散策길에서 <外>

[스크랩] 한 노부부(老夫婦)의 자유로운 여생

hanngill 2008. 2. 24. 05:06

      ** 한 노부부(老夫婦)의 자유로운 여생 ** H씨는 나와 동갑내기이고 학교동창생인데 지난 주말에 고희를 지냈다. 그 자신이 빌딩을 3동이나 소유한 갑부인데다 자녀(2남 2녀) 들마저 의사 박사 사장이란 직명을 가진 고소득 계층에 속해있어 경제적 풍요를 마음껏 누리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른바 팔자가 핀 사람이다. 부인도 같은 학교의 동기생이어서 우린 그녀를 C여사라고 자연스럽게 부른다. 이들은 5년 전에 결혼 40주년을 맞이했었다. 그때에 이들 부부는 '상호 불간섭 약관(相互不干涉約款)'이라는 것을 만들고, 이에 따라 부부가 자유와 행복을 여한 없이 누리며 살아오고 있는 터이다. ◆ 상호 불간섭 약관 ◆ 제1조. (취지 목적) 우리 부부는 결혼 40주년을 맞이하여 4 자식들이 입회한 자리에서 이 약관을 만들어 서명하고 실천한다. 자식들 모두 결혼시켜 따로 살림을 내보내 그들이 자립하고 살아가는 마당이니 자식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도리와 임무는 완수한 셈이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 부부도 자신의 삶에 대해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며 사람답게 살려는데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음은 물론 대소사를 불문하고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아니할 것을 서약한다. 제2조. (재산공유) H씨 명의로 되어있는 부동산 채권 은행예금 등 모든 재산은 C여사와 공유한다. C여사의 동의 없이는 땅 한 평 돈 한 닢도 H씨 마음대로 처분하지 아니한다. 제3조. (임대료 분할사용)매월 받는 부동산임대료는 반반씩 나누어 각자의 통장에 입금하고, 그 사용은 각자 마음대로 하되,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방 에게 간섭하지도, 간섭받지도 않는다. 제4조. (현금예치)H씨의 명의로 되어있는 현금은 반반씩 똑같이 나누어 각기 새 통장을 만들어 쓰고, 매월 살림에 소요되는 경비는 대치동 상가임대료로 충당한다. 제5조. (행동의 불간섭)두 사람은 인륜도덕 통속적 관습에 구애됨이 없이 완전한 개인적 자유를 향유하며, 이성적 감정적 문제로 상대방의 자유로운 생활을 절대로 억제하거나 제약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H씨는 여비서를 1명 이상 둘 수 있고, C여사는 수행 경호청년 1명 이상을 둘 수 있다. 제6조. (약관의 실천) 우리부부는 이상의 약관에 따라 여생동안 자유이며, 자유로운 생활에 필요한 아파트 별장 팬션을 별도로 마련해서 사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자식들의 위신을 생각하여 기본 거주지는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로 한다. 부칙 : 이 약관은 2002년2월1일 결혼 40주년 되는 날부터 시행한다. 이날부터 자식들이 보내는 용돈은 각자의 통장에 입금 시키게 한다. 허허허 살다보니 희한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인생도 다 있다. 이어서 그들 부부는 어떻게 얼마나 황혼에 접어든 노후의 생활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지, H씨의 여비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옮겨 보면 대략 이러하다. 나는 H씨와 C여사는 전형적인 동양 윤리를 실천궁행하는 평범한 전통적 부부일 것으로만 여기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 우애하고, 대소가 친척 잘 대우하고, 아들 딸 낳아 잘 길러 훌륭히 가르치고, 이웃간에 화목하고, 주위의 뭇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아주 유복한 노년의 부부생활을 누리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의 부부를 동시에 만난 것도 헤아려 보면 십여 년 전의 일이니 현실과 나의 추측이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떻든 H씨의 여비서가 보여준 6개 조문으로 된 '상호불간섭약관'은 나의 부부 관이 8인치 곡사포탄을 맞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찝질한 것이었다. 그 여비서는 이것을 보여주면서 감격 어린 어조로 H씨 부부의 하루하루 생활에 대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부러움을 혼합해가며 중언 부언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H 박사님처럼 복이 많은 사람은 아마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렇게 큰 복을 타고 낳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 국산이지만 6천만 원짜리이지요. 한달 운영 비만해도 기사봉급 합해서 평균 6백만 원이 들어갑니다. 거기에 내 봉급도 만만치 않지요. 매일같이 맥주 마시지요. 고급 음식 사 자시지요. 엊그제 산 저 백구두 한 켤레 수십만 원 주고 샀지요, 저 간소 복 한 벌 백 오십 만원 주고 샀지요.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데 한 달간에 적게는 천만 원 많게는 삼천 만원이 들어가더라구요. 또 사모님의 씀씀이는 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멜다 여사에 못지않다 구요. 안방은 장롱으로 둘러있는데, 몇 번 입었는지 몰라도 수십만 수백만 원짜리 옷 수백 벌이 가득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 분들은 어디에 그런 복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어요. 수백 켤레의 신발, 가죽명품, 몇 상자 의 폐물 온갖 고급품들..... 어떠면 같은 사람인데 복이 그렇게도 많아요?" 숨을 돌리려는지 여비서가 한참 묵묵히 있더니만 다시 묻지도 않는 말 을 이어 간다. 무슨 말이든 그것은 측근으로부터 새어나와 퍼진다더니 과연 그러는가 본다. "두 곳 빌딩에서 한 달에 들어오는 임대료가 평균 잡아 5천만 원은 돼 요. H박사님은 무슨 일을 하던 착수했다하면 돈부터 생겨요. 한 달에 내는 세금 공과금만 해도 수백만 원 수천만 원씩 나가데요. 자식들이 다 잘되어 있어 가지고, 다달이 백만 원씩 통장에 꼬박꼬박 넣어 주어 요. 그 것만 해도 부부가 4백만 원씩 용돈이 들어오지요. 그러니 돈 쓸래야 쓸 곳이 없다구요. 사모님은 하루도 집에 계시질 않 고 해외여행, 골프, 무슨 모임 무슨 파티, 유흥가 출입, 영화 연극관람, 백화점 명품 쇼핑 등등 돈 퍼 쓰려 다니는 것이 매일 전개되는 일과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H박사님이 씀씀이가 오히려 적은 것 같아요. 정치하신다고 지역구 관리할 때에는 다달이 천만 원 넘게 썼는데, 지금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나니 그 돈이 고스란히 용돈으로 남는 거에요. 아침을 무엇으로 떼우시는지 9시쯤 되면 박사님과 사모님은 각자의 자 가용을 타고 각기 스케쥴 대로 어디론가 갈 곳으로 갑니다. 부부가 한번도 동부인하고 나가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완전한 자유시거든요. 사모님 차는 2억이 넘는 외제차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런 복 좀 받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비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유심히 경청해 주는 내가 고맙다는 생 각이 드는지 이젠 자기의 처신을 곁들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인물 잘 생기면 뭘 해요. 아는 것 많으면 뭘 해요. 가방 끈이 길면 뭘 해요. 잘났으면 뭘 해요. 그저 복 많이 받은 사람이면 그것만이 최고더라구요. 우리 박사님 주위엔 별별 명사들이 주렁주렁 합니다. 어제도 L씨 P씨 K씨 모였는데 우리 박사님에게 굽실굽실하던데요. 어디 그 양반들 전성기엔 돈 없이 살던 박사님 같은 분 거들떠나 봤 겠어요. 음식점 마담이 그러더라구요. 참 좋은 세상이다. 저런 대추씨 발라놓은 것 같은 버마재비도 돈 있으니 박사 여비서 거느리고 왕년의 방구깨나 꾸던 넘들 부하 다루 듯하고, 흐흐흐 이년아 S박사 넌 서른 살도 더 먹은 저 영감탱이 얼치기박사 뭐가 그리 좋아서 헬렐레하고 따라 다니냐? 인물이 잘 생겼냐?, 아는 것이 많으냐?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아냐? 밤일 할 능력도 없다며, 그런 디 뭣이 그리 좋아서 넌 벌린 입 다물어 지지도 않냐? 흥 돈이 좋기는 좋다. 그렇게 핀잔을 주더라구요." 나는 여비서에게 한마디 물어 보았다. "여보게, 칠 팔년 사이에 그렇게 달라지다니, 나쁜 일은 아니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세. H씨 C여산 학교 동창생이고 연애 결혼한 사이이고, 항시 잉꼬부부처럼 붙어 다니는 사람들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떨어져 지내나?" "아이엠에프(IMF)가 지나고 두 곳 빌딩에서 많은 돈이 들어오면서부터 불간섭 조약도 체결하고, 그러니 완전히 떨어져 한집 생활한 것은 대략 3년쯤 지났나 봐요. 요즈음 보면 소 닭 보듯 해요. 아침에 보면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도 없이 그러거든요." "어때, 이런 부부생활이 행복한 것이라고 여겨지나?" "돈복 많은 것이 곧 부부행복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글쎄올시다. 저처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돈 많이 가진 것 이것만이 우선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보이지만..... 어르신 만일에 말입니다.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강남에 아파트도 사고 돈 걱정이 없어진다고 하면, 소나타 한대 사 가지고 옆에는 못나고 못생긴 낭군 모시고 뒷좌석에는 새끼들 두 남매 태우고, 이 강가를 드라이브하며, 큰소리로 외치겠어요. '이 세상에서 나 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 우리 네 식구 평창 팬션으로 피서 간다.' 이렇게 말입니다.ㅎㅎㅎ" 지금 의정부 어느 서민 아파트에 네 식구가 살고 있다는 그녀는 남편이 어느 대학교에 시간강사로 다니는데, 동계 방학임에도 몇 푼 벌겠다고 보충강의를 하러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이더라는 말을 덧붙인다. 사랑도, 미움도, 삶의 본질도, 생존의 의무도, 가족에 대한 책임도 상호 불간섭약관 한 장으로 송두리 채 사라져버린 H씨의 돈복과 자유로운 삶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저번 날 눈비 많이 뿌리던 날, 박사님이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시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외롭고 쓸쓸하게 보이는지, 갑자기 뭔가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돈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 그 좋은 것을 어떻게 활용 하느냐에 따라 행복이 증폭되기도 하고,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지 않겠는가? " “어르신, 강변역에 다 왔네요. 2호선 전철 타고 가신다구요. 차 없이 지내시기가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녀의 눈에는 지하철로 옮겨가는 나의 모습이 불편하게 보일는지 알 수 없으나, 만원버스에 매달려 살면서 난관을 넘어온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처럼 편안한 세월은 일찍이 없었다. 그저 그것만이 대견할 뿐이다.
    출처 : 아름다운 60대
    글쓴이 : 녹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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