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인생/Philosophy·LOGICS

소크라테스 (사크러티즈)

hanngill 2007. 9. 4. 13:52
생애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아테네 제국을 세운 델로스 동맹의 창설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 the Just) 가문의 친구였다. 신비의 조각가 다이달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선조였거나 조각이 가업이었다는 플라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아버지가 조각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회고록 작가인 키오스의 이온은 전쟁중이던 BC 441~ 439년에 소크라테스가 사모스에서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와 사귀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르켈라오스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BC 423년 아리스토파네스와 아메이프시아스 등이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아테네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크세노폰은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06~405년에는 500인회(불레) 회원으로 있었으며, 아르기누사이의 승전자들을 재판할 때 처음에는 동료 회원들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기소자는 별 볼일 없는 멜레토스였다. 기소 이유는 2가지, 즉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당시 30인 참주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정을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였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다. 항소가 받아들여져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도리어 국가 공헌자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법정의 배심원들을 흥분시켜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 phaedon〉에 잘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성격과 생활방식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기이한 편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이고 입은 컸다. 마치 주신(酒神) 실레노스 같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가 "내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당대에 가장 곧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테네 국민의 심성도 개선·발전시키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이론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회고록 Memorabilia〉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길거리와 시장, 특히 김나시온(고대 그리스의 단련장)에서 보낸 듯하다.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의 모임에 종종 참여하기도 했지만, 정치가·시인·예술가의 본분, 옳음과 그름에 대한 생각, 관심거리 등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대화의 목표는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아폴론의 델포이 신전의 유명한 신탁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소크라테스가 동료들에 대한 사명을 의식하기 전에 나온 것으로 지혜에 관심을 가진 집단에서 그가 최고의 명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무지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자처했다. 그는 델포이의 신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동료들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게 하고 영혼의 선(善)을 위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임무를 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등한시하기보다는 차라리 당장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스스로의 선언을 통해 그 믿음을 증명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의 옷은 항상 같았다. 그는 신도 신지 않았고 웃옷도 걸치지 않았다. 소피스트인 안티폰은 "그처럼 살아야 한다면 노예조차도 도망가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주제넘게 간섭 잘 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한편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이 되려고 그와 사귀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소크라테스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고 그 원칙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론과 방법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파산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활동했다.
BC 6세기초부터 과감한 우주론적 사변이 성행하면서 서로 갈등하는 사고체계들이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합리주의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참된 세계가 감각이 보여주는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학문의 토대를 제거했다. 그의 제자 제논은 수학의 공준(公準)들조차도 서로 모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능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자연과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당시의 다양한 이론체계들을 익혔다.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는 밀레토스 학파의 우주론, 지구가 구형(球形)이라는 이탈리아 학파의 이론, '단위'에 관한 제논의 수학적 수수께끼(연속성의 문제)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비판적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한때 소크라테스는 '정신'(Nous)이 우주 질서의 원천이라고 보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중시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은 최선의 질서를 갖추고 있다"면서 "우주가 합리적인 목적론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를 공부하면서 이 철학자가 그 원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으며, 이론체계의 세부내용이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적임을 알게 되었다.
■ 소크라테스의 '가설'
이러한 실망을 겪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사실'이 아니라 논리, 즉 '사실'에 관한 '진술' 또는 '명제'를 고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방법에 따르면 특정한 주제에 관한 만족스러운 '가설' 또는 공준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가설에서 나오는 결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들이 참이며, 무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지면 '가설'은 잠정적으로 확정된다. 진리에 관한 문제는 최초의 '가설'을 더욱 궁극적인 '가설'의 귀결로 연역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 형상(形相)이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형상이론을 자신의 근본적인 '가설'로 제시한다. '선함'·'아름다움'·'인간' 등과 같이 분명한 외연을 갖는 모든 명사는 감각지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사고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대상을 이데아(Idea) 또는 에이도스(Eidos), 즉 형상(形相 Form)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아름답다'·'선하다'·'인간적이다' 등의 술어로 수식하는 감각이 가능한 사물들은 2차적이고 파생적인 실재를 지닐 뿐이다. 그것들은 형상을 '분유'(分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이것이나 저것이 '된다'.
흔히 19세기 학자들은 이러한 형상론을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플라톤이 고안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즉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달리 보편자를 특수자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파이돈〉의 이론이 플라톤 이론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분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소크라테스가 '항상' 되풀이한 것을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낯설지 않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옳지 않다면 플라톤이 어떻게 형상이론이 그토록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플라톤이 〈향연 Symposium〉과 〈국가 Republic〉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저작에서 플라톤은 최고의 형상인 미의 형상 또는 선의 형상이 모든 지적 관조의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어떤 형식으로든 완전하게 나눌 수는 없다.
■ 논리적 방법
논리적 측면에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에게 '귀납논증'과 '보편적 정의'를 확립한 공을 돌린다(→ 논리학). '보편적 정의'는 보편적으로 의미가 있는 술어, 즉 〈파이돈〉에서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보편자). 이러한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실천을 개선하기 위해 도덕적 술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분할과 정의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귀납논증'은 단순하고 두드러진 구체적 사례들을 고찰함으로써 보편적 정의와 같은 정식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귀납은 증명의 방법이 아니라 제안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귀납논증은 제안된 '정의'(定義)의 의미를 분명한 형태로 정신 앞에 드러낸다. 다음으로 그 정의가 정당한지는 그 정의를 채택함으로써 나오는 '귀결들'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영역에서 '정의'를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소크라테스는 '자연' 일반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윤리적' 성격과 행위에 관심을 두었다(→ 귀납).
■ 윤리학과 정치학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중심문제를 우주론에서 생활의 규칙을 규정하는 것으로, 즉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옮겨놓았다. 〈변명 Apologia〉과 관련해서 볼 때 신이 부여한 임무는 육체나 '재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을 '배려하고 돌보는 것', 즉 '가능한 한 개인의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영혼을 신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영혼을 '삶의 호흡'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육체가 소멸될 때 영혼도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본 호메로스나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견해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또 영혼을 육체 속에 거주하는 일종의 이방인으로서 육체가 활동할 때 잠자고, 육체가 잠잘 때 깨어난다'고 보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유행하던 견해와도 다르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에 의해서 우리는 현명하거나 어리석고, 선하거나 악하다"고 이야기했듯이, BC 4세기경에는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인격, 성격과 지성의 거주지로 여겨졌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었다(→ 이오니아 학파, 프시케).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직접적으로 영혼의 선함이나 악함에 의존한다. 참된 선, 즉 참된 행복을 바라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을 놓친다. 그들은 실제적인 선 대신에 선하지 않은 대상, 이를테면 무제한의 부나 권력을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잘못된 행위는 의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된 선을 '알고'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아야 하며, 그래야 강함·건강·부·기회를 잘못 '사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죄를 저지르는 것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거나 죽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임을 안다면 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소피스트에 따르면 '선함'은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하게 쓰일 수도 악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선에 관한 지식은 나쁘게 쓰일 수 없다. 그 지식을 지닌다는 것은 그 지식이 항상 적절하게 쓰인다는 것을 보증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에 맞서 아테네인·스파르타인·그리스인의 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선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근거하여 절대적 도덕을 세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모든 동료·신민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가능한 한 선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고대 민주주의의 근본 악은 사회가 참된 통찰과 적합한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데서 생겨났다. 그가 보기에 약간의 부문에서 민주주의가 전문가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도덕과 정의의 문제에서 한 시민의 의견과 다른 시민의 의견이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도 참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민중의 기호를 자극했을 뿐, '정치체제를 돌보는 의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올바름과 절제', 즉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정치가로 불릴 만하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선에 관한 지식이 국가의 복지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임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확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생활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파로 불리는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 학파의 주요인물은 아테네의 안티스테네스와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인데, 이들의 사상은 견유학파(犬儒學派)와 메가라 학파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훗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그가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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