의를 규정하는 원인일 터이고, 욕구 능력의 어떤 사물의 실존에 대한 의존성이 의욕의 기초에 놓일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 의존성은 언제나 오로지 경험적인 조건들 내에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결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을 위한 기초를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다른 사람의 행복을 의지의 객관으로 삼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준칙의 질료에 그쳐야지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준칙의 조건이어서는 안 된다."(61) "그러므로, 질료를 제한하는 법칙의 순전한 형식은 동시에 이 질료를 의지에 덧붙이되, 그러나 그것을 전제하지는 않는 근거여만 한다." 칸트가 들고 있는 예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그 질료가 나 자신의 행복이라 하자. 이것은, 내가 그것을 (실제로 유한한 존재자에게는 내가 그렇게 해도 좋듯이) 모든 사람에게 부가한다면, 내가 타인의 행복을 이 질료에 포함시킬 때만, 객관적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행복을 촉진하라는 법칙은 이것이 모든 사람의 자의의 객관이라는 전제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자기사랑의 준칙에 법칙의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이성이 필요로 하는 보편성의 형식이 의지의 규정 근거가 되는 데서 생긴다. 그러니까 (타인의 행복이라는) 객관은 순수 의지의 규정 근거가 아니었고, 순전한 법칙적 형식만이 그에 의해 내가 나의 경향성에 기초한 준칙을, 그것에 법칙의 보편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순수 실천 이성에게 그렇게 적합토록 하기 위해서, 제한하는 것이며, 이 제한으로부터만, ― 외적 동기의 추가에서가 아니라, ― 나의 자기사랑의 준칙을 타인의 행복에도 확장해야만 한다는 책임의 개념이 생길 수 있었다."(61)
 
그런데 이렇게 오직 형식에 의해서만 법칙이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도덕 법칙은 자유와 연결된다. "법칙의 순전한 형식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표상될 수 있고, 그러니까 감관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또한 현상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법칙의 순전한 형식이라는 표상은 자연에서 인과 법칙에 따르는 사건들의 모든 규정 근거들과는 구별된다."(51) "그러나 또한 오직 저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 이외에는 이 사건들에 대한 어떠한 규정 근거도 법칙으로 쓰일 수 없다면, 그러한 의지는 현상들의 자연 법칙, 곧 현상들 상호간의 인과 법칙과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한 독립성은 그러나 가장 엄밀한, 다시 말해 초월적 의미에서 자유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준칙의 순전한 법칙 수립적 형식이 오로지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의지는 자유 의지다."(52)
 
6. 도덕 법칙과 행복
(1) 자기 행복의 원리
칸트에 의하면 "모든 질료적 실천 원리들은 그 자체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것이며, 자기사랑과 자기 행복이라는 보편적 원리에 속한다."(40) 행복이란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의 전 현존에 부단히 수반하는 쾌적한 삶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행복을 "자의의 최고 규정 근거로 삼는 원리는 자기사랑의 원리다."(41) 따라서 "자의의 규정 근거를 어떤 대상의 현실로부터 느끼는 쾌 또는 불쾌에다 두는 모든 질료적 원리들은, 그것들 모두가 자기사랑 또는 자기 행복의 원리에 속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매 한 가지 종류의 것이다."
사실 "행복함은 이성적이면서 유한한 모든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구하는 바이며, 그러므로 그런 존재자의 욕구 능력을 불가피하게 규정하는 근거다." "유한한 존재자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이 필요는 그의 욕구 능력의 질료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주관적으로 기초에 놓여있는 쾌 또는 불쾌의 감정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것에 관계하며, 그럼으로써 유한한 존재자가 그의 상태에 만족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규정된다."이처럼 "행복 개념이 객관들의 욕구 능력에 대한 실천적 관계의 기초에 두루 놓여있다 해도, 그것은 단지 주관적 규정 근거들의 일반 명칭에 불과하며, 아무 것도 종적으로 특수하게 규정하는 바가 없기 때문"(46)에 법칙의 근거는 될 수 없다. 행복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줄 수 없다. "각자가 그의 행복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는 각자의 쾌와 불쾌에 대한 특수한 감정에 달려있으며, 동일한 주관에 있어서도 이 감정의 변화에 따른 필요의 상이함에 달려있다." 따라서 행복이 "주관적으로 필연적인 한 법칙"일지는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아주 매우 우연적인 실천적 원리"에 불과하다. "이것은 서로 다른 주관들에 있어서 아주 서로 다를 수 있고,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러니까 결코 어떤 법칙을 제공할 수 없다."(46)
칸트는 행복의 내용을 무엇으로 규정하건 행복 자체를 내세우는 입장은 결코 도덕 법칙에 다다를 수 없다고 본다. 행복을 내세우는 "모든 질료적인 실천적 규칙들은 의지의 규정 근거를 하위의 욕구 능력에 둔다. 그리고 의지를 충분하게 규정하는 순전히 형식적인 법칙이 전혀 없다면, 어떠한 상위의 욕구 능력도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41) 칸트에 따르면 "쾌의 감정과 결합되어 있는 표상들감관들에 근원을 갖느냐 지성에 근원을 갖느냐 하는 점에서 하위 욕구 능력상위 욕구 능력의 구별을 발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구의 규정 근거들을 캐물으면서 그것들을 어떤 것에 대해 기대된 쾌적감에 둘 때, 중요한 점은 결코 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표상이 어디서 유래하는가가 아니고, 단지 그것이 얼마나 많이 즐거움을 주는가"(41)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 한 표상이 지성에 그 자리와 근원을 갖는 경우일지라도, 그 표상이 주관에 쾌의 감정을 전제함으로써만 자의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의의 규정 근거인 것은 전적으로 내감의 성질에, 곧 내감이 그 표상에 의해 쾌적감으로 촉발될 수 있다는 점에 달려있다. 대상들의 표상들은 종류가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것들은 감관의 표상들과는 다른 지성의 표상일 수도 있고, 이성의 표상일 수조차 있다. 그럼에도 그로 인하여 저 표상들이 본래적으로 오직 의지의 규정 근거가 되는 그 쾌의 감정은 (쾌적함, 곧 대상을 산출하게끔 행동을 야기시키는, 그로부터 기대되는 즐거움은), 그것이 언제나 단지 경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 한 가지 종류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욕구 능력에서 표현되는 동일한 생명력을 촉발하고, 이런 점에서 다른 모든 규정 근거와 오직 정도 상으로만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매 한 가지 종류이다."(42)
 
이것은 우리가 종류가 전혀 다른 의지의 규정 근거들을 양적으로 비교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동일한 사람이, 사냥하는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하여 다시는 얻기가 불가능한 배울 것 많은 책을 읽지 않은 채 돌려줄 수도 있고, 식사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근사한 강연을 도중에서 떠날 수도 있고, 도박대[臺]에 앉기 위하여 보통 때에는 매우 높이 평가하던 이성적인 대화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희극 입장권을 살 돈 이상이 수중에 없기 때문에, 평소에는 기꺼이 적선하던 가난한 사람을 물리칠 수도 있다."(42)
 
결국 "만약 의지 규정이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기대하는 쾌적함 또는 불쾌적함의 감정에 의거해 있다면, 그가 어떤 종류의 표상에 의해 촉발되었든 그에게는 전적으로 마찬가지다. 그가 선택을 결심하는 데는 오로지 그 쾌적함이 얼마나 강하며, 얼마나 길며, 얼마나 쉽게 얻어지며,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가 만이 문제가 된다." "단지 삶의 쾌적함이 문제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지성의 표상들이냐 감관의 표상들이냐는 묻지 않으며, 그는 오직 그것들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얼마나 많이 얼마나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인가 만을 묻는다."(43) 따라서 "자기 행복의 원리는, 제 아무리 많이 지성과 이성이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할지라도, 의지에 대해서는 하위 욕구 능력에 적합한 규정 근거 외의 다른 규정 근거들을 포함하지 않을 터다. 그러므로 도대체가 상위 욕구 능력이란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순수 이성이 독자적으로 실천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순수 이성은 어떠한 감정의 전제 없이도, 그러니까 언제나 원리들의 경험적인 조건인 욕구 능력의 질료인 쾌적함과 불쾌적함의 표상들 없이도, 실천 규칙의 순전한 형식을 통해 의지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성은, 순전히 독자적으로 (경향성의 작용 없이) 의지를 규정하는 바로 그런 한에서, 정념적으로 규정되는 욕구 능력이 그에 종속하는 진정한 상위 욕구 능력이고, 참으로, 그러니까 종[種]적으로 특수하게 이 정념적 욕구 능력과는 구별되는 것이다."(44, 45) 결국 "이성은 실천 법칙 안에서 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는 바, 그 사이에 등장하는 쾌와 불쾌의 감정에 의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이 법칙의 도움을 빌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성이 순수한 이성으로서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사실]만이 이성이 법칙 수립적[입법적]임을 가능하게 한다."(45)
그렇기 때문에 "자기 행복의 원리가 의지의 규정 근거로 된다면, 그것은 윤리성의 원리와 정반대다."(61) 그리고 "윤리성과 자기사랑의 경계는 이처럼 분명하고 뚜렷해서, 아주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도 어떤 것이 전자에 속하는가 후자에 속하는가의 구별을 결코 잘못할 수 없을 정도다."(63) 칸트는 거짓 증언을 한 친구나, 자기 이익을 완벽하게 챙기는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윤리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62, 63).
 
(2) 자기 행복의 원리와 도덕 법칙(윤리성의 원리)의 차이
칸트는 자기 행복의 원리와 윤리성의 원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근거로 네 가지를 든다.
첫째는 "행복의 원리가 준칙들을 제공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제아무리 사람들이 보편적인 행복을 객관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결코 의지의 법칙들로 쓰일 그런 준칙들을 제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63). "왜냐하면, 이 행복에 대한 인식은 순전히 경험 자료에 의거하고, 이에 대한 각자의 판단은 전적으로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는 바, 이 각자의 생각이라는 것도 변화무쌍한 것이므로, 행복의 원리는 일반적 규칙들은 줄 수 있으나, 결코 보편적인 규칙들은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체적으로 아주 흔하게 들어맞는 그런 규칙들은 줄 수 있으나,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타당해야만 하는 그런 규칙들은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실천 법칙도 거기에 기초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객관적으로 필연적일 수 없다. 따라서 "자기사랑(영리함)의 준칙은 한낱 충고하고, 도덕 법칙은 명령한다."(64)
둘째는 인식에서의 차이이다.
 
"자의의 자율의 원리에 따라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아주 쉽게 아무 주저 없이 통찰될 수 있다. 그러나 자의의 타율의 전제 아래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통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세상사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 의무인가는 누구에게나 자명하게 드러나지만, 그러나 무엇이 진정 지속적으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는, 이 이익이 전 생애에 걸쳐 있을 경우에는, 언제나 파헤칠 수 없는 모호함에 싸여 있어서, 실제로 이익에 맞춰진 규칙을 적절히 예외를 인정하면서도 알맞은 방식으로 생의 목적에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영리함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법칙은 누구에게나 명령하며 그것도 엄격한 준수를 명령한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에 따라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해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어서, 가장 평범한 아무런 훈련 없는 사람이라도 세상사에 대한 영리함 없이도 그걸 처리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 정도이다."(64)
 
셋째는 실천에서의 차이이다. "윤리의 정언 명령을 충족시키는 일은 어떤 권세 안에서도 언제 누구에게나 가능하며, 경험적으로-조건지워진 행복의 훈계를 충족시키는 일은 누구에게나 단지 드물게만 가능하고, 단지 유일한 의도에서 그걸 충족시키는 일은 더욱 더 가능하지 않다."(65)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단지 순정하고 순수해야 할 준칙만이 문제가 되나, 후자의 경우에는 욕구하는 대상을 실현시킬 힘과 자연적 능력이 또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 법칙의 경우에는 "의무의 이름으로 윤리를 명령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윤리의 훈계가 경향성과 충돌할 때에, 누구나 처음에는 윤리의 훈계를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으나, 그가 이 법칙을 어떻게 준수할 수 있을까 하는 방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여기서 이 방책을 배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해서 그는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두 경우의 차이를 다름과 같은 예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노름에서 돈을 잃는 사람은 아마 자기 자신과 자신이 영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놀음에서 속임수를 썼음을 ― 비록 그렇게 해서 돈을 땄다 하더라도 ― 스스로 알 경우에는, 그가 자신을 윤리 법칙에 비추어보자마자 자기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65)
넷째, 처벌의 문제와 관련해서이다. "우리의 실천 이성의 이념 중에는 윤리 법칙의 위반에 수반하는 어떤 것, 곧 형벌성[刑罰性]도 있다. 그런데 형벌 그 자체의 개념과 행복을 누림은 전혀 결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형벌을 주는 사람은 어쩌면 동시에, 이 형벌을 이 목적에 맞추려는 호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형벌은 우선 형벌로서, 다시 말해 순전한 화[禍]로서 그 자체로 정당화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형벌 받은 사람은, 그 화[禍]가 화로서 그치고, 그가 비록 이 가혹함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호의를 내다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화는 그에게 정당하게 일어난 것이고, 그의 신세는 그가 한 행실에 완전히 알맞은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형벌 자체에는 필경 첫째로 정의가 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이 개념의 본질을 이룬다."(65, 66) 즉 칸트의 경우 처벌은 결과와 상관없이 지은 잘못에 합당하다는 점에서 정당화된다는 응보주의 처벌론의 입장에 서있다. 자기 행복의 원리에 서게 되면 처벌이 주는 결과에 따라 처벌은 정당화된다.
 
(3) 칸트 처벌론 ― 응보주의
사실 처벌 문제는 철학에서 윤리학의 핵심적 주제 중의 하나이다. 윤리학이 다루는 도덕적 행위가 가진 특징 중 하나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 문제가 제기되면 그 이행 여부에 따라 당연히 보상과 처벌의 문제가 따라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에서 처벌 문제는 오랜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철학에서 처벌 문제에 접근하는 대표적인 두 입장으로 응보주의와 공리주의를 들 수 있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공리주의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처벌 문제에서도 공리주의가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벤담으로부터 시작되는 공리주의 처벌이론에 서는 처벌은 언제나 사회적 선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행위 한다고 믿는 심리학적 이기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기적 동기를 갖는 사람을 어떻게 일반적인 사회적 선에 이바지하도록 동기 유발시킬 수 있는가? 우선은 어릴 때부터 양심을 계발하여 반사회적 행위를 생각만 하더라도 죄의식과 가책을 느끼게 하는 내적 제재의 방법이 기본적이다. 그러나 이런 제재가 성공하지 못할 때 외적 제재를 부과하여 범행의 욕구를 갖는 사람이라도 처벌이 두려워 범행을 억제하게 하는데서 처벌의 중요성이 성립된다.
일반적으로 공리주의는 행위나 규칙을 판단할 때 그것이 기대한 만큼의 최대의 공리를 가져오는지 아닌지가 기준이 되는데, 이 점은 처벌하는 행위나 규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 대한 특정한 처벌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을 처벌하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처벌하는 것보다도 그 방식으로 처벌하는 것이 더 많은 선을 산출하거나 더 많은 피해를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공리주의 처벌이론은 처벌의 실제적 효과와 그로 인한 현실적 필요성에 근거해서 처벌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처벌이 주는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규정해볼 수 있다. 첫째는 교화, 교정의 효과이다. 처벌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범행자가 다시는 범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범행자는 범행에 잘못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절차를 통해 정화되고 순화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잠재적 범행자에 대한 예방 효과이다. 처벌에서 기대되는 큰 효과 중 하나는 유사한 범행을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것을 억지하는 것이다. 공리주의 처벌이론이 자주 '억지(deterrence)이론'이라고 불릴 만큼 이것은 중요한 효과이며, 따라서 처벌을 정당성 문제를 따질 때, 중요한 관건이 되는 효과이다.
공리주의와 대비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처벌이론은 바로 '응보주의 이론(retributive theory)'이다. 때때로 이 입장은 공리주의의 '결과론'에 대비해서 '응분론(deserts theory)'라고 부르기도 한다. 응보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처벌은 오직 응당 처벌받을 만하다고 할 경우에만 시행되어야 한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처벌이 무엇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처벌의 만족스러운 결과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처벌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처벌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범행자가 처벌받을 만한 경우일 뿐이다.
고대의 바빌로니아나 히브리 법전에서부터 근대의 칸트에 이르기까지 고전적인 응보론들은 대체로 도덕적 형평 문제를 응보론의 기초로 제시한다. 정의란 형평을 유지하는 저울과도 같다. 사회 속에서는 모두가 다른 사람을 존중할 때 도덕적 형평이 유지되지만 누군가가 범행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침해를 가할 때, 이 평형은 깨어져 도덕적 불균형이 야기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문제의 범행자를 처벌하는 것으로써 그 균형을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균형과 대칭이라는 관념이 응보론 밑에 깔려있다. "처벌이 응분과 일치해야 한다"는 응보주의의 기본 규칙은 바로 이런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응보주의는 범행자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이 정의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자비란 범행자가 응당 받아야 할 처벌에 비해 보다 완화된 처벌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 부정의 일 뿐만 아니라, 자비는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 부정의도 초래한다는 것이다.
처벌이 어떤 식으로든 범행에 상응해야 한다는 응보주의의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혼동되어 해석된다. 첫째는 처벌이 범행과 똑같은 정도로 엄격해야 하며, 심지어는 범행과 같은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 처벌은 범행에 대한 반사적 형태일 경우에 정당하게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단순한 응보주의이다. 둘째는 처벌이 반사적 형태는 아니지만 저질러진 범행의 종류에 알맞은 적합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적합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가 응보주의 이론이 직면하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범행의 심각성과 처벌의 엄중성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그 일치 여부를 가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응보주의 처벌론이 실제 현실에 적용될 때 부딪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런 실제 적용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응보주의의 관점을 취하게 되는 것은 응보주의가 합리주의적인 인간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은 의지의 자유를 가진 합리적 선택의 주체이다. 따라서 내가 범행을 의지하는 것은 처벌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칸트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하기에 응보론의 입장에 서있다.
 
(4) 도덕 감각(정)에 대한 비판
칸트는 나아가 특수한 도덕 감각이 있어서 이것이 도덕 법칙을 규정한다는 입장도 비판한다. "이에 따르면 덕의 의식은 직접적으로 만족 및 즐거움과 결합돼 있는 반면, 패악[悖惡]은 마음의 불안 및 고통과 결합돼 있을 터며,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은 자기 행복의 욕구에 내맡겨질 것이다."(67) 그런데 이런 입장은 논리적으로 선결문제요구의 오류와 유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패악을 저지른 자를 그의 범죄에 대한 의식으로 인해 마음의 불안에 시달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이미 앞서서 그가 그의 성격의 가장 고귀한 바탕에서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해야만 하며, 또한 의무에 맞는 행위에 대한 의식이 기쁨을 주는 자는 애당초부터 덕성을 가진 자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의무의 개념은 틀림없이 이 만족에 대한 일체의 고려에 앞서 있었던 것이고, 이 만족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릇 사람은, 그가 도덕 법칙에 맞게 했다는 의식에서 저 만족을 느끼고, 도덕 법칙을 어겼음을 자책할 수 있을 때 쓰라린 꾸짖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무라고 일컫는 것의 중요함과 도덕 법칙의 존엄성, 그리고 도덕 법칙의 준수가 인격 자신의 눈앞에 제시하는 직접적인 가치를 먼저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만족 또는 마음의 불안을 책임 인식에 앞서서 느끼고, 그것을 책임의 기초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67, 68) 물론 칸트는 도덕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도덕 감정이 도덕 법칙의 근거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본래 유일하게 도덕 감정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이 감정을 정초하고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의무에 속하는 것이기조차 하다. 그러나 의무의 감정이 이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다."(68)
 
7.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과 이성의 사실
결국 칸트에 의하면 자기 행복의 원리를 비롯한 질료에 기반한 실천 원리들로부터는 도덕 법칙이 나올 수 없다.
 
"이로부터 마지막 결론이 나온다: (증명된 바처럼) 질료적 원리들은 최상의 도덕 법칙으로는 아주 부적합하기 때문에, 그에 준거해서 우리의 준칙들에 의한 가능한 보편적 법칙 수립의 순전한 형식이 의지의 최상의 직접적인 규정 근거를 이뤄야만 하는 순수 이성의 형식적 실천 원리가 유일하게 가능한 원리이며, 이것은 정언 명령들, 다시 말해 (행위들을 의무로 만드는) 실천 법칙들로 적합하고, 판정할 때나 인간 의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그에 적용할 때 윤리성의 원리로 적합하다."(71)
 
따라서 도덕 법칙은 "정언적인 선험적 실천 명제로 표상된다. 이에 의해서 의지는 단연코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러므로 여기서 법칙인 실천 규칙 자체에 의해), 객관적으로 규정된다. 왜냐하면, 순수한, 그 자체로 실천적인 이성은 여기서 직접적으로 법칙 수립적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경험 조건들에 독립적인 것으로, 그러니까 순수한 의지로, 법칙의 순전한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규정 근거는 모든 준칙들의 최상의 조건으로 간주된다. 이 사태는 충분히 진기한 일이며, 이 같은 것은 여타 실천 인식에서는 전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 수립에 대한, 그러므로 단지 문제성 있는, 선험적 사상은 경험이나 또는 어떤 외적인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빌려옴 없이 법칙으로서 무조건적으로 명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55)
칸트는 바로 이러한 도덕 법칙들의 최고 원칙을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이라 부르면서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54)는 원칙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에 따라서 사람이 욕구하는 어떤 결과가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행위를 발생시키는 훈계가 아니라, (그럴 경우에는 규칙은 언제나 자연적으로 조건지워질 터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의지를 그것의 준칙들의 형식에 관해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순전히 원칙들의 주관적 형식을 위해서 쓰이는 법칙이 법칙 일반의 객관적 형식에 의한 규정 근거로 최소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면서 칸트는 "이 근본 법칙에 대한 의식"을 "이성의 사실"(56)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근본 법칙을 이성의 선행하는 자료로부터, 예컨대 자유의 의식 ― 이것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 으로부터 추론적으로 도출해 낼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 그 자체로서, 순수하든 경험적이든 어떠한 직관에도 의거하는 바 없는 선험적 종합 명제로 우리에게 닥쳐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의지의 자유를 전제한다면, 이 명제는 분석적일 터이지만, 그러나 적극적 개념으로서 의지의 자유를 위해서는 일종의 지성적 직관이 요구될 것일텐데, 여기서 우리는 그런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 법칙을 주어진 것으로 오해 없이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이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이 법칙을 통해 자신이 근원적으로 법칙 수립적임 ― 내가 意慾하는 바를 나는 命令한다 ―을 고지하는, 순수 이성의 유일한 사실임을 명심해야 한다."(57)
 
칸트가 이성의 사실로서 설명하는 것은 도덕 법칙 자체가 아니라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이다. 칸트는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을 현실적인 것으로 보며, 허구적인 것이나 상상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도덕적 의식, 무제약적 의무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성은 무제약적 의무를 의식함으로써 법칙수립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무조건적으로-실천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자유에서 출발하는 것인가 실천 법칙에서 출발하는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진다(52,53).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자유로부터 출발할 수가 없다. 출발점은 도덕 법칙이다. 그리고 이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이 이성의 사실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의 최초의 개념은 소극[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가 없고, 또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상들의 법칙만을, 그러니까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자연의 기계성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자유를 추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우리가 의지의 준칙을 개략적으로 그리자마자) 의식되는 것은 도덕 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에게 맨 처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은 도덕 법칙이 어떠한 감성적 조건에 의해서도 압도되지 않는, 도대체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규정 근거임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자유의 개념에 이른다. 그런데 저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순수한 이론적 원칙들을 의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순수한 실천 법칙들을 의식할 수 있다. 곧, 이성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지정해 주는 필연성과, 또 이성이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바, 모든 경험적 조건들의 격리에 주목함으로써 말이다. 순수 지성에 대한 의식이 순수한 이론적 원칙들에서 생기듯이, 순수 의지에 대한 개념은 순수한 실천 법칙들로부터 생긴다."(30)
 
칸트는 이성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의 도덕성 여부와 관련해서 내린 판단을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그러나 또한 경험이 우리 안의 개념들의 이 질서를 입증한다. 누군가가 그의 성적 쾌락의 경향성에 대해, 사랑스런 대상과 그를 취할 기회가 그에게 온다면, 그로써는 그의 경향성에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고 그럴듯하게 둘러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런 기회를 만난 그의 집 앞에, 그가 그러한 향락을 누린 직후에, 그를 달아매기 위한 교수대가 설치되어 있다면, 그래도 과연 그가 그의 경향성을 이겨내지 못할까?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오래 궁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 그의 군주가 그를 지체 없이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그 군주가 기꺼이 그럴 듯한 거짓 구실을 대 파멸시키고 싶어하는, 한 정직한 사람에 대하여 위증할 것을 부당하게 요구할 때, 그의 목숨에 대한 사랑이 제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때 과연 그가 그런 사랑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떤지를 물어 보라. 그가 그런 일을 할지 못할지를 어쩌면 그는 감히 확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그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주저 없이 인정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도덕 법칙이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을 자유를 자신 안에서 인식한다."(54)
 
이 점에서 칸트는 규범의 인식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직각론자입장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을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성에게 모순율과 같은 형식 논리의 원칙 ― 칸트 용어로 하자면 순수 이론 이성의 분석적 원칙 ― 이 자명하듯이, 그것이 실천 이성에게는 자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명하다는 것이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라는 것을 함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누구에게나 인지되며, 모든 사람이 언제나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모든 형식적 인식에서 모순율의 참의 원리로서 기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율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듯이, 실제로는 저 원칙이 인지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또한 논리학자라고 해서 항상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듯이, 실천 이성의 원칙을 '사실'로서 알고 있는 윤리학자라고 해서 항상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명한 사실로서의 모순율에 모든 형식적 인식들이 기초함으로써 참을 보증받듯이 모든 실천 행위는 이성의 사실로서의 이 실천 이성의 원칙에 준거해서만 그 행위의 선함을 보증받을 수 있다. 따라서 "대상으로서의 선의 개념이 도덕 법칙을 규정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도덕 법칙이 비로소 선의 개념을, 도덕 법칙이 이런 명칭을 단적으로 가질 만한 한에서, 규정하고 가능하게 한다"(113) 결국 "선악의 개념은 도덕 법칙에 앞서서가 아니라, (얼핏 보면 심지어 이 개념이 도덕 법칙의 기초에 놓여야 할 법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보이는 바대로) 도덕 법칙에[의] 따라서[뒤에] 그리고 도덕 법칙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111) "만약 선이라는 개념이 선행하는 실천 법칙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칙의 기초가 되어야만 한다면, 선 개념은 단지, 그것의 실존이 쾌락을 약속하고, 그렇게 해서 그 쾌락을 낳기 위해 주관의 원인성, 다시 말해 욕구 능력을 규정하는 그런 어떤 것의 개념일 수 있을 뿐이다(101, 102).
 
<3> 자유
1. 칸트 철학에서 자유 개념의 위상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 앞 부분에서 "무릇 자유 개념은, 그것의 실재성이 실천 이성의 명증적인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 있어서, 순수 이성의, 그러니까 사변 이성까지를 포함한, 체계 전체 건물의 마룻돌[宗石]을 이룬다. 그리고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순전한 이념들로 사변 이성에 남아 있는 (신이니 [영혼의] 불멸성이니 하는 등의) 여타의 모든 개념들은 이제 이 개념에 연결되어, 이 개념과 함께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하여 존립하고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다시 말해, 이 개념들의 가능성은 자유가 현실적으로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 증명된다. 이 [자유의] 이념은 도덕 법칙에 의해 개시[開示]되기 때문이다"(4, 5)라고 말한다. 이러한 칸트의 언급에 따르면 자유는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실제 칸트 철학의 전체 모습을 조망해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중첩된 대립 쌍들이 존재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첫 번째 대립 쌍은, 기계론적으로 이해된 자연과 도덕의 존재 근거인 자유가 이루는 대립 쌍이다. 이 대립 쌍은 이른바 '두 세계론'이라 부르는 칸트 철학의 특징을 대변하는 대립 쌍이다. 여기서는 운동인(causa efficiens)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연에 의한 원인성(Kausalität nach Natur)'과 '자유로부터의 원인성(Kausalität aus Freiheit)'이 대립되고 양자의 조화가 과제로 등장된다. 두 번째 대립 쌍은 자연 자체에 대한 상반된 이해이다. 즉, 『순수 이성 비판』의 기계론적 자연관과 『판단력 비판』의 목적론적 자연관의 대립이다. 이렇게 보면, 후기로 가면서 목적인(causa finalis)을 매개로 자연과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칸트의 시도가 첫 번째 대립 쌍의 문제 해결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인과성·자유·목적론이라는 세 개념이 칸트 철학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이며, 이는 각각 원인성이라는 차원에서 운동인·자유에 의한 원인성·목적인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결국 자유 개념은 『실천 이성 비판』만의 문제가 아니라 칸트 철학의 전체 구도에서 중심 핵을 이루는 개념이다.
인과성·자유·목적론이라는 세 개념은 체계적인 관계만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계도 가지고 있다. 자연 철학적인 관심이 강했던 이전의 탐구 작업들은 1781년 『순수 이성 비판』으로 일단락 된다. 그러다가 1784년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1786년까지 한편으로는 역사 철학적인 단편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1785년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거쳐서 1788년 『실천 이성 비판』이 완성된다. 그리고 1790년 『판단력 비판』이 출간된다. 이런 저술의 흐름은 칸트 자신이 이미 세워 놓았던 계획과 물론 관련이 있겠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과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1781년까지 이론 철학을 일단락한 칸트는 이후로 프랑스 혁명 전야인 17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자유와 목적론의 문제를 다룬다. 목적론의 문제가 역사 철학적 맥락에서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도덕 철학을 통해 당위의 영역을 정당화하면서, 엄밀한 학문적 탐구는 아니지만 역사의 영역에서 당위로서 설정될 역사의 방향을 목적론적으로 제시하는 1780년대의 칸트의 주된 작업은 프랑스 혁명과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인과 개념이 1781년까지의 칸트의 이론 철학적 작업의 초점이 되는 문제라면, 자유와 목적론의 문제는 1780년대 이후 칸트의 실천 철학에서 초점이 되는 문제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인 1790년 이후의 저작들이 주로 정치 철학과 종교 철학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이러한 관점에 의할 때, 결국 칸트의 자유 개념은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연결하는 개념임과 동시에 1780년대의 칸트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 초월적 자유
칸트는 이미 『순수 이성 비판』에서 자유가 가능함을 해명했었다. 이때의 자유는 바로 '초월적 자유'이다. 칸트의 이론 철학에 따르면, 자연 안의 모든 사물들은 예외 없이 인과 법칙에 따라 규정되며, 이때의 인과 법칙이란 물리 화학적인 필연적인 계기 관계뿐만이 아니라, 심리 생물학적인 필연적인 계기 관계까지고 포함한다. 인간 또한 현상에 속한 존재로는 한편으로 자연 법칙 아래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한 편 자연의 인과 연쇄를 끊고 어떤 행위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우리가 도덕 법칙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의 직접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자유는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B560)이다. 자연 안에서 어떤 상태를 스스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 앞서서 그 상태를 유발하는 어떤 다른 상태도 자연 안에 있지 않았는데, 어떤 상태가 비로소 발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가진다는 보편 인과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자발성"(B576)으로서 도덕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의지의 자유는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자유는 "문제있는 개념"(B397)이다. 결국 자유는 자연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다. 만약 어떤 현상 계열의 "절대적 자발성"(B474)으로서 자유가 생각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초월적 이념"(B476)이라고 보았다. 초월적 이념으로서의 자유는 일종의 "예지적 원인"(B565)으로서 어떤 사태를 최초로 야기하는 "제일의 원동자"(B480)로서 자연적 사태 발생의 최초의 원인을 말한다.
이 초월적 자유는 바로 "사변 이성이 인과 결합의 계열에서 무조건[제약]자를 생각하고자 할 때 불가피하게 빠지는 이율배반에 대항하여 자신을 구출하기 위하여, 인과성 개념의 사용에서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절대적 의미에서의 초월적 자유"이다. "그러나 순수 이성은 이 개념을 단지 문제성 있는, 곧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으로 제시할 수 있었을 뿐, 이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생각할 수는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쓸 데 없이 불가능하다고 함으로써 그 본질이 공격을 받고 회의주의의 심연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4) 따라서 이 초월적 자유는 "법칙의 일체의 질료(곧, 욕구된 객관들)로부터의 독립성"을 가리키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58, 59)이다. 칸트에 따르면 "의욕의 질료가 실천 법칙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실천 법칙 안에 끼어든다면, 이로부터 자의의 타율, 곧 어떤 충동이나 경향성에 따르는, 자연 법칙에의 종속성이 나타난다. 그러면 의지는 스스로 법칙을 주지 못하고, 단지 정념적인 법칙들을 합리적[이해타산적]으로 준수하기 위한 훈계를 줄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독립성이 바로 초월적 자유인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질료로부터 독립하여 오직 법칙의 순전한 형식에 의해 규정될 때 도덕이 성립된다.
 
"법칙의 순전한 형식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표상될 수 있고, 그러니까 감관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또한 현상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법칙의 순전한 형식이라는 표상은 자연에서 인과 법칙에 따르는 사건들의 모든 규정 근거들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에서는 규정하는 근거들 자신이 현상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오직 저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 이외에는 이 사건들에 대한 어떠한 규정 근거도 법칙으로 쓰일 수 없다면, 그러한 의지는 현상들의 자연 법칙, 곧 현상들 상호간의 인과 법칙과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한 독립성은 그러나 가장 엄밀한, 다시 말해 초월적 의미에서 자유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준칙의 순전한 법칙 수립적 형식이 오로지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의지는 자유 의지다(51,52)
 
따라서 초월적 자유는 비록 소극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 초월적 자유는 일체의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그러므로 자연 일반 ― 이것이 순전히 시간 상의 내감의 대상으로 고찰되든, 아니면 공간과 시간 상에서 외감의 대상으로 동시에 고찰되든 ― 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으며, (후자의 본래적 의미의) 이 자유, 유일하게 선험적으로 실천적인 이 자유 없이는 어떠한 도덕 법칙도 가능하지 않으며, 이에 따른 어떠한 귀책도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에(174)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실천적 자유
『실천 이성 비판』에서 칸트는 도덕 법칙에 근거해서 이제 자유에 실재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렇게 실재성이 부여된 자유가 바로 실천적 자유이다. 초월적 자유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면 실천적 자유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이다.
 
"법칙의 일체의 질료(곧, 욕구된 객관들)로부터의 독립성과 동시에 그와 함께, 하나의 준칙이 그것이 될 수밖에 없는 순전히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에 의한 자의의 규정에 윤리성의 유일한 원리는 성립한다. 그러나 저 독립성소극적 의미에서 자유이고, 이 순수한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이성 자신의 법칙 수립적극적 의미에서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자유는 그 자체가, 그 아래에서만 준칙들이 최상의 실천 법칙에 부합할 수 있는, 모든 준칙들의 형식적 조건이다."(58, 59)
 
칸트는 이미 순수 이성 비판에서 다루었던 자유 문제를 다시 끄집어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순수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 다시금 자유의 개념을 다루는 고찰을, 가령 서둘러 지은 건축물에서 흔히 나중에야 받침목과 버팀 기둥을 갖다 대듯이, 사변 이성의 비판 체계의 틈을 메우는 데나 쓸모가 있을 일종의 삽입물로 보지말고, (왜냐하면, 사변 이성의 체계는 그의 의도로 보아서는 완전한 것이니 말이다), 저기서는 단지 문제성 있는 것으로 표상될 수 있었던 개념들을 이제 그것들의 실재적인 표현에서 통찰하도록 하기 위해 체계의 연관을 뚜렷하게 해주는 참된 구성분으로 볼 일이다. 이 주의점은 특히 자유 개념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자유 개념에 대해서는 놀라운 마음으로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한낱 심리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을 충분히 잘 통찰할 수 있고, 그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는 사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이 개념을 초월적인 관계에서 정확히 고찰했더라면, 그들은 사변 이성의 온전한 사용에서는 문제성 있는 개념으로서 이 개념이 불가결하면서도 그 개념이 전적으로 불가해[不可解]하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이 개념을 가지고 실천적 사용에로 넘어갔다면, 그들이 다른 곳에서는 이해하기를 그토록 꺼려할, 그러한 실천 사용의 원칙들에 관한 바로 그 규정에 저절로 이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자유 개념은 모든 경험주의자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비판적 도덕론자들에게는 가장 숭고한 실천 원칙들을 위한 열쇠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유 개념을 통해 그들이 반드시 이성적으로 처신하지 않을 수 없음을 통찰한다."(12, 13)
 
칸트 자신에게도 『순수 이성 비판』의 분석에서는 자유는 문제성 있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실천 이성 비판』에서 자유는 실재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감성 세계의 존재자들의 원인성 그 자체의 규정은 결코 무조건적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건들의 모든 계열에 대해 반드시 무조건적인 어떤 것, 그러니까 또한 자기를 전적으로 스스로 규정하는 원인성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절대적 자발성의 능력으로서 자유의 이념은 순수 사변 이성의 필요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능성에 관한 한, 순수 사변 이성의 분석적 원칙이었다. 그러나, 현상들로서 사물들의 원인들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원인성 규정은 발견될 수 없으므로, 자유 이념에 알맞은 실례를 어떤 경험 중에서라도 제시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행위하는 원인이라는 사상[생각된 것]만을, 우리가 이 사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예지체로도 고찰되는 한의 감성 세계의 한 존재자에게 적용할 때에, 변호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자유 개념을 이성의 규제적 원리로 삼는 것이 모순되지 않음을 지적함으로써 말이다. 이 규제적 원리를 가지고서 나는 결코 비록 그 같은 원인성이 부가되는 대상을, 그것이 무엇인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장애는 제거한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이 사상[생각된 것]을 실재화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사상을 그렇게 행위하는 존재자의 인식으로 ― 순전히 그것의 가능성의 면에서도 ― 전환시킬 수 없었다. 이제 순수 실천 이성은 이 공허한 자리를 (자유에 의한) 예지 세계에서의 일정한 인과성의 법칙, 곧 도덕 법칙으로써 메꾼다. (…) 여기에서는 이 자유의 개념에 객관적인, 비록 단지 실천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할 여지없는 실재성이 부여된다."(83-85)
 
결국 자유의 실재성, 곧 실천적 자유는 도덕 법칙을 통해 증명된다. 우선 칸트는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본다.
 
"도덕 법칙은 흡사[이를테면], 우리가 선험적으로 의식하고, 그리고 명증적으로 확실한, 순수 이성의 사실로 주어져 있다. 설령 우리가 경험에서 그것이 정확하게 준수되는 실례를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의 객관적 실재성은 어떠한 연역에 의해서도, 어떠한 이론적, 사변적 혹은 경험적으로 뒷받침된 이성의 노력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가 없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의 명증적 확실성을 포기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도 확인될 수가 없고, 그래서 후험적으로 증명될 수가 없으며, 그럼에도 그 자체로 확고하다."(81, 82)
 
그리고 이 도덕 법칙에 기대어 자유에로 나아간다.
 
"자유의 최초의 개념은 소극[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가 없고, 또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상들의 법칙만을, 그러니까 자유와는 정반대 되는 자연의 기계성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자유를 추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우리가 의지의 준칙을 개략적으로 그리자마자) 의식되는 것은 도덕 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에게 맨 처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은 도덕 법칙이 어떠한 감성적 조건에 의해서도 압도되지 않는, 도대체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규정 근거임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자유의 개념에 이른다."(53)
 
결국 도덕 법칙이 우선 '이성의 사실'로서 확립되고, 다음으로 확립된 도덕 법칙이 의지의 자유가 실재적임을 증명해준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결국 이론 이성에서 문제 거리로 남아 있던 자유는 실천의 맥락에서 실재성을 획득한다.
 
"사변 이성은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고자, 그의 우주론적 이념들 중에서 인과성에 따라 무조건[제약]자를 발견하기 위해) 이 능력을 적어도 가능한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곧, 자유의 능력 말이다. 그 자신 아무런 정당화해 주는 근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도덕 법칙은 이 자유의 한낱 가능성뿐만 아니라, 현실성을 이 법칙이 자신들을 구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존재자들에서 증명한다. 도덕 법칙은 사실상 자유에 의한 인과의 법칙이고, 그러므로 초감성적 자연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이다. 감성 세계 안의 사건들의 형이상학적 법칙이 감성적 자연의 인과 법칙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저 도덕 법칙은 사변 철학이 무규정적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 곧 그것의 개념이 사변 철학에서는 단지 소극적이었던 그런 인과성의 법칙을 규정하고, 그래서 이 법칙에다 비로소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82)
 
그래서 "도덕 법칙은 그 실재성을 다음의 사실을 통해 사변 이성 비판까지도 만족시킬 만큼 증명"해 준다. "곧, 도덕 법칙은 사변 이성에게는 그 가능성이 이해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한낱 소극적으로 생각된 [자유의] 원인성에다가 적극적 규정, 즉 의지를 직접적으로 (의지의 준칙들의 보편적인 법칙적 형식이라는 조건에 의해) 규정하는 이성 개념을 덧붙이고, 그렇게 해서, 이념들을 가지고서 사변적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했을 때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던 이성에게 처음으로 객관적인 ― 단지 실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 실재성을 줄 수 있으며, 이성의 초험적 사용을 내재적 사용으로 (경험의 영역에서 이념들 자신에 의해 작용하는 원인이도록) 전환시킨다"(83).
이렇게 논리적으로는 "자유는 물론 도덕 법칙의 存在 根據이나, 도덕 법칙은 자유의 認識 根據"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만약 도덕 법칙이 우리의 이성에서 먼저 명료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자유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이것이 비록 자기 모순적이지는 않더라도), 받아들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못할 터이니 말이다. 그런 반면에 자유가 없다면, 도덕 법칙은 우리 안에서 결코 발견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도덕 법칙이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을 자유를 자신 안에서 인식한다."(54)
이 실천적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실천 이성 비판』의 '분석학'을 통해 밝혀지는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 분석학이 밝히는 바는, 순수 이성은 실천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독자적으로, 곧 일체의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해서 의지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순수 이성이 실천적임을 입증하는 事實에 의거해서, 즉 의지를 행위로 규정하는 윤리성의 원칙 안에 있는 자율에 의거해서 말이다. ― 분석학이 동시에 제시하는 바는, 이 사실은 의지의 자유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아니 의지의 자유와 한 가지이며, 그럼으로써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감성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다른 작용하는 원인들과 같이 반드시 인과 법칙에 종속함을 인식하되, 그럼에도 실천적인 일에 있어서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곧 존재자 그 자체로서는, 사물들의 예지적 질서에서 규정되는 그의 현존재를 의식하고,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특수한 직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과성을 감성 세계에서 규정할 수 있는 역학적 법칙들에 의거해 그러하다는 것이다."(72)
 
따라서 실천 이성 비판의 분석학은 순수 사변 이성의 분석학과는 대조된다. 순수 사변 이성의 분석학이 했던 작업은 무엇이었는가? 칸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원칙들이 아니라, 순수 감성적 직관 (곧,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 인식을, 그것도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 가능하게 하는 제일의 여건이었다. ― 직관 없이 순전한 개념들로부터는 종합적 원칙들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종합적 원칙들은 감성적인 저 직관과 관련해서만, 그러니까 또한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련해서만 생길 수 있었다. 지성의 개념들은 이 직관과 결합해서만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 경험 대상들을 넘어서, 그러니까 예지체로서 사물들에 대해서 사변 이성이 일체의 적극적인 인식을 거절한 것은 완전히 정당한 일이었다. ― 그럼에도 사변 이성은 예지체의 개념을, 다시 말해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니 필연성을 확실하게 정립했고, 그래서 예컨대 소극적으로 생각된 자유를 가정하는 일을 순수 이론 이성의 저 원칙들 및 그 제한들과 전적으로 화해 가능한 것으로 모든 반박에 대항하여 구출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러한 대상들에 대해 어떤 특정한, 확장적인 것을 인식토록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에 대한 전망[가망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정도의 작업은 해놓았다."(73)
 
이에 반해 실천 이성의 분석학이 수행하는 작업의 내용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도덕 법칙을 매개로 하여 사변 이성이 판단을 유보했던 예지계에 대하여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도덕 법칙은, 비록 어떠한 전망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 세계의 일체의 여건과 우리 이성 사용의 전 범위로부터는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事實을 제공한다. 이 事實은 순수한 예지 세계를 고지하며,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적극적으로 규정적으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즉 한 법칙을 인식하도록 한다. 이 법칙은 (…) 초감성적 자연인 예지 세계의 형식을 부여한다. (…)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들의 초감성적 자연이란 그것들의, 일체의 경험적 조건에서 독립적인, 그러니까 순수 이성의 자율에 속하는 법칙들에 따르는 실존을 말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물들의 현존이 인식에 의존하는 그런 법칙들은 실천적인 것이므로, 초감성적 자연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다름 아니라 순수한 실천 이성의 자율 아래 있는 자연이다. 이 자율의 법칙은 그러나 도덕 법칙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초감성적 자연 및 순수한 예지 세계의 근본 법칙[원칙]이고, 이것의 사본이 감성 세계에, 그럼에도 동시에 감성 세계의 법칙들을 깨뜨림 없이 실존해야 한다. 우리는 전자를 우리가 순전히 이성에서만 인식하는 원본 자연(原形 自然), 반면에 후자는,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전자의 이념의 가능한 결과를 내용으로 갖는 것이므로, 모상 자연(派生 自然)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사실상 도덕 법칙은 우리를 그 이념상, 그 안에서 순수 이성이, 자기에 알맞은 물리적 능력을 동반하고 있다면, 최고선을 낳았을 그런 자연에로 옮겨놓고, 감성 세계의 형식을 이성적 존재자 전체에게 나누어주도록 우리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니 말이다."(74, 75)
 
결국 사변 이성이 우리 욕구 능력의 객관에 대한 인식 문제를 문제삼았다면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욕구 능력 자체를 규정하는 문제가 쟁점이 된다.
 
"욕구 능력의 객관들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은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이론적 자연 인식의 과제로서 사변 이성 비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설명이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오로지, 어떻게 이성이 의지의 준칙을 규정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일이 단지 규정 근거로서의 경험적 표상에 의거해서만 생기는가, 또는 과연 순수 이성이 또한 실천적이고, 가능한, 전혀 경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자연 질서의 법칙이겠는가 이다. 그 개념이 동시에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해 그것의 현실성의 근거일 수 있는 그러한 초감성적 자연의 가능성은 (예지의 세계에 대한) 아무런 선험적 직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경우에 선험적 직관은 초감성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겠다. 왜냐하면, 의욕의 준칙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 의욕의 규정 근거에 관한 것, 곧 그것이 경험적인 것이냐, 아니면 (순수 이성 일반의 합법칙성에 관한) 순수 이성의 개념이냐,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후자일 수 있느냐 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원인성이 객관들의 실현을 위해 충분한가 어떤가의 문제는, 의욕의 객관들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로서, 평가하는 이성의 이론적 원리들에 맡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욕의 대상들에 대한 직관은 실천적 과제에서는 전혀 아무런 요소도 되지 못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의지의 규정 및 자유 의지로서 이 의지의 준칙의 규정 근거일 뿐, 그 성공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의지가 오로지 순수 이성에 대해서만 합법칙적이라면, 수행함에서 의지의 능력이 어떠한가는 아무래도 좋기 때문이다" (78, 79).
 
따라서 실천 이성에 대한 "비판이 이 법칙들의 기초에 두는 것은 직관 대신에 예지 세계에서의 이 법칙들의 현존 개념, 곧 자유의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 자유의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것이 아니라, 저 법칙들은 의지의 자유와 관련해서만 가능하며, 그러나 의지의 자유의 전제 아래에서는 필연적이고, 또는 바꿔 말해, 저 법칙들은 실천적 요청들로서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79)
이렇게 도덕 법칙을 통해 밝혀진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인간은 인격적일 수 있다. 인격성이란 "자유 내지 전 자연의 기계성으로부터의 독립성으로, 그러면서도 동시에 고유한, 곧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해 주어진 순수한 실천 법칙들에 복종하고 있는 존재자의 한 능력"(155)이다. 한 편으로는 자연적 존재자인 인간이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도덕의 세계의 세계에 속함으로써 한갓 사물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인격적 주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감각 경험으로는 표상 할 수 없고 단지 "예지적으로만 표상 가능하다."(『형이상학 서론』 Ⅳ-316)
앞서 보았듯이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은 또한 인간의 의지가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실천적 의지는 어떤 감성적 충동에도 영향 받음 없이, 도덕 법칙에 어긋나는 자연적 경향성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도덕 법칙에만 규정받는다. 이 자유의 힘의 표현으로서의 도덕 법칙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에 대항하여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나 자기 만족을 제어하며, 그럼으로써 "존경의 대상"(130)이 된다. 따라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의 질서를 넘어서게 하는 이 도덕 법칙이야 말로 "신성한" 것이다.
 
"도덕 법칙은 신성하다(불가침이다). 인간은 비록 충분히 신성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 창조물에 있어서 사람들이 의욕하고,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한낱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오로지 인간만은,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목적 그 자체이다. 인간은 곧 그의 자유의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 법칙의 주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모든 의지는, 모든 인격 그 자신의, 자기 자신을 지향하고 있는 의지까지도, 이성적 존재자의 자율과 일치한다는 조건에 제한되어 있다. 이성적 존재자는 곧 수동적 주관 자신의 의지로부터 생길 수 있는 법칙에 따라 가능한 것이 아닌 어떠한 의도에도 복종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 자는 결코 한낱 수단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동시에 그 자신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 조건을 우리는 당연히 신의 창조물들인 세계 내의 이성적 존재자들과 관련해 신의 의지에 대해서도 부여한다. 이 조건은 오로지 그로 인해 이성적 존재자들이 목적 그 자체인, 그들의 인격성에 근거하는 것이니 말이다."(155, 156)
 
 
4. 자유와 필연의 양립가능성
(1) 문제 상황
칸트의 자유에 대한 논의는 서양철학사를 꿰뚫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인 자유와 필연, 자유와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한 입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이 문제가 선명하게 제기되는 맥락은 죄와 형벌의 문제에서이다. 즉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벌을 줄 수 없으며, '도덕적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자유가 도덕의 존재근거임을 간파했던 칸트의 주장처럼,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도덕이라는 현상자체도 환상에 불과해진다. 많은 문학작품들이 바로 이 딜레마를 주제로 삼았으며, 『죄와 벌』도 바로 이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도덕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과연 도덕 자체가 원리적으로 존립가능한가를 따지는 도덕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자리잡는다.
결정론이란 간단히 말하면 모든 사건과 사태가 앞선 사건 및 사태에 의해 인과적으로 필연성을 지닌다는 입장이다. 결정, 인과, 필연, 선택의 여지없음(Alternativenlosigkeit) 등의 개념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개념들을 사용하여 우리는 결정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명제로 나타낼 수 있다.
 
-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우연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이 달리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을 가지며 인과법칙에 의해 이 원인의 결과로서 규정된다.
 
결정론에 대립되는 것은 자유론인데 그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유롭다.
- 인간은 행위를 선택할 수 있고, 스스로 결심할 수 있다.
- 인간이 자유롭게 행위할 때에만,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해명을 요구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의 행위에 대해 칭찬이나 비난을 할 수 있고 보상과 처벌도 가능하다. 즉 그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자유 문제에 대해서 이 두 입장은 대립되어 왔다. 근대의 결정론적 자연해석 이전에도, 신학의 차원에서는 신의 전능,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로 제기되었으며, 신학의 옷을 벗으면, 역사의 목적, 법칙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문제로 자리잡기도 했다. 신학적으로는 가롯 유다가 신의 아들을 팔아 넘긴 극악한 죄인인가, 아니면 신의 예정에 의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신의 도구인가 하는 문제로 상징될 수 있는 이 문제는 악과 신의 관계에 대한 변신론적 논쟁의 핵심적인 한 부분을 차지했고, 신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을 양립시키려는 많은 노력들이 신학사를 채워오고 있다.
근세 이후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보편화되면서 이 문제는 신학의 옷을 벗고 철학의 중요한 주제로 대두했으며, 인과론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표명했던 철학자라면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역시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양립불가능론자들은 이 문제를 "자유냐 아니면 결정론이냐"의 양자택일 문제로 파악한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론이 참이며, 따라서 우리는 자유롭지도 않고 자유로울 수도 없기에 도덕적 책임이란 무의미한 개념이다"고 보는 강한 결정론자(hard determinist)와,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결정론이 틀렸다"고 보는 자유론자들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근세이후 확립된 자연에 대한 결정론적인 해석을 부정할 수도 없고, 동시에 도덕적 책임을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은 이른바 약한 결정론자(soft determinist)의 입장에서 양립가능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양립가능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유와 결정론의 의미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결정론도 결정개념, 곧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있고, 이에 따라 자유 개념도 상당히 달라진다. 또 자유의 경우에도 과연 결정론과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유가 <행위의 자유>인가 아니면 <의지의 자유>인가에 따라 서로 다른 모델의 양립가능론이 존재하게 된다.
사실 일반적으로 행위의 자유문제가 의지의 자유문제까지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유롭다는 것은 의지가 자유롭기 위한 충분조건도 아니고 필요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동물이 자기가 달려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의지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누군가에서 행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그의 의지의 자유를 해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행위의 자유는 하기 원하는 것과 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하기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의미하지만, 의지의 자유는 욕구자체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구분해야 할 것은 똑같이 자유라는 말을 쓰더라도 그것이 <무차별성으로서의 자유(liberty of indifference)>를 의미할 수도 있고 <자발성으로서의 자유(liberty of spontaneity)>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필연성과 원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비인과성, 비결정성, 우연성 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강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후자는 강제가 없음을 함축하는 약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2) 흄의 양립 가능론
칸트의 입장을 명료하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비교 대상은 바로 흄이다. 홉즈에서 흄에 이르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거의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흄의 양립 가능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자유 개념과 필연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개념분석이 흄의 경우는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흄은 분명한 개념정의를 통해 양자를 화해시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는 "어느 누구도 나의 정의를 바꾸어서 원인과 결과, 필연성, 자유와 우연이라는 용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 이외에는 이 논거들을 논박할 시도를 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인성론』 407)는 단언 속에 잘 드러난다. 흄은 만일 자유가 필연성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자유는 주장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 문제는 어느 정도 언어적인 문제라고 보고, 분명한 정의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필연에 대한 그의 정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흄에서 필연성은 인과 필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이른바 '규칙성이론'이라고 부르는 흄의 인과론의 틀 내에서 규정된 것이다. 흄에서 필연성이란 '불변적 연속(constant conjunction 또는 constant union)'과 '마음의 추론'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생긴 것이다(400). 즉 필연성은 한 대상이 있을 때 항상 거기에 따라다녔던 다른 것의 존재를 추론하여 넘어가려는 마음의 결심(determination)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흄은 인과필연성을 규정하면서 힘, 효능, 강제 등의 전통적 개념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흄이 인과자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전적으로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에 인과관계는 사실의 문제이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흄의 주장은 데까르뜨적인 엄격한 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물리 세계에서의 인과 설명에 대한 데까르뜨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인과관계는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과는 원인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흄은 세계에 대한 기계론적인 설명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주어진 사건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사건이 결과한다는 믿음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만을 주장했을 따름이다. 이처럼 물리적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논리적 불가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통해 흄은 결정론을 덜 엄격한 것으로 제시한다. 즉 데까르뜨와 흄은 서로 다른 근거에서 서로 다른 결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흄의 자유론은 바로 이런 인과이론의 결과로서 제시된다.
인간의 행위나 정신적인 사건까지를 포함한 모든 현상들이 보편적인 인과 필연성에 따른다는 결정론을 논리적 근거에서는 아니지만 경험적, 사실적 근거에서 굳게 믿었던 흄으로서는 필연성과 인과를 부정하는 강한 의미의 자유는 결정론과 양립할 수 없기에 부정하고, 약한 의미의 자유 즉 자발성으로서의 자유만이 현실적인 자유이며, "우리가 자유롭다" 할 때의 참된 의미임을 주장한다(407). 이 약한 의미의 자유에 대해 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유란 말에 의해 우리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서 행위하거나 행위하지 않는 힘만을 의미할 수 있다." 이때 자유란 <만일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표현될 수 있는 "가언적 자유(hypothetical liberty)"이다(『인간지성론』 95).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를 구분해 본다면, 흄이 주제적으로 다루고 있는 자유는 우리가 하기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느냐의 문제와 연관된 행위의 자유이다. 흄은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변덕스럽고 불규칙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어떤 의지를 원인으로 가지며, 비록 행위자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관찰자들은 보통 어떤 행위를 우리의 동기나 의지로부터 추론해낼 수 있다고 본다. 또 설사 관찰자가 현실적으로는 의식 못하는 경우라도 만약 그 상황의 모든 여건들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행위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흄이 보기에 무차별성으로서의 자유란 단지 원인을 의식하고 있지 못한 것을 원인이 없는 것으로 오해한 데서 생긴 잘못된 개념이며, 행위의 자유는 결코 무차별적 자유가 아니다. 행위의 자유는 내가 의지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기에 결과로서의 행위에 대해 원인으로서의 의지가 전제되어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그 행위의 수행에 강제가 없었다는 의미에서 자발성으로서의 자유이다. 행위에 원인이 있다고 해서 그 원인이 행위를 반드시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흄의 전제는 바로 인과를 강제란 개념없이 불변적 계기로서의 사실적 연관관계로만 본 흄의 결정론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흄은 의지의 자유문제를 따로 떼어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흄이 자유개념을 정의하는 위의 인용문에서 "자유란 말에 의해 우리는 ∼ 만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행위의 자유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흄이 의지라는 현상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자유문제를 따로 다루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의 인식론적 전제 때문이다. 흄은 의지라는 말이 우리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가지는 내적인 인상을 의미한다고 보았고, "이 인상은 정의하기 불가능하고, 더 이상 서술될 필요도 없다"고 했다(399). 따라서 의지에 대한 인상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한 분석이 불가능한 단순인상이기에 의지의 본성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고, 행위의 자유를 주요 문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흄에게서 남은 문제는 행위의 자유가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인 칭찬이나 비난의 가능성, 그리고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흄은 결정론이 윤리적인 문제를 파괴시킴으로써 종교와 도덕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자유론자들의 비판에 대해, 자신이 주장하는 결정론은 종교와 도덕에 전혀 무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익을 주며 종교와 도덕이 존립하기 위해 필수적이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409, 410). 행위의 자유가 도덕적 책임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론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행위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가 결정론과 양립되지 않는 강한 의미의 자유라면, 그 행위는 원인 없이 우연히 일어난 것인데, 만약 행위자의 인격이나 기질 속에 어떤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우연한 행위라면, 비록 그 행위 자체는 비난받을 만하고 도덕과 종교의 규율에 반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행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411). 나아가 우리가 일종의 예방주의적 관점에서 서서 도덕적 칭찬과 비난을 궁극적으로 행위자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시도로서 간주할 경우에도, 결정론의 타당성을 전제하지 않고 자유로운 행위를 우연적인 행위와 동일시한다면, 도덕적인 칭찬이나 비난이 주는 영향력을 행위의 원인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상벌에 대한 종교적 신조들은 무의미해지고 만다(『인간지성론』 97, 98). 이런 두 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흄은 자유를 책임의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는 자유론자들을 비판한다.
흄의 양립가능론은 물론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논의의 연결을 위해 그 중 하나만 들어보면, 흄은 행위의 자유만을 다루고 있기에 자유와 필연,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충분한 논의로서 불충분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외면적인 행위에 대한 책임만을 다루고 있지 내면적으로 하려고 의지하는 것에 대한 책임문제는 밝혀주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자유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해체시켜버림으로써 문제를 원점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행위의 자유와 결정론 사이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변은 제시하고 있지만, 의지의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과연 결정론과 어떻게 양립되는지, 없다면 행위의 자유만으로 책임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칸트의 비판은 출발한다. 흄의 자유개념에 따르면 선택한 것을 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전적으로 결정되어져 있는 경우도 자유 속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물도 행위의 자유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되고, 심지어는 칸트가 보기를 들었듯이 태엽에 의해 저절로(자발적으로) 돌아가는 불고기 굽는 기계와 같은 모든 자동기계에 대해서도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의지의 자유문제가 빠진 흄의 논의는 인간을 동물이나 정신적인 자동기계로 해석하게 되어 책임문제에 올바로 접근할 수 없게 됨으로서 "거짓자유(Scheinfreibeit)"만을 다루는 셈이 된다.
 
(3) 칸트의 양립 가능론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288)는 칸트의 유명한 구절은 보통 "이성의 사실"로서 명백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도덕법칙이 존재함을 선언한 말로 읽혀진다. 이때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은 특히 칸트 자신의 전비판기 작업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근세 과학혁명 이후 확립된 자연의 결정론적인 성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늘에 총총한 별이 따르고 잇는 필연적인 자연법칙을 밝혀내는 것이 칸트의 과학적 과제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후반부를 이루는 도덕법칙의 존재는 도덕법칙을 존재가능 하게 하는 근거로서의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칸트의 저 구절은 "자연에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이 지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라는 의미로 읽어서, 자유와 필연, 자유의자와 결정론이라는 철학적 문제에 대한 이른바 약한 양립가능론자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의 '제3이율배반'에서 자유와 결정론이 최소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데, 이런 칸트의 입장을 우리는 '두 세계 양립가능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두 세계는 전통적인 용어로 하자면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이다. 칸트에게서 존재의 세계란 현상으로서의 자연세계이다. 자연세계는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가진다>는 결정론적인 법칙이 지배하는데, 이 법칙은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지성의 원칙으로서 자연현상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이고 근원적인 초월적 자연법칙이기에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다. 이것이 '제2유추의 원칙'에서 증명된 것이다(B232-256). 그러므로 존재 세계, 자연 세계에서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근원적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 무법칙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지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어떤 것을 인정함으로써 지성의 근본 원칙으로서의 인과 법칙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지성은 자신의 근본 원칙과 어긋나는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제3이율배반'에서의 반정립이 자유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당위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성을 이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에 의해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이 세계는 우리의 실천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실천행위는 자연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며, 그런 의미에서 행위는 현상에 속한다.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행위는 항상 선행하는 자연적 조건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 그리고 행위는 물리적, 심리적 강제가 없는 한에서 자발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흄과는 달리 모든 자발적인 행위를 다 자유롭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행위는 자연적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기에 자유로운 행위와 자유롭지 않은 행위의 구분은 그 행위를 일으킨 의지가 자유로우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칸트가 문제삼는 자유는 의지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실천행위를 노동과 도덕행위로 구분해 보는 것이 의지의 자유문제에 관한 칸트의 입장을 부각시키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노동이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노동을 규정하는 준칙은 가언 명령일 수밖에 없다. 즉 <만일 ∼을 원하거든, ∼하라>는 가언적 의지가 노동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을 규정하는 의지는 "절대적 자발성, 완전한 자발성"이라 볼 수 없다. 이 의지는 <만약∼>라는 선행조건에 의해 규정받는 조건적 자발성, 수동적 자발성에 불과한 것으로, 칸트에 따르면 자연법칙을 실천적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덕행위의 경우는 다르다. 진정한 도덕행위를 규정하는 의지는 정언적 의지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선행조건도 전제하지 않는 의지로서 '제3이율배반'에서 규정한 "절대적인 자발성"(B474)이라는 자격을 갖춘 것이다. 칸트가 인간의 의지도 감성의 영향을 받는 감수적 의욕이기는 하지만, 감성이 의지의 작용을 필연적이게 하는 <동물적 의욕>과는 달리, 감성적 충동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실천적 의미의 자유를 가진다고 할 때의 자유는 도덕과 무관한 자유가 아니라 바로 도덕적인 자유를 가리킨다.
칸트가 보기에 이런 도덕적 세계로서의 당위의 세계가 존립하면서 완전한 자발성으로서의 도덕적인 의지의 자유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 때문이다. 초월적 주관으로서의 인간의 지성이 현상에 속하지 않듯이, 인간의 이성은 어떠한 감성적 제약에서도 벗어나 있기에 현상자체는 아니지만 현상 속에서 도덕적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성을 갖는다. 칸트는 이성을 계산 능력이 아닌 동기 부여 능력, 법칙 부여 능력으로 본다. 이성은 단순한 추리기제가 아니라 최고선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도덕적 가치를 할당하고, 도덕적 평가의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자유란 존재의 법칙으로부터의 단순한 자유를 의미할 수 없다. 즉 무차별성으로서의 자유는 올바른 자유가 아니다. 자연의 결정론에서 벗어나 있음의 상태를 넘어서서 이성이 스스로 부과한 당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의지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칸트에서 결정론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자유는 이제 자율로서 필연과 모순이 아닐 뿐 아니라 필연적인 법칙과 결합하여 "자기강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따라서 칸트의 경우 자유와 필연이 관계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지게 된다. 사실 필연성과 자유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함으로서 서로 독립적으로 서로 방해하지 않고 존립할 수 있는 반면, 당위 필연성은 자유에 근거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는 모든 필연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성격을 넘어서서 자연필연성을 벗어나기 위해 도덕 필연성에 스스로 복종함이라는 모순적 성격을 갖게 된다.
 
5. 자유 개념의 확장: 역사 철학
도덕 철학에서 주된 문제였던 자유 개념은 사회적 맥락이 첨가된 역사철학에서 다 구체화되고 풍부하게 논의된다. 칸트에 있어서 역사철학은 자연과학과 도덕성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서 그의 전 철학적 작업의 실천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칸트의 역사철학은 역사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실현에 대한 문제이다. 인간의 외적인 자유가 실현되는 영역으로서의 정치와, 내적인 자유가 실현되는 영역으로서의 도덕이 동시에 문제가 되며, 따라서 역사 철학은 정치 철학과 도덕 철학을 함축하게 된다. 칸트의 역사 철학은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전체적으로' 고찰하여 자유의 법칙적인 도정을 발견함으로써 개인에 있어서는 무법칙적인 것을 전체적인 인류에 있어서는 '법칙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서 구성하는 작업이다.
우선 역사 철학에서는 자유의 개념이 외적 자유로까지 넓어진다. 특히 계몽과 연관해서 이 외적 자유는 중요하게 부각된다. 칸트는 계몽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어렵고 사회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율성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칸트에게도 사회적 현실이 인간의 현실을 규정한다는 인식은 변혁의 문제에 직면해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칸트에 있어서 사회적 계몽의 전제 조건은 바로 자유이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중(Publikum)이 스스로 계몽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며, 만일 공중에게 자유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거의 필연적이다." 칸트는 자유 중에도 특히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들고 있다.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항상 자유로워야만 하며 이것만이 사람들 사이에서 계몽을 성취할 수 있다."(Ⅷ-37) 즉 칸트는 공표의 자유, 의사소통(Kommunikation)의 자유를 계몽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만 계몽의 정신은 보급될 수 있고 국가의 주권자에까지 영향을 미쳐 실제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는 계몽을 가능하게 하고, 계몽은 다시 자유를 확대시킨다. 계몽된 인간은 역사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계몽, 즉 자유의 정신을 보급한다. 그리고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계몽을 막고, 나아가 역사의 진보를 막는 외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 외적인 장애물이-현실적으로 보통 그렇듯이-지배 권력일 경우 진보를 이루기 위해 지속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칸트는 비록 프랑스 혁명을 찬양하고 또한 혁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역사의 진보를 위한 수단의 선택에 있어서 분명히 개혁을 다 선호한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개혁은 본질적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따라서 계몽된 인간이 진보의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권자가 법을 준수하고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문제가 있을 때 주권자의 판단을 고치기 위해 충고하고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계몽의 정신이 "점차로 왕의 옥좌에까지 이르러 그의 통치원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있어서 '공표의 자유'가 바로 개혁의 원리이다. 시민은 주권자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한에서 주권자를 비판하고 그에게 충고할 권리를 갖는다. 칸트에 있어 공표의 자유는 국민이 정치권력에 대해 갖는 유일한 합법적 무기이다.
이런 공표의 자유는 공지성(Publizität)의 원리에 의거한다. 공지성의 원리는 『영구평화론』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형태로 설명되고 있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한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항상 자유로워야만 하며 이것만이 사람들 사이에서 계몽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계몽의 진보를 현저하게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는 종종 아주 협소하게 제한되어도 무방하다"(Ⅷ-37)고 한다. 이성의 공적사용은 독자를 이루고 있는 전 공중 앞에서 학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문필활동을 말한다. 이성의 사적 사용은 자기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직무에 있어서 자기의 이성을 사용할 때를 말한다. 칸트에 의하면 공표의 자유는 이성의 공적 사용에 근거해야 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서 공공적 계몽이 가능해지고, 이로써 통치자와 국민이 상호영향을 주어 서로를 개혁시키는 과정에 의해 실제의 권위를 전복시키지 않고도 정치적 변혁이 가능해진다. 반면에 이성의 사적 사용은 위험시된다. 우리에게 맡겨진 직책과 책임을 수행하면서 일상적으로 우리의 이성을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민적 질서를 해치게 되므로 전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칸트는 생각한다. 따라서 진보는 기존 공권력의 안정과 유지 속에서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여론이 형성되고, 그 여론이 주권자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은 "원하는 만큼, 원하는 것에 대해 따져라. 그러나 복종하라!""(Ⅷ-41)는 원칙을 준수하는 한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사적 사용에 대한 금지는 공표의 자유를 학문적 영역에서의 정신적인 차원으로 한정시키고 있기에, 이는 모든 비판적 사유의 힘이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영역에서 無力化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인 힘을 갖지 못한 비판이 주권자를 자극하여 개혁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는 칸트의 견해는 그 시대의 한계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또 칸트에 의하면 개혁은 공표의 자유가 주어지는 한에서 가능한데, 그렇다면 공표의 자유가 없을 경우는 어떻게 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모든 개혁을 위한 출발점으로 공표의 자유가 확보되어야 한다면, 공표의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공표의 자유를 얻기 위한 개혁은 만일 일어날 수 있다면 역시 또 다른 공표의 자유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자유가 가능하다는 식의 순환론에 빠진 측면도 있다.
그런데 칸트 역사 철학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칸트가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루었던 도덕성의 문제를 역사의 중요한 차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역사의 진보가 가지는 두 차원을 '법률적·시민적 상태'와 '윤리적·시민적 상태'로 구분한다. "법률적·시민적(즉 정치적) 상태는, 그들이 공적인 법률(모두가 강제법인) 밑에 공동체적으로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이다. 윤리적·시민적 상태(Ein ethisch-bürgerlicher Zustand)는 그 안에서 인간이 그 같은 강제에서 자유로운, 즉 단순한 덕의 법칙(Tugendgesetzen) 밑에서 결합하는 상태이다."(Ⅵ-95) 그리고 이 양자에 '법률적 자연상태' (juridische Naturzustand)와 '윤리적 자연상태'(ethische Naturzustand)를 대립시킨다. 법률적·시민적 상태는 법률적·정치적 자연상태에서 한 걸음 진보한 형태로, 즉 정치적 진보가 한계를 가진 채이긴 하지만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법률적·시민적 상태에서는 국가라는 외적 강제가 형성되어 외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법률은 호혜성(reciprocity) 원리에 의해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갖는 한에서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진보에 의해서 합법성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내면적인 도덕성이 성취된 것은 아니다. 법률적 시민적 상태에서는 타율적인 허가법과 금지법만이 존재하지 자율적인 의무 법칙은 존재하지 않기에 결코 구성원들의 내면적 일치, 즉 행위 동기의 일치가 확보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즉 결코 덕의 법칙의 지배 하에 있지 않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는 모든 정치적 시민들은 윤리적 자연상태 안에 있다"(Ⅵ-95)고 칸트는 주장한다.
"법률적 자연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인 것처럼 윤리적 자연상태는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악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받는 상태인 것이다."(Ⅵ-97) 이런 윤리적 자연 상태는 '이성의 사실'로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도덕법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므로 인간은 윤리적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덕의 법칙에 따라 서로를 목적으로 대우하며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 정언 명령에 의해 서로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칸트는 이렇게 도덕법칙 밑에서 덕의 원리에 의해 결합된 인간들의 결합을 '윤리적 공동체(ethische gemeine Wesen)'(Ⅵ-94)라고 부른다.
칸트에 의하면 역사 진보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윤리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윤리적 자연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만일 진실로 인간에 있어서 악의 방지와 선의 촉진을 목적으로 하는 결합을, 즉 힘을 합쳐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 즉 지속적이며 항상 확대되며, 오직 도덕성의 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수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개인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무리 힘쓴다고 해도 끊임없이 인간을 자기의 지배 밑에 두려고 하는 악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 원리의 지배는 인간이 그를 위하여 애쓰는 한에서, 다시 말하면 도덕 법칙에 따르고, 또 그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의 건설과 확장을 통해서 밖에는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를 인간의 주위에 보존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인류 전체에게 부과된 과제이며 의무인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악의 원리에 대한 선의 원리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Ⅵ-94) 이러한 도덕적 진보는 정치적 진보와 같이 가시적인 체제의 변화로 파악될 수 없다. 도덕적 진보는 도덕성의 원리에 근거하여 정언 명령에만 따르는 인간 상호간의 태도의 체계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며 윤리적 공동체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공동체란 무엇인가? 칸트에 의하면 이 공동체는 "특수한 결합의 윤리(덕)"을 지닌 것으로서 "단지 도덕법칙 밑에서만 형성되는 인간들의 결합이다."(Ⅵ-94,95) 칸트는 이를 윤리적 시민사회(ethische bürgerliche Gesellschaft), 또는 윤리적 국가(ein ethischer Staat), 덕의 왕국(ein Reich der Prinzips), 선의 원리의 왕국(ein Reich des guten Prinzips)이라고도 부른다. 이 윤리적 공동체의 개념은 이미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목적의 왕국(ein Reich der Zwecke)'이란 개념을 통해 제시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다음과 같은 법칙에 종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 각자가 자기 자신과 딴 이성적 존재자를 단순히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 한다는 법칙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통의 객관적 법칙에 의한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이 생긴다. 즉 왕국이 생긴다. 그리고 이 객관적 법칙은 목적이요 또 수단인 이성적 존재자 상호간의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왕국은 목적의 왕국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왕국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지만)"(Ⅳ-433) 이 목적의 왕국에서는 개인의 경향성을 억제할 어떠한 외적인 입법도 필요 없다.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때 항상 동시에 마음 속에 있는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목적과 공동체의 목적은 완전히 통일되어 있고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동 목적만을 공유한다. 윤리적 공동체는 바로 이 목적의 왕국이다. "윤리적 공동체는 신의 명령 밑에 있는 백성, 즉 신의 백성이면서 그와 동시에 또한 덕의 법칙에 따르는 백성"(Ⅵ-99)이며, 즉 "그의 입법이 단지 내면적인 덕의 법칙 밑에 있는 공화국, 즉 선한 행위를 위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신의 백성"(Ⅵ-100)이다.
역사의 도덕적 진보의 목표인 윤리적 공동체는 정치적 공동체와 비교해 보면 그 모습이 더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윤리적 공동체는 정치적 공동체와 두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로, 앞에서 윤리적 공동체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미 드러났듯이 정치적 공동체는 강제적 법률에 근거하는 반면 윤리적 공동체는 강제적 법률에 근거할 수 없다. "윤리적 공동체는 이미 그 개념 안에 강제로부터의 자유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Ⅵ-95) 정치적 공동체에서는 각 개인의 자유를, 그것이 보편적 법칙에 따라서 다른 개인들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다는 조건 밑에 제한한다는 원리에서 출발하기에 전체로서 결합된 다수의 보편 의지가 법적인 외적 강제를 설정한다. 그러나 윤리적 공동체에서는 결합된 다수로서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보편 의지에 따라 입법하는 게 아니라, 상위자 ― 칸트는 여기서 신을 상정하고 있다 ―의 의지로부터 근원적으로 출발되어 이미 주어진 윤리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지배원리는 타율이지만 윤리적 공동체의 지배원리는 자율이며, 정치적 공동체의 근거가 외적 강제라면 윤리적 공동체의 근거는 내적 동기이다.
둘째로, "덕의 의무는 전 인류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윤리적 공동체의 개념은 모든 인류의 전체라는 이념에 관련되어 있고, 바로 이 점에서 윤리적 공동체는 정치적 공동체와 구별되는 것이다."(Ⅵ-96) 즉 칸트가 들고 있는 두 번째 차이점은 각 공동체의 법 체계가 적용되는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정치적 공동체의 법은 한 국가 내에 적용되며 따라서 그 실현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덕의 법칙은 보편성을 가진 젓으로 국가적 경계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정치적 신분에도 관계없이 인간인 한에서는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윤리적 공동체의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전 인류에까지 확대된다. 윤리적 공동체를 전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도덕적 이상이다. 이 이상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본성으로 인해 실현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더라도 인간은 윤리적 공동체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칸트에 의하면 "오히려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조건 밑에서만 그는 보다 높은 지혜가 그의 선의의 수고를 완성시켜줄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Ⅵ-101)
칸트에 있어서 역사의 도덕적 진보는 바로 전 인류에 대한 윤리적 공동체의 확대 과정이며 기존 사회를 도덕적 전체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도덕교육과 이성종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몽을 통해 정언명령의 지배력을 확대해 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인간의 내적인 자유와 자율이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4> 최고선
1.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실천 이성의 대상, 객관은 최고선이다. "순수 실천 이성으로서 이성은 (경향성과 자연적 필요에 기인하는) 실천적으로-조건지워진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조건자를 찾는바, 그것도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가 아니라, 이것이 설령 (도덕 법칙에서) 주어졌다 할지라도,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의 무조건적 총체를 최고선의 이름 아래서 찾는다."(194) 물론 이때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선이 실천이성을 규정하는 규정 근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실천 이성을 규정하는 근거는 오직 도덕 법칙일 따름이다. 그러나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실천이성도 객관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그 객관이 최고선인 것이다.
 
"도덕 법칙은 순수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이다. 그러나 도덕 법칙은 순전히 형식적이므로 (곧, 준칙의 형식만을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적인 것으로 요구하므로), 그것은 규정 근거로서 모든 질료를, 그러니까 의욕의 모든 객관을 도외시한다. 그러니까 최고선은 항상 순수 실천 이성의, 다시 말해 순수 의지의 전 대상이겠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 의지의 규정 근거로 간주될 수는 없다. 도덕 법칙만이 저 최고선과 그것의 영향 내지 촉진을 객관으로 삼게 하는 근거로 보아져야 하는 것이다. 이 주의는 윤리적 원리들을 규정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경우에는 ― 이런 경우에서는 아주 작은 오해조차도 마음씨를 그릇되게 만든다 ― 매우 중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석학에서 알아냈던 바는, 만약 우리가 도덕 법칙에 앞서 어떤 객관을 선의 이름 아래 의지의 규정 근거로 취하고, 이로부터 최상의 실천 원리를 도출한다면, 그때 이것은 언제나 타율을 불러 들여와 도덕 원리를 떼밀어내는 것이 될 터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최고선의 개념 안에 도덕 법칙이 최상의 조건으로서 이미 함께 포함되어 있다면, 그때는 최고선은 객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개념 및 우리의 실천 이성에 의해 가능한 그것의 실존에 대한 표상이 동시에 순수 의지의 규정 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실제로 다른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이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함께 생각되고 있는 도덕 법칙이 자율의 원리에 따라 의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의지 규정에 대한 개념들의 이 순서를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완전무결한 조화 속에서 서로 병존해 있음에도, 이를 오해하고, 서로 모순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196, 197)
 
그렇다면 이때 최고선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덕과 행복의 일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최고는 최상(最上)을 의미할 수도 있고, 완벽(完璧)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전자는 자체로 무조건적인, 다시 말해 다른 어떠한 것에 종속되지 않는 그러한 조건 (곧, 原本)이다. 후자는 같은 종류의 더 큰 전체의 어떤 부분이 아닌 그런 전체 (곧, 完全)이다."(198) 그런데 "무릇 덕과 행복이 함께 한 인격에서 최고선을 소유하고, 이 경우에도 행복이 (인격의 가치이자 인격의 행복할 자격인) 윤리성에 정비례하는 몫을 가지고서 가능한 세계의 최고선을 형성하는 한에서, 이 최고선은전체, 곧 완전선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도 덕은 언제나 조건으로서 최상선이다. 왜냐하면, 최상선은 자신 위에 더 이상의 조건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항상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는 유쾌한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덕 법칙에 알맞은 거동[태도]을 조건으로 전제하는 것이다."(198) 즉 최고선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최상선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덕을 성취하는 것이 최상선이다. 덕을 성취하는 것이 일단 도덕의 목표이고 덕을 성취하게 되면 최상선에 도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최고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다. 덕에 의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에게 행복까지 따라 올 때 그야말로 제대로 된 완벽한 선이 실현되어 최고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복을 윤리학의 필연적인 요소로서 고수한다. 하지만 칸트는 도덕의 원천을 행복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최상선은 행복이 아니라 도덕성으로서의 덕이다. 더 나아가 도덕성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인간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나. 실제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행복이 행복할 가치와 필연적으로 비례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덕은 최상선을 의미할 뿐 완전한 선, 즉 최고선까지 의미하는 않는다. 최고선은 행복과 도덕성이 일치하는데서 성립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덕에 따라서 보상받는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할 자격이 있음으로서) 덕은 우리에게 오로지 소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의 최상 조건이고, 그러니까 또한 행복을 얻으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의 최상 조건이며, 그러니까 최상선이라는 것은 분석학에서 증명되었던 바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덕이 이성적 유한 존재자인 욕구 능력의 대상으로서의 전체적인 완벽한 선은 아니다. 그런 것이기 위해서는 행복이 추가로 요구되기 때문이며, 그것도 한낱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인격의 당파적 안목에서가 아니라, 세계 내의 인격 일반을 목적 자체로 여기는 무당파적 이성의 판단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필요로 하고, 또한 행복할 자격이 있으나, 그럼에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 ― 우리가 시험적으로라도 이러한 존재자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존재자는 전권(全權)을 가질 터다 ―의 완전한 의욕과는 전혀 양립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198, 199)
 
2. 덕과 행복의 결합
(1) 분석적 결합에 대한 검토 ―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데 행복이 결합될 수 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가능하다. 즉 분석적으로 결합하거나 종합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한 개념 안에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두 규정은 근거와 귀결로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그 통일분석적(곧, 논리적 연결)이거나 종합적(곧, 실재적 결합)인 것으로, 곧 동일율에 따른 것이거나 인과율에 따른 것으로 보아지는 바대로 말이다."(199, 200) 최고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동일률에 따라 분석적인 결합으로 볼 경우에는 "덕과 행복의 연결은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 덕 있으려는 노력과 행복을 얻으려는 이성적 노력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행위가 아니라 완전히 동일한 행위이며, 이때 전자의 기초에는 후자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 외의 다른 어떤 준칙이 놓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인과율에 따라 종합적으로 볼 경우에는 "또 경우에 따라서 저 [양자의] 연결은, 원인이 결과를 낳듯이, 덕이 그 자신에 대한 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행복을 낳는다는 데에 의거한다."(200)
그런데 칸트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두 학파, 즉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모두 적을 덕과 행복의 통일을 분석적으로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양자는 단지 두 개념 중 어떤 것이 더 근원적인 것인지를 보는 관점만 달랐을 따름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고, 스토아는 덕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의 학파들 가운데, 최고선의 개념 규정에서 덕과 행복을 최고선의 서로 다른 두 요소로 인정하지 않은, 그러니까 동일성의 규칙을 좇아 원리의 통일을 구한 점에서 같은 방법을 따랐던 학파가 본래 둘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두 요소 중 기본 개념을 서로 다르게 선택한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으로 이끄는 자기의 준칙을 의식함, 그것이 덕이라 말했고, 반면에 스토아학파는 자기의 덕을 의식함이 행복이라 말했다. 전자에게는 영리함[지혜로움]은 윤리성과 같은 것이었고, 덕에 대해 보다 높은 명칭을 택했던 후자에게는 윤리성만이 참된 지혜였다."(200)
 
칸트에 분석에 따르면 두 입장은 뚜렷이 대비된다.
 
"두 학파가 모두 덕과 행복의 실천 원리가 한 가지임을 캐내려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 동일성을 끄집어내고자 한 방법에서 일치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서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한쪽은 그 원리를 감성적인 면에, 다른 한쪽은 논리[이성]적인 면에, 곧 한쪽은 감각적 요구의 의식에, 다른 한쪽은 실천 이성의 일체 감각적 규정 근거들에 대한 독립성에 두었기 때문이다. 덕의 개념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따르면 이미 자기 자신의 행복을 촉진하라는 준칙 안에 있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행복의 감정은 이미 자기의 덕에 대한 의식에 포함되어 있었다."(201, 202)
 
그러나 이 두 접근은 모두 문제를 가진다. 이들은 모두 전혀 이질적인 개념들을 개념적 차원에서 통일시켜보려고 무리한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 학파 사람들의 명민함이 불행하게도 극도로 이질적인 개념들, 곧 행복의 개념과 덕의 개념 사이의 동일성을 캐내는 데에 사용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결코 통합될 수 없는 원리상의 차이들을 어휘 싸움으로 전환시키고, 그렇게 해서 외견상 단지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진 개념의 통일로 꾸밈으로써 그 차이들을 제거하고자 한 것은 당시의 변증(법)적 정신에게는 어울리는 일이었고, 오늘날에도 때때로 치밀한 사람을 유혹하는 바다."(201)
 
그러나 이렇게 무리한 시도를 하다보니 결국 적절한 통일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칸트가 비판하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한 다른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비록 그 포함하는 것의 일부와 한 가지라고 하더라도 그 전체와는 한 가지가 아니며, 더구나 두 전체는 설령 동일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만약 곧 그 부분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면, 종[種]적으로 서로 구별될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덕은 전체 최고선이며, 행복은 단지 주관의 상태에 속하는 것으로서 덕의 소유 의식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행복이 전체 최고선이며, 덕은 단지 이를 얻기 위한, 곧 이에 이르기 위한 수단들을 이성적으로 사용할 때의 준칙의 형식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202)
 
이 두 학파의 무리한 결합 시도는 근본적으로 덕과 행복의 결합이 분석적이라고 보았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곧, 행복과 윤리성은 최고선의 종적으로 전혀 다른요소들이고, 그러므로 양자의 결합은 (가령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런 그의 태도[거동]에서 순전히 그의 개념들을 분해함으로써 덕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거나, 또는 덕을 좇는 사람이 그러한 태도[거동]에 대한 의식에서 이미 그 事實 自體만으로 자신이 행복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이) 분석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개념의 종합인 것이다."(203)
 
그런데 이론 영역에서는 종합적이라는 것은 몇몇 선험적 종합판단이외에는 경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이 결합은 선험적인 것으로, 그러니까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고, 그러므로 최고선의 가능성은 어떠한 경험적 원리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개념의 연역은 초월적이지 않을 수 없다. 최고선을 의지의 자유로부터 산출하는 것, 그것은 선험적으로 (도덕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의 가능 조건도 단적으로 선험적인 인식 근거들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다."(203)
 
(2) 종합적 결합 ― 실천이성의 이율배반과 그 지양
이로써 최고선은 덕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결합한 것이되 그 결합은 종합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최고의, 우리에게 실천적인, 다시 말해 우리 의지에 의해 현실화되는 선에서 덕과 행복은 필연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한 쪽이 그에 속하는 일 없이 다른 한쪽이 실천 이성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무릇 이 결합은 (모든 결합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다. 그런데 이 주어진 결합은 바로 앞서 지적한 것처럼 분석적일 수 없으므로, 종합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도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 선, 다시 말해 행위에 의해 가능한 것에 관계하기 때문이다."(204)
 
그런데 이렇게 종합적 결합으로 보아 둘의 관계를 인과 연결로 볼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행복이 덕의 원인이거나 덕이 행복의 원인인 경우 두 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두 가능성을 검토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양자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에 대한 욕구가 덕의 준칙들을 위한 동인[動因]이거나, 덕의 준칙이 행복을 낳는 원인이거나 일 수밖에 없다. 첫째 경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분석학에서 입증됐듯이) 의지의 규정 근거를 자기 행복의 추구에 두는 준칙들은 결코 도덕적일 수가 없고, 아무런 덕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경우 또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계 내에서의 원인들과 결과들의 모든 실천적 연결은 의지 규정의 성과로서 의지의 도덕적 마음씨에 정향[定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법칙들에 대한 지식 및 이것을 그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자연적 능력에 정향되어 있고, 따라서 어떠한 필연적인, 최고선을 위해 충분한, 덕과 행복의 연결은 세계에서 도덕 법칙들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기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이 연결을 자기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는 최고선의 촉진은 우리 의지의 선험적으로 필연적인 객관이고, 도덕 법칙과 불가 분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첫째 경우의 불가능성은 반드시 둘째 경우의 거짓됨을 증명하는 바다. 그러므로 만약 최고선이 실천 규칙들에 따라서 불가능하다면, 이를 촉진할 것을 명령하는 도덕 법칙 또한 환상적이고, 공허한 상상된 목적들 위에 세워진, 그러니까 그 자체로 거짓된 것일 수밖에 없다."(204, 205)
 
이렇게 두 가능성이 모두 불가능하게 됨으로서 실천이성은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율 배반을 해소할 가능성은 없는가? 칸트는 인간이 현상에 속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예지체일 수 있다는 두 세계론을 기반으로 이 이율배반을 지양할 실마리를 찾는다.
 
"두 명제들 중 첫째의 것, 곧 행복을 얻으려는 노력이 덕 있는 마음씨의 근거를 낳는다는 명제는 절대적으로 거짓이다. 그러나 둘째의 것, 곧 덕 있는 마음씨는 필연적으로 행복을 낳는다는 명제는 절대적으로 거짓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감성 세계에서의 원인성의 형식으로 보아지는 한에서, 그러니까 내가 감성 세계에서의 현존을 이성적 존재자의 유일한 실존 방식으로 받아들일 때만, 그러므로 오직 조건적으로만 거짓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현존재를 오성 세계 내의 예지체로도 생각할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도덕 법칙에서 (감성 세계 내의) 나의 원인성의 순수 지성적 규정근거를 또한 가지므로, 원인으로서 마음씨의 윤리성이 감성 세계에서의 결과로서 행복과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자연의 예지적 창시자에 의한),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연관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한낱 감관의 객관인 자연에서의 이러한 결합은 다름 아니라 우연적으로밖에는 일어날 수가 없고, 최고선에 충분할 수가 없다."(206, 207)
 
이렇게 최고선의 가능성이 이제 이 현상계에서 찾기는 힘들어 진다. 결국 최고선은 현실 세계 속에 실현될 목표가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이성에 의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그들의 도덕적 소망의 목표로 세워진 최고선의 가능성을 그토록 먼 곳에서, 곧 예지적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안 마당에서, 고대와 근대의 철학자들이 아주 적절한 비례로 덕과 결합돼 있는 행복을 이미 이승의 생활에서 (곧, 감성 세계에서) 발견했다거나 의식했다고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207, 208)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자는 모두 덕의 의식에서 생기는 행복을 찬양했다. 우선 '쾌락'이라는 표현을 쓴 에피쿠로스도 그 내용은 전혀 저속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리사욕적이지 않은 선의 실행을 가장 깊은 기쁨을 향유하는 방식이라 보았고, 가장 엄격한 도덕 철학자가 요구함직한, 경향성들의 절제와 제어가 그의 즐거움 ― 그는 이 말을 항상 기쁜 심정의 뜻으로 썼다 ―의 기획에 속했다."(208) 이 즐거움에다가 동인을 둔 에피쿠로스의 입장을 비판한 스토아의 주장은 정당했다고 칸트는 평가한다. 칸트는 에피쿠로스는 일종의 순환론, 혹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는 그가 덕에의 동기를 비로소 마련해 주고자 했던 그런 인격들 안에서 덕 있는 마음씨를 이미 전제하는 잘못에 빠졌기 때문이다(사실 정직한 사람은 먼저 자기의 정직함을 자각하지 못하면, 행복함을 발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저런 마음씨에서는 그가 위법했을 때에 자기 자신의 사고 방식에 의해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에게 할 터인 비난과 도덕적인 자기 저주가, 보통의 경우에는 그의 상태가 보유함직한 쾌적함의 향유를 빼앗아버릴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현존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러한 마음씨와 사고 방식이 무엇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가?' 이다. 이러한 물음 이전에는 도대체가 도덕적 가치 일반에 대한 감정이 주관 안에서 마주쳐지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인간은, 만약 그가 덕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의 모든 행위에서 그의 정의로움을 자각함이 없이는, 그의 생이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생의 물리적 상태에서 그에게 행운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208, 209)
 
칸트는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상황이 사취의 오류(詐取 誤謬)를 일으켜서 즐거움이 도덕의 근거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상황이라고 분석한다.
 
"도덕적 마음씨는 직접적으로 법칙에 의해 의지를 규정한다는 의식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무릇 욕구 능력을 규정하는 의식은 항상 그에 의해서 산출되는 행위에 대한 흡족함의 근거이기는 하나, 그러나 이 쾌, 이 흡족함 자체가 행위의 규정 근거는 아니고, 오히려 순전히 이성에 의한 직접적인 의지의 규정이 쾌감의 근거이고, 저 규정은 욕구 능력의 순수한 실천적인, 비감성적인 규정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규정은 내적으로는 활동을 촉진함에 있어서, 욕구된 행위에서 기대되는 쾌적함의 감정이 미치는 효과와 똑같은 효과를 미칠 터이므로, 우리는 쉽게도, 이른바 감관의 (여기서는 내감의) 착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듯이, 우리 자신이 행하는 것을 우리가 한낱 수동적으로 느끼는 어떤 것으로 여기고, 도덕적 동기를 감각적 충동으로 받아들인다. 순수한 이성 법칙에 의해 행위들이 직접 규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본성에 있어서 매우 숭고한 것이며, 이렇게 의지를 지성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일을 감성적인 일로, 그리고 특수한 감성적 감정 ― 지성적 감정은 모순일 터이니까 말이다 ―의 작용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사기이기도 하다."(210)
 
칸트에 따르면 분명히 도덕법칙을 따를 때 우리에게는 어떤 기쁨이 생긴다. 이 기쁨은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지 도덕을 규정하는 근거는 아니다. 그 기쁨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은 칸트에 따르면 "자기만족"이다. 이것은 "행복이라는 말처럼 향유를 표시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 실존에 흡족함이라는, 덕의 의식에 필연적으로 수반해야 하는 행복 비슷한 것을 지시하는 말"로서 "이 말은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항상, 아무런 것도 필요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 실존에 대한 소극적인 흡족함만을 시사한다."(211, 212) 이러한 만족은 "순수 실천 이성이라는 이 능력에 대한 의식이 행실(덕)을 통하여 자기의 경향성들을 지배한다는 의식을, 그러므로 이로써 경향성들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의식을, 따라서 경향성들에 수반하는 불만족의 의식을, 그러므로 그의 상태에 대한 부정적인 흡족을, 다시 말해 그 원천에서 자기 인격에 대한 만족인 그런 만족을"(213, 214) 낳게 됨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칸트는 최고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실천적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의 이 같은 해결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 실천 원칙들에서는 윤리 의식과 그 윤리의 결과로서 그에 비례하는 행복에 대한 기대 사이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합은 적어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그러나 그렇다고 물론 그것이 인식되거나 통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행복 추구의 원칙들이 윤리를 낳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최고선의 첫째 조건인) 최상선은 윤리성을 형성하고, 반면에 행복은 최상선의 두 번째 요소를 형성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은 단지 도덕적으로 조건 지워진,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윤리성의 결과이다. 이 [행복의 윤리성에의] 종속에서만 최고선은 그것을 필연적으로 가능하다고 표상할 수밖에 없는 순수 실천 이성의 전 객관이다. 왜냐하면, 최고선을 낳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라는 것이 순수 실천 이성의 명령이기 때문이다."(214)
 
3. 최고선 개념의 사회 역사 철학에의 확장
칸트는 저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이는 물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선험적인 구성작용에 의해 대상세계가 인간사유의 보편적인 형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이다. 칸트는 실천적으로도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위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세계는 보편적인 인과율에 따르는 순수하게 기계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 속에서 도덕적 의도 및 목적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이성적 체계를 발견한다. 이런 내적인 체계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게 되며 또한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킨다. 자연은 기계론적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서는 목적론적인 의미가 없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실천만이 목적을 부여한다.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오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부여하는 목적이 자연 속에서 실현되기를 요구하고 세계가 그 목적에 따라 변혁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이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도덕적, 또는 목적론적 이성이 바로 의지의 원리이다. 세계의 목적은 세계자체를 넘어서 있는 무엇이며, 성취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은 실천이성으로서 작용하는 인간의 의지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의해 구성적 이성(constitutive reason)을 부여받은 능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발성은 자연에 논리적인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자연자체를 가능하게 하기에 형이상학적이다. 인간이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힘을 갖는다. 그러나 이론영역에서의 세계구성은 아직 세계의 실제적인 변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론이성의 능동성(activity)은 주어진 세계를 다른 세계로 변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주어진 객관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론이성의 구성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론이성은 '실천이 없는 자발성(spontaneity without praxis)'이다. 칸트는 이를 이성적 행위의 영역에로 확장시킴으로써 이론이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내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간다. 이론적 영역에서 이성은 자연을 구성하는 자발성에 머물러 있었으나 실천의 영역에서는 행위의 원리로서, 주어진 자연에 도덕적 목적과 관심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실천으로서의 자발성(spontaneity as praxis)'이 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 이성적 실천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성적 실천이 변혁활동을 하는 구체적인 장이 바로 사회이며 역사이다. 이러한 이성적 실천은 외적인 영역에서 정치체제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며 이 진보의 한계를 궁극적으로 극복하는 도덕성의 진보를 또한 이루어 나간다.
실천의 영역에 대한 칸트의 철학적 탐구는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 단계는 선의지의 구조를 검토하여 그 절대적 원리를 정초함으로써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확립하는 작업이며, 둘째 단계는 첫째 단계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덕적 의지의 전체적 대상을 규정하는 작업, 즉 도덕행위(=실천)의 결과로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칸트가 둘째 단계에서 제시하는 실천이성의 전체적·무제약적 대상은 바로 최고선(das höchste Gut)이다. 최고선이야말로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이며, 따라서 역사의 목적은 이 최고선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분석했듯이 칸트 윤리학에 있어서 최고선은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최상선(das oberste Gut)이다. 이는 바로 덕의 실현을 말한다. 즉 도덕법칙으로 제시된 정언명령을 순전히 도덕적인 동기에 의해 의무로부터(aus Pflicht)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최상선의 실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덕을 가짐으로써 동시에 행복을 누리게 될 때 전체적 완전선(das ganze und vollendete Gut)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성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행복이 수반될 때 우리는 최고선을 이룰 수 있다. 행복이 최고선의 둘째 조건이다. 즉 최고선은 덕과 행복의 일치(die Identität von Tugend und Glückseligkeit)를 말한다. 사회 역사 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최고선이란 역사 속에서 도덕적 의지와 경험적 현실 사이의 구체적인 종합을 통해 성취되는 것으로서의 세계의 완성된 상태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도덕법칙에 따라서 선하게만 행동하며, 그런 선한 행위가 희생당하거나 고통 속에 처하지 않고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행복을 필연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체제가 갖추어진 사회를 말할 것이다. 정치적 진보는 최대한의 외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사회 체제로의 발전이기에 행복의 보장을 목표로 삼으며 도덕적 진보는 덕의 법칙이 지배하는 윤리적 공동체의 확대과정이다. 덕과 행복의 일치로서의 최고선은 따라서 정치적 진보와 도덕적 진보가 종합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 가시적인인 정치적·법적 영역과 불가시적이고 내면적인 인 도덕적 영역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어떤 한 영역에서의 진보만으로는 진보의 완성, 최고선의 실현을 바랄 수 없다. 정치적 공동체와 윤리적 공동체는, 즉 외적인 체계와 내적인 체계, 정치적인 요소와 도덕적 요소는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서는 모두 필요하며, 나아가 양자는 서로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정치적 체제는 원리상(in principle) 또는 선험적으로(a priori) 도덕성에 의존한다. 도덕성은 정치적 체제 속에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덕적 체계는 실제적으로(pragmatically) 또는 경험적으로(empirically) 정치적 질서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뛰어난 개인이 어떤 사회 속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사회질서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무정부상태의 자연상태가 만연되어 있다면 실제로 사회전체를 도덕적으로 진보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 경우 도덕적 진보가 정치적 진보보다는 더 근원적이며, 최고선을 이루는 첫째 조건인 최상선을 확보하는 요소이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도 순수실천이성의 왕국과 그 정의를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는 저절로 목적(영구평화의 축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Ⅷ-378) 즉 이념적으로는 도덕적 진보가 궁극적이며 더 근원적이다. 이 점은 앞에서 정치적 진보의 한계를 밝히면서도 이미 암시되었던 바이다.
그러나 칸트는 현실적으로 개인적 차원에서는 어떠하든지 간에 사회적·역사적 차원에서의 도덕적 진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진보가 어느 단계에까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바로 전체적인 조화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외적인 질서와 조화를 먼저 확보함으로써 전체적인 진보를 향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는 "사실 정치적 공동체의 기반 없이는 도대체 윤리적 공동체는 인간에 의하여 실현될 수 없다"(Ⅵ-94)고 하며, 또한 『영구평화론』에서는 "도덕성이 좋은 국가체제를 수립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좋은 국가체제에서 한 민족의 훌륭한 도덕적 교양을 기대할 수 있다"(Ⅷ-366)고도 한다. 정치적 진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사악성을 억제시켜 실제적 전쟁상태로서의 정치적 자연상태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상태를 윤리적인 자연상태로 한정시킨다. 즉 법의 강제 아래에서 인간의 사악하고 불법적인 경향이 적대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을 막음으로써 인간에게 잠재해 있는 도덕적 경향이 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으로 발전하도록 도움을 준다. 따라서 정치적 진보에 의해서 도덕에로의 큰 발전(아직 도덕적 발전이라 할 수는 없지만)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참된 정치는 먼저 도덕에 복종하기 전에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Ⅷ-380) 라고 단언한다. 이는 이미 영구평화를 위한 국제연맹은 도덕적 진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바와 일치한다. 실로 영구평화는 도덕적 진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록 행복의 관점에서 정치적인 면을 고려하여 설정된 목표이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정치적 최고선'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정치적 최고선과 도덕적 최고선은 동시에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외적·정치적으로는 영구평화가 지속되고 서로를 목적으로 간주하는 이성적인 사회체제가 확립되어지고, 내적으로는 그러한 사회체제를 자발적으로 의무감에서 유지시켜 나가는 윤리적 공동체가 형성될 때 최고선은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인 체제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그 여건 속에서 도덕적 진보가 가능해져서, 궁극적으로는 내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체계가 외적으로 구체화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5> 실천 이성의 요청
1. 요청이란 무엇인가?
(1) 최고선의 필연적 전제
최고선을 덕과 행복의 결합이며, 이 결합은 종합적인 것이다. 그런데 "조건 지워진 것과 그것의 조건과의 그러한 결합 가능성은 전적으로 사물들의 초감성적 관계에 속하는 것이고, 그러한 가능성은, 이 이념의 실천적 결과가, 곧 최고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이 설령 감성 세계에 속한다 할지라도, 감성 세계의 법칙에 따라서는 전혀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215). 따라서 "우리는 저 가능성의 근거들을, 첫째로 직접적으로 우리의 지배력 안에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고 둘째로 이성이 (실천 원리들 면에서 볼 때 필연적인) 최고선을 가능하게 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의 보완으로서 우리에게 제시는 하지만, 우리의 지배력 안에 있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찾아야 한다. 순수 실천이성의 요청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에서 나온 결과이다. 칸트는 최고선의 필연적인 전제들을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들이라고 부른다. 실천 이성의 요청은 최고선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실천 이성의 의미 요구를 충족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하여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정해야 하는 대상들로 생각한다.
 
"요청들은 모두 도덕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도덕의 원칙 [자신]은 요청이 아니라, 그를 통해 이성이 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는 법칙이다. 이러한 의지는 그것이 바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순수 의지로서 그의 훈계 준수의 필연적 조건들을 요구한다. 이 요청들은 이론적 교리[敎理]들이 아니라, 필연적인 실천적 고려에서의 전제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변적 인식을 확장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변 이성의 이념들에게 일반적으로 (그것들의 실천적인 것과의 관계를 매개로) 객관적 실재성을 주며, 그것들에게 그 밖의 경우에서는 감히 그 가능성조차 주장하려 들지 못했을 개념들로서의 권한을 부여한다.
이것들은 [영혼의] 불멸성·적극적으로 (예지의 세계에 속하는 한에서의 한 존재자의 원인성으로) 보아진 자유·신의 현존의 요청들이다. 첫째 요청은 도덕 법칙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시간의 길이라는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조건에서 나온다. 둘째 요청은 감성 세계로부터의 독립성과 예지 세계의 법칙에 따라 자기의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 자유의 필연적 전제에서 나온다. 셋째 요청은 최고의 독립적인 선의 전제 아래 최고선이 있기 위한 그러한 예지 세계를 위한 조건,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의 필연성에서 나온다."(238, 239)
 
그렇다면 '요청'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요청'이란 표현을 통해 칸트가 지칭하고자 하는 바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요청이라는 말로써 이론적인 명제, 그러나 그것이 선험적인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실천 법칙과 뗄 수 없게 결부되어 있는 한에서, 그러한 것으로 증명될 수는 없는 그런 명제를 지칭한다."(220)
 
"그러나 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公準]이라는 표현은, 만약 사람들이 이 말을 순수 수학의 요청[公理]들이 갖는, 그래서 명증적인 확실성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로 혼동한다면, 가장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겠다. 그러나 후자[수학의 요청들]는 우리가 그 대상을 선험적으로 이론적으로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미리 인식한 그런 행위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전자[순수 실천 이성의 요청]는 (신·영혼 불멸성이라는) 대상의 가능성 자체를 명증적인 실천적 법칙으로부터, 그러므로 오로지 실천 이성을 위하여 요청한다. 그러므로 요청된 가능성의 이 확실성은 전혀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또한 명증적이지도 않다. 다시 말해 대상과 관련해 인식된 필연성이 아니라, 주관과 관련해 실천 이성의 객관적인, 그러나 실천적인 법칙들을 따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가정한, 그러니까 한낱 필연적인 가설이다. 나는 이 주관적인, 그럼에도 참된 무조건[제약]적인 이성 필연성을 위한 더 좋은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22, 23)
 
사실 신, 영혼불멸 같은 요청들은 사변 이성에서는 가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개념들로서 초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천이성에게는 이런 개념들이 내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사변 이성에게는 초험적이었던 것이 실천 이성에 있어서는 내재적인가?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다만 실천적 의도[관점]에서만.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 영혼의 본성이나 예지의 세계나 최고선을 그것들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 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개념들을 우리 의지의 객관인 최고선이라는 실천 개념에서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완전히 선험적으로 순수 이성에 의해, 그러나 오로지 도덕 법칙을 매개로, 그리고 또한 도덕 법칙이 명령하는 객관과 관련하여 도덕 법칙과 관계 맺고서만 말이다."(240)
 
이러한 요청들은 결국 실천이성의 요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사변적 사용에서의 순수 이성의 요구가설들에 이를 뿐이지만, 그러나 순수 실천 이성의 요구는 요청들에 이른다."(255, 256) 사변적 사용에서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나는 파생된 것으로부터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높이 원인들의 계열을 소급하여 올라가고, 저 파생된 것에다가 (예컨대, 세계 내의 사물들 및 변화들의 인과적 결합에다가) 객관적 실재성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파생된 것에 대해 탐구하는 나의 이성을 완벽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원근거를 요구[필요로]한다. 그래서 나는 내 앞의 자연에서 질서와 합목적성을 보는 바, 이것의 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사변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고, 단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의 원인으로서 신성[神性]을 전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56)
 
그러나 실천적 사용에서는 사정이 이와는 다르다.
 
"이에 반해 순수 실천 이성의 요구는 무엇인가(곧, 최고선)를 나의 의지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나의 온 힘을 다하여 촉진해야 한다는 의무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때 나는 최고선의 가능성, 그러니까 또한 그것을 위한 조건들, 곧 신·자유·불멸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들을 나의 사변 이성에 의해 반박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실천적으로 가능한 최고선을 촉진하기 위한, 이 법칙의 주관적인 효과, 곧 그 법칙에 부합하는 그리고 그 법칙에 의해서 필연적이기도 한 마음씨는 적어도 최고선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공허하고 객관이 없는 것일 개념의 객관을 추구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할 터다."(257)
 
결국 법칙으로 표상 되는 이성 명령이 바로 이런 개념들을 요청으로 확립한다.
 
"이런 일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의도에서의 요구이고, 그 전제를 한낱 허용된 가설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의도에서의 요청으로서 정당화한다. 그래서 순수 도덕 법칙은 (영리함의 규칙이 아니라) 명령으로서 모든 사람을 에누리 없이 구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정직한 사람은 능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신이 존재하고, 이 세계에서의 나의 현존은 자연 연쇄 외에도 순수 예지 세계의 현존이기도 하며, 끝으로 나의 현존은 끝이 없다는 것을 의욕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고수하며 이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나의 관심이, 궤변들에 눈돌림이 없이, 나의 판단을 불가피하게 결정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258, 259)
 
칸트는 여기서 당연히 등장할 반론에 주목한다. 즉 어떻게 해서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요구하는 대상의 실재성이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비첸만은 이 문제에 대해 "요구[필요]로부터 그 요구[필요]의 대상의 객관적 실재성을 추리하는 권한을 부정하고, 그의 취지를 한낱 환상일 뿐인 미의 관념에 사로잡혀 그러한 객관이 실제로 어디엔가 있다고 추리하고자 하는 연인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260) 이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자기 입장을 변호한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요구[필요]가 경향성에 기초해 있는 모든 경우에는 그가 완전히 옳다고 본다. 경향성은 결코 그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 객관의 실존을 요청할 수는 없고, 더구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요구를 포함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소망의 한낱 주관적인 근거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이성 요구[필요]는 의지의 객관적 규정 근거, 곧 모든 이성적 존재자를 필연적으로 구속하는 도덕 법칙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도덕 법칙에 부합하는 조건들을 자연 중에 전제하는 것을 선험적으로 정당화하며, 이 조건들을 이성의 완벽한 실천적 사용과 떼려 해도 뗄 수 없도록 만든다. 전력을 다하여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은 의무다. 따라서 최고선의 객관적 가능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을 전제하는 것 또한 가능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전제는 도덕 법칙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며, 또 도덕 법칙과의 관계에서만 타당하다."(260)
 
칸트는 이러한 요청들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불멸하는 영혼과 신은 이제 이론적 관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불멸하는 영혼과 신의 존재는 가능한 직관을 통하여서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도덕 법칙의 현실성에 의하여 증명된다. 인간은 도덕 법칙에 복종하기 때문에,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를 믿도록 강요한다. 그렇기에 요청들을 실용적인 의미에서 유용한 허구나 가설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칸트의 경우 불멸하는 영혼과 신은 현실적 대상들이다. 다만 그것들은 경험적 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세계의 대상들인 것이다.
 
(2) 실천적 의도에서의 순수 이성의 확장
이처럼 최고선은 "이론적인 세 개념 ― 이 개념들은 순전히 순수한 이성 개념들이므로, 이 개념들에 상응하는 직관은 발견되지 않으며, 그러니까 이론적인 방도로는 어떠한 객관적 실재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 곧 자유·[영혼의] 불멸성·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선의 실존을 명령하는 실천 법칙에 의해 순수 사변 이성의 저 객관들의 가능성, 곧 순수 사변 이성이 그것들에게 보증할 수 없었던 객관적 실재성이 요청된다."(241, 242)
그런데 "저 개념들이 현실적으로 객관들을 갖는 것은, 실천 이성이 그런 객관들의 실존을 그 실천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최고선의 객관의 가능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하며, 이론 이성은 그로써 저런 객관들을 전제할 권리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론 이성의 확장은 사변의 확장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론적 의도에서 이제부터 이론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실천 이성에 의해 이룩된 것은 다름아니라, 저 개념들이 실재적이고,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의 (가능한) 객관들을 갖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때 그 객관들에 대한 직관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으므로 ― 이런 일은 요구할 수도 없다 ―, 개념들의 허용된 이런 실재성에 의해서는 아무런 종합 명제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242) 그렇기 때문에 "사변 이성의 세 이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인식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불가능한 것도 아닌 (초험적) 사상[생각된 것]들이다. 이제 이 세 이념들은 실천 명령이 객관으로 삼으라고 명령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들로서 명증한 실천 법칙에 의해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저 도덕 법칙에 의해, 저 이념들의 개념이 어떻게 한 객관과 관계 맺는가를 보일 수는 없으면서도, 이념들이 객관들을 갖는다는 사실은 제시받는다."(243)
물론 "그럼에도 그것이 아직 이 객관들에 대한 인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으로써 그것들에 관해 전혀 아무것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그것들의 적용을 이론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으며, 그러니까 그것들에 대해 이성을 전혀 이론적으로 이성 사용할 수 ― 본래 여기에서 그것들에 대한 모든 사변적 인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객관들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성 일반에 대한 이론적 인식은 그로써, 실천적 요청들에 의해 저 이념들에게 그래도 객관들이 주어지고, 그렇게 해서 한낱 문제 있는 사상[생각된 것]이 비로소 객관적 실재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어진 초감성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의 확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대상들이 있다는 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게 된 한에서 이론 이성의 확장이자 초감성적인 것 일반에 대한 이론 이성의 인식의 확장이었다."(243, 244) 이런 확장을 통해서 "이 이성의 순수한 실천 능력에서는 저 이념들은 내재적이고 구성적이다. 그것들은 순수 실천 이성의 필연적 객관(곧, 최고선)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근거들이니 말이다. 이런 일이 없으면, 그것들은 초험적이고, 또 이성으로 하여금 경험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객관을 받아들이지 말고, 이성 사용을 경험 안에서 완벽에 가깝도록 할 것을 과하는 사변 이성의 한낱 규제적 원리들일 따름이다."(244)
사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해 접근하고 생각하려면 순수 지성 개념들, 즉 범주들을 필수적으로 사용한다. 순수 이성을 실천적 의도에서 확장할 때에도 범주들은 사용된다. 그러나 범주가 사용되는 방식은 인식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이제 여기서는 그러나 전혀 경험에 주어질 수 없는 이성의 이념들이 내가 그걸 인식하기 위해 범주들을 통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이념들의 객관들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 아니라 이념들 일반이 객관들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 실재성은 순수 실천 이성이 마련해 주는 것이며, 이 경우에도 이론 이성은 저 객관들을 범주들에 의해 한낱 사고하는 것 이상으로 할 일은 없다. 객관들을 범주들에 의해 순전히 사고하는 일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도 분명히 제시했듯이 (감성적인 것이든 초감성적인 것이든) 직관을 필요로 함이 없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범주들은 모든 직관과는 독립적으로 그리고 직관에 앞서 오로지 사고하는 능력인 순수 지성에 그 자리와 근원을 가지며, 그것들은 언제나, 객관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든지 간에, 단지 객관 일반을 의미 있게 지시한다. 그런데 범주들이 저 이념들에 적용돼야 하는 한에서, 이 범주들에게 어떤 객관을 직관에서 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범주들에게는 그러한 객관이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 그러니까 범주는 순전한 사고형식으로서 여기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실천 이성이 최고선의 개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내보여준 객관에 의해서, 곧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의 실재성에 의해 충분히 보증된다. 물론 이런 성장에 의해 이론적 원칙들의 견지에서 인식의 확장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 채로 말이다."(245, 246)
 
그런데 이런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실천과 관련해서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지성 및 의지라는 속성들에 대한 관계 개념이 남겨져 있고, 실천 법칙은 ― 실천 법칙은 바로 지성의 의지에 대한 이 관계를 선험적으로 규정한다 ― 이 관계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 이제 일단 이런 일이 일어나면, 도덕적으로 규정된 의지의 객관 개념 (곧, 최고선의 개념)에게, 그리고 이와 함께 이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곧 신·자유·[영혼의] 불멸성의 이념들에게도 실재성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언제나 (어떤 사변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덕 법칙의 실행과 관련해서만 그러하다."(249)
 
2. 최상선, 즉 덕의 필연적 전제로서의 영혼의 불멸성
최고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최상선이 확보되어야 한다. 최상선은 덕을 확보함으로써 실현된다. 덕은 도덕법칙으로 제시된 정언명령을 순전히 도덕적인 동기에 의해 의무로부터(aus Pflicht) 따를 때 성립한다.
 
"이 세계에서 최고선의 실현은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의지의 필연적 객관이다. 그러나 이 의지에서 마음씨의 도덕 법칙과의 완전한 부합은 최고선의 최상 조건이다."(219)
 
그러나 유한한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경험 세계 속에서 이러한 덕을 완벽하게 실현하여 최상선에 이른다는 것은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의지의 도덕 법칙과의 완전한 부합은 신성성, 곧 감성 세계의 어떠한 이성적 존재자도 그의 현존의 어떤 시점에서도 이를 수 없는 완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합은 실천상 필연적인 것으로 요구되므로, 그것은 저 완전한 부합을 향한 무한한 전진[前進] 중에서만 만나질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실천적 전진을 우리 의지의 실재적 객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 실천 이성의 원리상 필연적인 일이다."(220)
 
따라서 덕의 실현을 보증하기 위한 필연적인 전제로 영혼 불멸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실천이성이 요청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무한한 전진[前進]은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의 무한히 지속하는 실존과 인격성 ― 이것을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성이라고 부르거니와 ― 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실천적으로는 영혼의 불멸성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영혼의 불멸성은 도덕 법칙과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순수 실천 이성의 하나의 요청이다."(220) 이렇게 해서 "도덕 법칙은 감성적 동기들의 전혀 아무런 참여 없이 순전히 순수 이성에 의해 지정되는 실천적 과제, 곧 최고선의 첫째의 가장 고귀한 부분인 윤리성의 필연적 완성이라는 실천적 과제에 이르렀고, 이때 이 과제는 오로지 영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으므로, [영혼] 불멸성의 요청에 이르렀다."(223)
칸트에 의하면 이렇게 영혼 불멸을 전제하고 무한한 전진 중에서만 윤리법칙과 완전히 부합하는 덕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종교에 대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생각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덕 법칙의 신성성은 위엄을 잃게 되어, 도덕 법칙을 우리에게 편안하도록 마음대로 규정하는 종교가 등장하거나 아니면 역으로 신과의 만남을 통해 당장 도덕성의 완성을 확보하려는 접신적 몽상에 빠진 종교가 등장한다(221). 즉 종교가 아주 실용주의적이고 세속적이 되거나 아니면 광신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행태]에 의해서는 엄밀하고 엄격한, 그러면서도 관념적이지 않고 참된 이성 명령을 정확하고 일관되게 준수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방해받을 뿐이다. 이성적이되 유한한 존재자에게는 보다 낮은 단계로부터 보다 높은 단계의 도덕적 완전성에로 무한히 전진해 가는 일만이 가능할 뿐이다."(221) "그래서 그는 보다 나쁜 것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보다 좋은 것에로의 진보와 이 진보를 통해 그에게 알려진 부동의 결의로부터 이를, 그의 실존이 얼마만큼 길든지 간에, 이 생 너머서까지라도, 더 멀리 부단하게 계속할 것을 희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결코 이승에서나 그의 현존의 가시적인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신만이 내다볼 수 있는) 그의 지속의 무한성에서만 신의 의지에 (정의에 합당하지 않는 관용이나 관면 없이) 완전하게 합치할 것이라고."(222, 223)
회페의 논평에 따르면, 이러한 칸트의 논변은 미래의 삶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회페, 298) 플라톤에서도, 또 기독교에서도 의무와 경향성 사이의 갈등은 단지 현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피안에서는 해소된다. 피안에서는 악의 유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피안적 요소를 배제한다. 오직 현세에서 무한한 도덕적 정진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에 칸트의 주장이 모순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칸트가 한 편으로는 도덕적 완전성을 가능한 것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과정을 요구하기에 무한한 과정을 다 마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인정하므로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 외에도 인간이 두 세계에 속한다는 전제를 유지하는 이상, 완전한 도덕성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도 등장할 수 있다.
 
3. 최고선의 필연적 전제로서의 신의 현존
칸트에 따르면 최고선의 첫째 요소인 최상선의 전제로서 영혼의 불멸성을 확보하고 나면 "바로 이 도덕 법칙은 또한 최고선의 둘째 요소, 곧 저 윤리성에 부합하는 행복의 가능성에, 앞서와 마찬가지로 사욕 없이 순전히 무당파적인 이성에 의해서, 곧 이 [행복이라는] 결과에 합치하는 원인의 현존이라는 전제에 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순수 이성의 도덕적 법칙 수립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우리 의지의 객관인)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신의 현존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223, 224)
여기서 "행복이란 이 세상의 이성적 존재자가 그 실존 전체에서 모든 것을 자기 소망과 의지대로 하는 상태이며, 그러므로 행복은 자연이 그의 전 목적에 합치하는 데에, 또한 자연이 그의 의지의 본질적인 규정 근거와 합치하는 데에 의거한다."(224) 그런데 행복과 윤리성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도덕 법칙은 자유의 법칙으로서 자연 및 자연의 (동기로서의) 우리 욕구 능력과의 합치에 전적으로 독립해 있는 규정 근거들에 의해 명령한다. 그러나 이 세계 안에서 행위하는 이성적 존재자는 동시에 세계 및 자연 자체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 안에는 윤리성과 이에 비례하는, 세계에 일부로서 속하고 따라서 세계에 부속돼 있는 존재자의 행복 사이의 필연적 연관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도 없다. 세계에 부속돼 있는 이 존재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의지로써 이 자연의 원인일 수가 없고, 그의 행복과 관련하여 그 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그의 실천 원칙들과 일관되게 일치시킬 수가 없다."(224, 225)
 
그러나 최고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윤리성, 곧 덕과 행복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또한 이 연관의 근거, 곧 행복과 윤리성 사이의 정확한 합치의 근거를 함유할, 자연과는 구별되는 전체 자연의 원인의 현존이 요청된다."(225) 따라서 신의 현존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최상 원인은 응당 자연의 한낱 이성적 존재자들의 의지의 법칙과 합치하는 근거뿐만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들이 이 법칙을 의지의 최상 규정 근거로 삼는 한에서, 이 법칙의 표상과도 합치하는 근거를, 그러므로 단지 형식상으로 윤리와 합치하는 근거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인인 그들의 윤리성, 다시 말해 그들의 도덕적 마음씨와 합치하는 근거를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마음씨에 적합한 원인성을 갖는, 자연의 최상 원인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이 세계에서 최고선은 가능하다. 무릇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존재자는 예지자(이성적 존재자)요, 이 법칙 표상에 따르는 그런 존재자의 원인성은 그 존재자의 의지다. 그러므로, 최고선을 위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인 한에서, 자연의 최상 원인은 지성의지에 의해 자연의 원인 (따라서 창시자)인 존재자, 다시 말해 이다. 따라서 최고의 파생적 선 (곧, 최선의 세계)의 가능성의 요청은 동시에 최고의 근원적 선의 현실성, 곧 신의 실존의 요청이다. 무릇 최고선을 촉진함은 우리의 의무였다. 그러니까 이 최고선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일 뿐만 아니라 요구인 의무와 결합된 필연성이다. 최고선은 오로지 신이 현존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생기므로, 그것은 신이 현존한다는 그 전제를 의무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한다.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을 받아들임은 도덕적으로 필연적이다."(225, 226)
 
칸트는 이런 식으로 신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실천 철학을 "순수한 이성-신앙"(227)이라고 부르면서, 최고선을 위해서는 신의 현존을 필수적인 조건임을 주장한다.
칸트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이 최고선의 실천적 가능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들이 신의 현존을 배제하고 인간의 자유만을 근거로 삼아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윤리의 원리를 이 [신의 현존에 대한] 요청과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만으로 이성과 의지의 관계로부터만 확립하고, 이 원리를 그러니까 최고선의 최상의 실천 조건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정당했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원리가 최고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아니었던 것이다."(227, 228)
우선 에피쿠로스 학파는 행복의 원리를 윤리의 최상 원리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했다. 스토아 학파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스토아 학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들의 최상의 실천 원리, 곧 덕을 최고선의 조건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옳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덕의 순수한 법칙에 요구되는 덕의 정도를 이승 생활에서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현자[賢者]의 이름 아래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그의 자연본성의 모든 제한을 넘어 높이 확대하여 모든 인간지[人間知]에 모순되는 어떤 것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최고선을 이루는 두 번째 구성 요소, 곧 행복을 인간 욕구 능력의 특수한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대신에 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의 현자를 그의 인격의 탁월성을 의식하여 자연에서 (그의 만족의 관점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곧, 그들은 현자를 생의 해악에 노출은 시켰지만, 굴복시키지는 않음으로써, (동시에 또한 현자를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로 서술함으로써), 실제로 최고선의 둘째 요소, 곧 자기 행복을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행복을 순전히 행위와 그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만족에 두고, 그러므로 윤리적 사고 방식의 의식에 포함시켰으니 말이다."(228, 229)
 
이에 비하면 기독교는 최고선 개념에 대하여 그리스 철학보다는 더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 칸트는 평가한다. "기독교의 교설은, 그것을 종교 이론으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있어서 오로지 실천 이성의 엄격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최고선의 (곧, 신의 나라[王國]의) 개념을 제공한다."(230) 그래서 "도덕적 완전성은 기독교의 법칙이 요구하는 신성성과 관련하여 피조물에게 다름 아닌 무한한 진보를 남기고,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피조물에게 그의 무한한 지속에 대해 희망을 가질 권리를 준다."(231)
칸트가 보기에 기독교는 최고선 개념과 관련하여 다른 입장과 비교할 때 가장 적절한 접근을 제시한다.
 
"도덕 법칙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런 행복도 약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 질서 일반의 개념 상 행복은 도덕 법칙의 준수와 필연적으로 결합돼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 윤리설은 이성적 존재자가 전심 전력으로 도덕 법칙에 헌신하는 세계를 신의 나라라고 서술함으로써 이 (최고선의 두 번째 불가결의 구성 요소의) 결여를 보완하고 있다. 신의 나라에서는 자연과 윤리가 파생적인 최고선을 가능케 하는 성스러운 창시자에 의해 양자 각각이 단독으로는 서로 몰랐던 조화에 이르는 것이다. 윤리의 신성성은 이승 생활에서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이미 규준으로 지시되지만, 그러나 이에 비례한 복, 곧 정복[淨福]은 단지 영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표상된다. 왜냐하면, 전자는 언제나 모든 처지에서 이성적 존재자들의 거동[태도]의 원형이어야 하고, 그것을 향한 전진은 이미 이승 생활에서 가능하고 필연적이지만, 그러나 후자는 이 세계에서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서 (우리의 능력이 관련되는 한에서) 전혀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오로지 희망의 대상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도덕 원리 자체는 신학적 (그러니까 타율)이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 자신만의 자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인식과 신의 의지의 인식을 이 법칙들의 기초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법칙들을 준수한다는 조건 아래서 최고선에 이르는 데에 기초로 삼을 뿐이며, 도덕 법칙들을 준수하려는 본래의 동기조차도 소망하는 바 그것들의 결과에 두지 않고, 의무 표상 자체에 두기 때문이다. 의무의 참다운 수행에만 행복을 획득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231, 232)
 
그렇기 때문에 칸트에 따르면 스토아주의와 기독교를 유사한 맥락에 놓는 것은 오류이다.
 
"사람들은 보통 기독교의 윤리적 훈계가 그 순수성에 있어서 스토아 학파의 도덕 개념보다 나을 게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아주 뚜렷하다. 스토아 학파의 체계는 영혼의 강한 힘을 축으로 삼고, 이 축을 중심으로 모든 윤리적 마음씨들이 돌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 체계의 추종자들은 많은 의무들을 논했고 그것들을 아주 잘 규정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의지의 동기와 본래적인 규정 근거를 사고 방식이 저급한, 단지 영혼이 약하기 때문에 힘을 쓰는 감각적 동기들을 극복하는 데에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덕이란 인간의 동물적 자연본성을 극복하는 현자의 일종의 영웅성이었다. 이 현자는 그 자신만으로 족하고, 타인들에게 의무들을 설파하긴 하나 그 자신은 의무들 위에 솟아 있고, 윤리적 법칙을 위반하려는 어떠한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복음서의 훈계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하고 엄격하게 이 [도덕] 법칙을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모든 것을 이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기독교의 도덕은 (도덕적 훈계가 그래야만 하듯이) 그 훈계가 그토록 순수하고 엄정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적어도 그가 이승의 생활에서는 그것에 온전히 합치한다는 신뢰를 빼앗으나,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능력껏 선하게 행위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 능력 안에 있지 않은 것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희망할 수 있음에 의해 인간을 다시금 격려[위로]한다."(229, 230)
 
두 번째 요청인 신의 현존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논증을 간략히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전제들에 의존하면서 다름과 같은 논증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회페, 298, 299)
 
1) 도덕적 인간은 행복해질 가치가 있다.
2) 도덕성은 그에 비례하는 행복을 보증하지 않는다.
3) 적절한 행복을 할당하는 힘에 대한 희망만이 이러한 곤경에서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
4) 도덕성에 따라 적절하게 행복을 할당하는 힘은
a) 행복에 관하여 결코 기만당하지 않기 위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b) 적절한 행복을 언제나 할당할 수 있기 위하여 전능하며,
c) 전혀 미혹됨이 없이 행복의 할당을 추구하기 위하여 신성한, 그러한 존재의 경우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오직 신만이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다.
 
4.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
칸트가 요청으로 도입한 신 개념은 중세 형이상학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형이상학적 대상이 아니라 실천적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도덕적 대상이다. 그래서 칸트는 "신이라는 개념이 물리학[자연학]에 (그러니까 또한, 일반적인 의미에서 오직 이 물리학[자연학]의 선험적인 순수 원리들을 내용으로 갖는 것인 형이상학에) 속하는 개념이냐, 아니면 도덕에 속하는 개념이냐"(249)는 물음에 대하여 단호하게 신은 도덕에 속하는 개념이라는 답을 내린다. 즉 신은 이론적인 존재증명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실천적으로 그 실존이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에 의거해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신의 개념에, 그리고 확실한 추리를 통해 신의 실존 증명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250)이며, "신 개념은 (물리학의) 경험적 도정에서는 그것을 신성[神性]의 개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기기에는 언제나 제일 존재자의 완전성이라는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개념에 머문다."(251, 252)
결국 신 개념에 적절히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적 맥락에서이다.
 
"이런 존재자의 실존을 순전한 개념들로부터 인식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실존 명제, 다시 말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한 존재자에 대해, 그것은 실존한다고 말하는 명제는 종합 명제, 다시 말해 그에 의해 내가 저 개념을 넘어서 나가 그것에 대해 그 개념 안에서 생각되었던 이상을 말하는 그런 명제이기 때문이다. 곧, 지성 안에 있는 이 개념에다 지성 밖에 있는 한 대상이 대응해 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어떤 추리에 의해 이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성에게는 이런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만이 남는다. 곧, 이성은 순수 이성으로서 그의 순수한 실천적 사용의 최상 원리에서 출발하여 ― 이 실천적 사용은 그렇지 않아도 오로지 이성의 귀결인 무엇인가의 실존을 겨냥해 있는 것이므로 ― 그 객관을 규정하는 방법 말이다. 그때 순수 이성의 불가피한 과제, 곧 의지가 필연적으로 최고선을 지향해야 함에 있어서 최고선의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세계 내에 그러한 근원 존재자를 받아들여만 하는 필연성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의 도정에서의 이성의 진행에는 전혀 있지 않던 어떤 것, 곧 이런 근원 존재자의 엄밀히 규정된 개념이 드러난다."(250, 251)
 
그래서 칸트는 신의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나는 이제 이 개념을 실천 이성의 객관과 묶고자 하며, 여기서 나는 도덕 원칙은 이 개념을 오로지 최고로 완전한 세계 창시자를 전제하고서만 허용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바이다. 세계 창시자는 나의 거동[태도]을 가능한 모든 경우에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미래에서 나의 마음씨의 가장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전지하지 않을 수 없고, 그에 부합하는 결과를 베풀어주기 위해서는 전능하지 않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항존, 영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도덕 법칙은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인 최고선 개념을 통해 최고 존재자로서 근원 존재자 개념을 규정한다. 이성의 물리학[자연학]적인 (그리고 더 높이 전개된 형이상학적인), 그러니까 전 사변적인 진행은 이를 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신 개념은 근원적으로 물리학[자연학]에, 다시 말해 사변 이성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도덕에 속하는 개념이다"(252)
 
이렇게 최고선의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이러한 일종의 신존재 증명 방식은 칸트가 처음 시도한 것으로 독창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대상으로서의 신의 현존을 도입함으로써 칸트의 도덕 철학은 종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도덕 법칙은 순수 실천 이성의 객관이자 궁극 목적인 최고선의 개념을 통해 종교에, 다시 말해 모든 의무들을 신의 명령들로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 [도덕 법칙은 의무들을 곧] 남의 의지의 제재[制裁], 다시 말해 임의적인, 그 자신 우연적인 지령들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 자신의 본질적인 법칙들로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 법칙들은 최고존재자의 명령들로 보아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도덕적으로 완전한 (성스럽고 선량한), 동시에 전능한 의지에 의해서만 최고선 ― 이것을 우리 노력의 대상으로 놓는 것을 도덕 법칙은 우리의 의무로 삼는다 ― 을 희망할 수 있고, 그러므로 이 의지에 합치함으로써 최고선에 이르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모든 것은 사욕 없이 순전히 의무에만 기초한다. [벌에 대한] 공포나 [상에 대한] 기대가 동기로 기초에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런 것들이 원리가 되면, 그것들은 행위들의 전 도덕적 가치를 파괴할 것이다. 도덕 법칙은 세계에서 최고의 가능한 선을 나의 모든 거동의 최종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나의 의지를 성스럽고 선량한 세계 창시자의 의지에 합치시킴으로써밖에는 이 최고선의 실현을 기대할 수 없다. 최대의 행복이 (피조물에 있어서 가능한) 최대한의 윤리적 완전성과 가장 정확한 비례로 결합되어 있다고 표상되는 전체 개념으로서의 최고선의 개념 안에는 내 자신의 행복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최고선의 촉진을 지시하게 되는 의지의 규정 근거는 행복이 아니라 도덕 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오히려 행복에 대한 나의 무제한적인 요구를 조건에 맞춰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다)"(233, 234)
 
"그렇기 때문에 또한 도덕은 본래,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관한 교설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는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설이다. 종교가 도덕에 더해지는 때에만, 우리가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 않도록 마음 쓴 정도만큼 언젠가 행복을 나눠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도 나타날 것이다."(234)
 
이런 과정을 통해 칸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사람들은 결코 도덕을 행복론으로, 다시 말해 행복을 나눠 갖는 지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오로지 행복의 이성적 조건(不可缺의 條件)과 상관이 있지, 행복의 획득 수단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의무들만을 부과하고, 이기적 소망들에게 방책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도덕이 완벽하게 개진된다면, 그때는 비로소, 이전에 어떤 이기적인 마음에서는 떠오를 수 없었던, 최고선을 촉진하고자 하는 (신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끌어오고자 하는), 법칙에 기초한 도덕적 소망이 각성되고, 이를 위해 종교로의 발걸음이 내딛어진 연후에는, 이 윤리설 또한 행복론이라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희망은 오로지 종교와 더불어서만 개시되기 때문이다."(234, 235)
 
여기서 칸트가 도입하는 종교는 바로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이다.
 
"무릇 최고선의 촉진과 그러므로 그것의 가능성의 전제는 객관적으로 (그러나 단지 실천 이성을 좇아서만) 필연적이되,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방식은 우리의 선택에 맡겨져 있고, 그런데 이 선택에서 순수 실천 이성의 자유로운 관심은 현명한 세계 창시자를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므로, 여기서 우리의 판단을 규정하는 원리는 요구[필요]로서 주관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객관적으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의 촉진 수단으로서 도덕적 의도에서 동의하는 준칙의 근거, 다시 말해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이다. 이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은 그러므로 명령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적인 것으로서 도덕적인 (명령된) 의도에 유익하고, 게다가 이성의 이론적 요구[필요]와도 일치하는, 저 [신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이성 사용의 기초에 두도록 우리 판단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마음씨에서 저절로 발생한 것이다. 이성 신앙은 그러므로 건전한 사람에게 있어서조차 때때로 자주 동요하는 수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결코 무신앙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282, 283)
 
종교가 도덕의 귀결이라는 점을 칸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도 명료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도덕은 불가피하게 종교로 인도된다. 도덕은 종교를 통하여 강력한 도덕적 입법자의 이념을 인간 밖으로 확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입법자의 의지 속에 있는 (세계 창조의) 최종 목적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최종 목적이어야 하는 그러한 것이다."(Ⅵ 6)
 
연구문헌
원전
Kant, I.,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hrsg. von K. Vorländer, Hamburg 1974.
________, Gesammelte Schriften, hrsg. von der Kgl. Preuβ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von der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Berlin 1902.
 
한국어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역, 철학과 현실사, 2002.
『실천이성비판』, 최재희 역, 박영사, 2001.
『실천이성비판』, 강태정 역, 일신서적출판사, 199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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