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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 scripture - 구약 신약 성경의 연혁

hanngill 2007. 8. 14. 12:39
경전을  Scripture  또는 Sacred Scripture라고도 함.
세계 여러 종교의 존중을 받는 본문이나 거룩한 문서.
 
경전은 세계 문학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형식과 분량, 연대 및 신성시하는 정도는 매우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특질은 믿는 자들이 경전의 말을 성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성스러운 영적이고 마술적인 힘을 간직하고 있고 또 전달하며, 능력과 진리로 가득한 구절이나 문장 속에서 신적인 존재나 다른 신성한 실체를 인간에게 계시하는 수단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말과 구별된다.
 대부분 경전은 원래 구술이었고, 문자로 정착되기까지는 기억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졌다(→ 구비문학).
그러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찬미가와 같이 아직도 구술로 전해 내려오는 것도 있다(지금은 인류학자들에 의해서만 채록되고 있음).
경전에는 최초의 구술이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큰 소리로 낭송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여러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경전을 조용히 읽을 때 그 의미나 중요성이 낭송할 때 보다 약화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음성은 홀로 읽어서는 쉽게 포착하지 못하는 힘과 진리의 차원을 낭송되는 본문에 더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구술로 시작된 것은 아니며, 모든 부분이 마술적이거나 영적인 능력을 주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다. 기록된 경전 중 많은 부분이 설화이거나 해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경전이나 반(半)경전은 숫자도 많고 또 유형도 매우 다양하다. 마술적인 룬(rune) 문자(고대 게르만어 알파벳)와 원시시대나 고대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주문 이외에도 경전에는 찬송, 기도, 찬가, 신화, 신이나 영웅에 대한 이야기, 서사시, 우화, 종교법, 제사의 절차에 대한 지시문, 중요한 종교인의 가르침과 이에 대한 해설, 도덕적 예화, 선지자와 현인의 대화, 철학적인 토론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경전은 종교적인 감정이나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의 문학을 포함하고 있다.
 
경전의 유형은 권위와 성스러움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다. 경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부분은 대부분 정경(正經:신앙의 표준이 되는 작품)으로 모아졌는데 이 정경은 전체적인 의견의 일치를 통하거나 공식적인 종교기구에 의해 확정되고 이것만이 유일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절대 변화되거나 수정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책(반[半]정경적 성격의 책)도 정경을 보충하는 본문으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정경과 반(半)정경을 가장 뚜렷하게 구별하는 경우는 힌두교인데, 힌두교는 경전이 대단히 많고 다양하다. 힌두교의 경전은 그것을 만든 예언자나 현자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고대의 요소와 모든 유형의 종교문학을 포함하고 있다.
경전 중 가장 오래된 4종의 베다(찬가)는 BC 2000년대 인도 북서지방에 살던 인도-아리아족(族)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베다와 BC 1000년 이후에 작성된 추가본 브라마나 Brāhmaṇa(의식에 대한 지침과 주석서), 아랑야카 Āraṇyaka(수행자의 密林書), 우파니샤드 Upaniṣad(철학적 논서)는, 후대의 다른 문헌보다 신성하게 여겨진다. 이것들은 종합하여 '슈루티'(Śruti:'들은 것' 즉 天啓書)라고 부르는 반면, 그 뒤에 나온 경전은 '스므리티'(Smṛti:'기억된 것' 즉 최초의 계시에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기억되고 재해석된 것)라고 부른다. 전자는 정경으로 완성된 것이므로 추가하거나 바꿀 수 없으나 후자는 준(準)정경으로 덜 신성시된다.
불교경전은 BC 6세기의 고타마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모아, 그가 사용했던 마가다어와 관계가 깊은 팔리 방언으로 처음 쓰여졌다. 세월이 흘러 그의 사상이 인도 밖으로 전파되면서부터 불교는 전달매체로 고대 동양에서 널리 쓰였던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채택했다. 여기서부터 정통적이라고 여겨지고 팔리어로 보존된 소승불교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장로들의 길')의 문헌과 보다 널리 전파된 대승불교(Mahāyāna:'큰 수레')의 수많은 문헌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대승불교 경전은 후에 티베트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로 번역되고 증광되었다.
중국 토착 종교에 기초가 되는 본문을 경전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중국의 고전적인 도교유교 어느 것도 계시에 기초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이러한 신앙의 본문은 원래 인간의 지혜로 생각되었으며, 인간이 인간을 위해 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들은 권위를 얻어 높이 숭배를 받아 결국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되는 정경의 위치를 획득했다. 도교의 〈도덕경유교의 4서(四書)와 5경(五經)이 여기에 속한다.
가장 엄밀하게 정리된 정경들은 공식적인 종교단체가 규정한 것들이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구약성서〉로 알려진 유대교 정경은 AD 90년경 팔레스타인의 야브네(Yavneh)에서 열린 랍비들의 종교회의에서 정리되었다.
정경에서 제외된 반(半)경전적인 책을 그리스도교인들은 〈외경 Apocrypha〉(그리스어로 '감추어지다')이라고 부른다. 로마 가톨릭은 후에 이것들을 정경에 포함시켰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는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추종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 전기를 구술의 형태로 보존해서 마침내 4복음서를 썼다(→ 히브리어 성서). 여기에 사도 바울로와 다른 사람들의 편지, 그리고 〈요한의 묵시록〉이 덧붙여져 신약성서가 되었으며, 4세기말에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신약 외경도 있으나 의심스러운 사항들이 많아 정경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종교단체가 권위를 부여하거나 승인을 하지 않아도 경전 자체가 곧 권위가 될 수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이 스스로 권위를 지닌 책이라고 믿는다(→ 이슬람교). 그들은 유일한 정경이며 신앙의 기준인 코란이 하느님이 모하메드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고 이를 모하메드가 첨가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전한 것이므로 그 자체가 스스로를 입증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경전이라고 믿는다. 코란에 대한 이슬람교도들의 이러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 그대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의 신앙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보다는 경전의 성격이 약한 문헌들도 많다. 신의 진리나 명령을 해석하거나, 숭고한 사람으로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모든 사람들이 신의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설명한 글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글들은 경전의 보조 역할을 한다.
〈탈무드〉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것은 율법·전승·주석을 수록한 것으로 많은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토라(모세 율법, 혹은 모세 5경)에 상당하는 권위를 갖는다. 사실, 성서시대 이후 랍비들의 글을 보면 일반적으로 〈탈무드〉를 모세의 성문 율법을 보충하는 제2의 토라로 간주했다.
또다른 예를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주요 신조는 때로 절대 오류가 없는 것으로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이단으로 간주된다. 특히 사도신경과 니케아(325)·콘스탄티노플(381)·칼케돈(451) 공의회의 '에큐메니컬 신조'가 전형적인 예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여기에 성례전과 성변화(聖變化:미사에서 쓰이는 빵과 포도주가 형상은 그대로 있어도 본질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보는 것), 고해성사, 동정녀 마리아의 무원죄잉태설, 교황의 무류성,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육체와 영혼의 승천 등에 관한 로마 가톨릭 공의회의 결정을 신조의 형태로 요약한, 교황의 교령들을 덧붙였다.
개신교의 경우 어느 정도 구속력이 있고 특징적인 것은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루터교), 1563년〈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개혁교회), 1646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647년의 〈소교리문답〉(장로교) 등이다.
과거 7세기 동안 서양에서는 완전히 성스럽지는 않지만 반(半)경전 정도로 인정받은 신앙 저서들이 있었다. 토마스 아켐피스(1379/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 존 버니언(1628~88)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 메리 베이커 에디(1821~1910)의 〈성서에 해답을 둔 과학과 건강 Science and Health with a Key to Scriptures〉, 조지프 스미스(1805~44)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모르몬경〉 등이 그 예이다.
 

외경(外經) 또는 경외성서그리스어 구약성서에만 있는 성서를 말한다.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70인역 성서를 번역했는데, 이때 추가된 구약정경외의 성서들을 외경 또는 제2경전이라고 한다. 정경(正經)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정경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서)와 유다의 편지(유다서)에서 인용하는등 성서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다. 지혜서,마카베오 상,하등이 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영감이 없다고 보아 인정하지 않지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성공회에서는 외경이 정경은 아니지만, 신자의 도덕생활을 위해서 읽을 수 있다고 보아서, 미국 성공회에서는 성공회 기도서(감사성찬례에 사용되는 미사예문)에 외경을 인용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 정교회에서는 성서로 인정하여, 로마 가톨릭에서는 외경인 마카베오를 근거로 연옥교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유대교에서는 외경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이라고도 한다.

 

 

외경 이란

(apocrypha는 '감추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apokryptein에서 유래)
성서문학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작품.
 
역사를 통해 이 용어가 사용된 예를 보면 그것이 일종의 비밀스런 작품을 가리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작품은 처음에는 칭송되다가 후에는 관용적으로 인정되며 결국에는 배제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아포크리파는 권위가 의심스런 작품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그리스도교 성서 작품에서 외경의 일반적인 개념에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여러 차원이 있다. 외경은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신자들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위경(僞經)은 표면상으로는 성서의 인물이 쓴 가짜 작품이다.
 
제2의 정경작품은 하나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어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성서〉(히브리어 성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 학자들은 다양한 히브리어 본문의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부분적으로는 아람어도 사용함)로 번역한 70인역을 만들어냈는데 그 역본은 많은 작품을 혼합했다. 후에 얌니아 공의회(90)에서 비(非)헬레니즘 유대교 학자들은 그것을 진정한 히브리어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탈무드〉는 이 작품들을 세파림 히조님('외래의 책들')으로 분류한다.
70인역은 성 히에로니무스(제롬)가 〈구약성서〉를 라틴어 불가타 성서로 번역하는 데 중요한 자료였다. 비록 히에로니무스가 70인역에 있는 몇몇 외경 작품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기는 했지만(그가 처음으로 외경이란 단어를 '정경이 아닌'의 의미로 사용했음), 무시하고서 그것의 대부분을 불가타 성서에 포함시켰다. 1546년 4월 8일 트리엔트 공의회는 〈마카베오 3서〉·〈마카베오 4서〉, 〈므나쎄의 기도〉, 〈시편〉 151편, 〈에스드라 1서〉·〈에스드라 2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불가타 성서를 정경으로 선포했다. 반면 동방 그리스도교는 일부 〈구약성서〉의 외경인 〈토비트〉·〈유딧〉·〈솔로몬의 지혜〉·〈전도서〉(시라크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 등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배제했다. 한두 가지 예외는 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외경 작품에는 〈바룩〉(예언서), 〈예레미아의 편지〉(종종 바룩의 6장으로 취급하기도 함), 〈마카베오 1 서〉, 〈마카베오 2서〉, 다니엘의 몇몇 이야기들(3명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에스델〉의 부연 부분 등이 있다.
〈구약성서〉 위경은 아주 많고, 족장들과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아담으로부터 즈가리야까지 다양한 성서의 인물을 저자로 간주한다. 이들 중 중요한 것으로는 〈이사야 승천기〉·〈모세승천기〉·〈아담과 이브의 생애〉·〈에녹 1서〉·〈에녹 2서〉·〈희년(禧年)의 서〉·〈아리스테아의 편지〉·〈12족장의 유언〉 등이 있다.
 
모든 〈신약성서〉외경은 위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신약 외경〉). 묵시서가 많고 일부는 지혜서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행전·복음서·편지의 범주에 들어간다. 외경의 행전은 대부분의 사도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성서 인물의 생애와 경력에 관해 이야기하며, 외경의 편지와 복음서, 그밖의 것들은 그런 인물들이 쓴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작품들 대부분은 영지주의처럼 이단으로 선포되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분파로부터 나왔다. 그들 중 일부는 여러 이단에 대항해 논쟁을 하며, 몇몇은 많은 여성들을 포함해 성인들과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삶을 대중화하기 위해 중립적인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초기 몇 십 년 동안에는 정통이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여러 분파들이 역사가 짧은 교회에서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경쟁했다. 설교나 선교를 통해 신자를 얻으려고 했듯이 모든 싸움은 저술을 통해 행해졌다. 실제로 후에 이단으로 정죄당한 신앙을 옹호한 작품들은 거부되거나 파기되었다.
외경 작품 이외에 〈신약성서〉는 제2의 정경이란 용어의 부차적 의미인 '후에 덧붙여진'으로 설명되는 많은 작품과 단편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것들 중 하나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것은 바울로가 저자로 되어 있지만 그는 이 편지가 씌어지기 전에 죽었다. 그밖의 것들로는 〈야고보의 편지〉·〈베드로의 둘째 편지〉·〈요한의 둘째 편지〉·〈요한의 셋째 편 지〉·〈유다의 편지〉·〈요한의 묵시록〉 등이다. 단편들에는 〈마르코의 복음서〉 16장 9~20절, 〈루가의 복음서〉 22장 43~44절, 〈요한의 복음서〉 7장 53절과 8장 1~11절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경에 포함되어 있고, 동방정교회와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도 받아들이고 영지주의나 몬타누스주의 같은 이단 운동은 〈신약성서〉를 위경으로 취급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정통 그리스도교 교회는 성서의 정경화 과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어원으로 본 성서의 의미
성서는 〈구약성서〉·〈신약성서〉·외경(제2경전)으로 구성된다.
〈구약성서〉는 원래 유대교의 경전이었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합친 성경전서는 개신교회의 경전이며,
여기에 외경을 합친 것이 가톨릭 교회의 경전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한국에서는 '성경'(聖經) 또는 '성서'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성경, 일본에서는 성서라고 한다.
성서는 여러 권의 책을 한데 모아놓은 작은 문집과도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경전 전부를 포함하여 부를 때 '성서'라고 한다. 〈
구약성서〉에는 낱권 39권이 들어 있으며,
〈신약성서〉에는 낱권 27권이 들어 있고,
'외경'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낱권 7권과 〈구약성서〉에 속하는 〈에스델〉·〈다니엘〉의 내용을 첨가한 별권 2권이 들어 있다.
한국어로 '성서'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는 'The Holy Scripture', 독일어로는 'Die Heilige Schrift', 프랑스어로는 'La Sainte Ecriture', 라틴어로는 'Sacra(Divina) Scriptura'라고 한다.
유대교에서도 그들의 경전을 성서(Shepharim Kithbe Haqqodesh)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그리스도교에서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부분만 들어 있다. 그 책을 그들은 〈율법서·예언서·성문서 Torah, Nebhim, Ketubhim〉라고도 부르고, 머리글자를 따서 〈타나크 TaNaKh〉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약성서〉는 주로 히브리어로 되어 있고, 일부는 아람어로 쓰여졌다.
〈신약성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외경도 현재 그리스어로 전해져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1882년부터 〈구약성서〉·〈신약성서〉·외경이 번역되기 시작한 이후 수차례의 개정을 거쳐 현재 새 번역판이 나와 있다.
 
 

 
같은 성서이면서도 유대교·가톨릭·개신교가 그들의 경전의 범위·내용·편집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성서의 형성과 발전을 보려고 할 때에는 유대교의 '히브리어 성서', 가톨릭의 '제1경전과 제2경전', 개신교의 '성경전서'로 나누어 정리해볼 수 있다.

 
■ 히브리어 경전
 
- 유대교의 경전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경전을 〈율법서·예언서·성문서〉라는 긴 이름으로 부른다.
 
율법서토라에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가 들어 있다. 이 때문에 토라를 모세5경(Pentateuch)이라고도 한다.
 
예언서느비임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로 나뉘며, 전기예언서에는 〈여호수아〉·〈판관기〉(또는 〈사사기〉)·〈사무엘〉·〈열왕기〉가 들어 있고, 후기예언서에는 〈이사야〉·〈예레미야〉·〈에제키엘〉·12서(十二書)가 들어 있다. 느비임에는 이처럼 전·후기 예언서 각각 4권씩 모두 8권이 들어 있다. 12서는 '소예언서'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디야〉·〈요나〉·〈미가〉·〈나훔〉·〈하바꾹〉·〈스바니야〉·〈하깨〉·〈즈가리야〉·〈말라기〉 등 모두 12권이 들어 있다. 12권이지만 일찍부터 한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1권으로 여겼다.
 
성문서케투빔에는 〈시편〉·〈잠언〉·〈욥기〉 등의 시와 지혜, 〈아가〉·〈룻기〉·〈애가〉·〈전도서〉·〈에스델〉의 다섯 두루마리(하메시 메길로트), 이밖에 〈다니엘〉·〈에즈라-느헤미야〉·〈역대기〉 등의 책들이 들어 있다. 성문서에 들어 있는 책의 수는 시와 지혜 3권, 다섯 두루마리 안에 들어 있는 5권, 나머지 3권 등 모두 11권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경전에 들어 있는 낱권의 수는 토라 5권, 느비임 8권, 케투빔 11권 등 모두 합해 24권이다.
 
유대교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어떤 경로를 거쳐 경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율법서·예언서·성문서〉라고 하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일찍부터 율법서가 경전이 되고, 그다음에 예언서가, 마지막으로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경전이 된 것 같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먼저 율법서가 BC 5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때에 에즈라의 주도 아래 경전이 되었다. 예언서가 경전이 된 것은 일반적으로는 시몬이 대제사장직에 있던 때(BC 219~199)라고 본다.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마지막으로 경전이 되기는 했지만 〈시편〉과 같은 책은 일찍부터 예언서와 함께 권위를 인정받았다.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서의 범위가 확정되었는데, 그동안 경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제키엘〉·〈잠언〉·〈아가〉·〈전도서〉·〈에스델〉 등이 이때 함께 경전이 되었다.
 
- 사마리아 경전
그리스 시대 초기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중심지였을 때, 옛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심지 사마리아에 살던 야훼 숭배자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사마리아 종파). 이들이 곧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겜 근처의 그리짐 산을 그들 제사의 중심지로 정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외경으로는 〈세페르 하야밈 Seper Hayyamim〉(역사서)과 〈메마르 마르카 Memar Marqa〉(마르카의 교훈 속에 담긴 모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책들이 그 권위에 있어서 모세5경과 같지는 않으나 모세5경 버금 가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세페르 하야밈〉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특히 성서시대 해당 부분에는 〈여호수아〉를 비롯한 역사서에서 상당한 양의 자료를 발췌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에서 그것을 고쳐 인용한 예가 많이 발견된다.
 
알렉산드리아 경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BC 3세기경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그들의 경전으로 삼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역시 사두가이파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모세5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번역했다. 나머지 책들도 그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번역되었으며,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외경도 성서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경전은 어디까지나 모세5경뿐이었다. 그들의 경전이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지금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는 분량이나 편집이 다르다. 히브리어 경전은 〈구약성서〉를 율법서·예언서·성문서로 나누지만, 알렉산드리아 경전은 모세5경·역사서·문학서·예언서로 나눈다. 모세5경에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가 들어가고, 역사서에는 〈여호수아〉·〈판관기〉·〈룻기〉·〈사무엘 상〉·〈사무엘 하〉·〈열왕기 상〉·〈열왕기 하〉·〈역대기 상〉·〈역대기 하〉·〈에즈라 1서〉(외경)·〈에즈라 2서〉(〈에즈라〉와 〈느헤미야〉)·〈에스델〉·〈유딧〉·〈토비트〉·〈마카베오 1서〉·〈마카베오 2서〉·〈마카베오 3서〉·〈마카베오 4서〉가 포함되었고, 문학서에는 〈시편〉·〈송시〉·〈잠언〉·〈전도서〉·〈아가〉·〈욥기〉·〈지혜서〉·〈집회서〉·〈솔로몬의 시〉를 편집해 넣었으며, 예언서에는 〈호세아〉·〈아모스〉·〈요엘〉·〈오바디야〉·〈요나〉·〈나훔〉·〈하바꾹〉·〈스바니야〉·〈말라기〉·〈이사야〉·〈예레미야〉·〈바룩〉·〈애가〉·〈예레미야의 편지〉·〈에제키엘〉·〈다니엘〉과 '수산나', '벨과 뱀' 등을 편집해 넣었다. 위에서 보듯이 배열과 분책방식(分冊方式)이 히브리어 경전과 다르다.
 
- 쿰란 경전
1940년대에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에서 〈구약성서〉 사해사본이 발견되면서 쿰란 종파의 경전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경전 전체의 윤곽을 파악할 길이 없다. 〈에스델〉을 제외한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발견되었다. 이것은 쿰란 종파의 경전이나 유대교의 경전이 거의 같았음을 암시한다. 다만 〈에스델〉의 경우는 그들의 경전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그들의 경전에 들어 있기는 했지만 우연히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 그리스도교의 경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서 말하는 70인역성서는 모세5경만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경전은 모세5경만이었으므로 경전 전체와 외경까지 포함하고 있는 70인역은 그리스-유대교의 경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경전이었다.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성서〉 외경이 〈구약성서〉나 다름없이 인용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Ⅰ 고린 2 : 9, 루가 11 : 49, 요한 7 : 38, 에페 5 : 14, 야고 4 : 5~6, 유다 14~15). 유대교와의 갈등 속에서 계속 성장한 초대 그리스도교가 히브리어 〈구약성서〉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에 더 의존하게 되고, 그것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자 유대교는 70인역을 버리게 되었다. 라틴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실제로 70인역을 따랐다. 히에로니무스(제롬)와 그이후의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우수성을 주장했으나, 크게 공명을 받지 못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히브리어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된 불가타 성서에 70인역의 외경을 포함시켜 공인 성서로 인정함으로써 70인역을 포함한 모든 책들을 경전으로 인정한 결과가 되었다.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와 갈라지면서 70인역 〈구약성서〉를 버리고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택했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서 읽혀지던 외경은 경전 밖으로 축출당했다.
 
가톨릭의 제2경전
가톨릭에서는 경전이 확대되고 재편집되었다. 확대되었다는 말은 히브리어 성서에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이 첨가된 것을 일컫는 것이고, 재편집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첨가 외에 히브리어 성서 24권을 70인역을 따라서 39권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의 〈사무엘〉·〈열왕기〉·〈역대기〉를 〈사무엘 상〉·〈사무엘 하〉·〈열왕기 상〉·〈열왕기 하〉·〈역대기 상〉·〈역대기 하〉로 나누고, 〈에즈라-느헤미야〉를 〈에즈라〉·〈느헤미야〉로 나누고, 소예언서 12서를 12권으로 나누어 〈구약성서〉를 모두 39권으로 재편집했다.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第二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부르며,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합친 성서를 가톨릭에서는 제1경전 혹은 원경전(原經典 protocanonical)이라고 한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 책의 권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한국에서 나온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에 보면, 〈토비트〉·〈유딧〉·〈에스델〉(제1경전 〈에스델〉의 추가부분)·〈지혜서〉·〈집회서〉·〈바룩〉·〈다니엘〉(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 등 9권이 들어 있다. 〈바룩〉에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마지막 장으로 편집되어 있으며, 〈다니엘〉의 추가부분에는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이 들어 있다. '개역 표준 성서' Revised Standard Version : 1957)에 실린 제2경전에는 〈에스드라 1서〉·〈에스드라 2서〉·'므나쎄의 기도'가 더 들어 있다.
제2경전에 속하는 이런 책들은 본래 '70인역'에 들어 있던 것들을 초기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된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 익숙하지 않던 초기 그리스도교가 70인역을 읽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 있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대 라틴어 역 성서(Old Latin Version)는 바로 70인역에서 번역되었다. 교부들 사이에서도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고 그리스어〈구약성서〉에만 나오는 책들에 대한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문제삼기는 했으나,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서가 들어 있는 39권의 책과 동일하게 영감받은 권위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 들어 있는 39권은 이미 경전으로 전해져온 것이므로 이것을 제1경전이라고 했고, 그리스어 구약에 들어 있는 나머지 책들은 뒤늦게 경전이 되었다고 하여 제2경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런 용어는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부터 사용). 그러나 '므나쎄의 기도', 〈에스드라 1서〉,〈에스드라 2서〉는 불가타 역 성서에 들어 있었으나 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불가타 역은 이 3권의 책을 부록으로 취급하여 별도로 편집했고, 나머지 책들은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적절히 재배치했다. 〈토비트〉·〈유딧〉은 〈느헤미야〉 다음에, 〈에스델〉 추가부분은 〈에스델〉 안에, 〈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는 〈에스델〉 다음에, 〈지혜서〉·〈집회서〉는 〈아가〉 다음에, 〈바룩〉은 〈애가〉 다음에, 〈다니엘〉 추가부분은 〈다니엘〉 다음에 각각 편집해 넣었다.
 
개신교의 〈구약성서〉 경전
개신교의 경전이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것은 〈구약성서〉 외에 〈신약성서〉를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가톨릭과 다른 것은 가톨릭이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외경을 경건문학으로 받아들일 뿐, 경전으로는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에서는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어오다가 제2경전으로 정착되었지만, 개신교 쪽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내 경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개신교 목사들이 편집한 '취리히 성서'(Zurich or Swiss-German Bible : 1527~30)는 외경을 신약 다음에 부록으로 편집해 넣었다. 1534년에 끝난 루터의 독일어 역은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부록으로 엮어 넣고, 그 서문에 "외경은 경전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했다.
1535년에 프랑스 개신교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발간한 성서도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부록으로 넣고, 머리말에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진 구약에는 없지만 불가타 역본에 들어 있는 외경"이라고 언급했다. 1535년에 마일스 커버데일이 번역한 영어 성서도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부록으로 편집함으로써 〈구약성서〉의 일부로 다루지 않고 별도로 묶어 경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책임을 밝혔다. 1560년에 나온 ' 제네바 성서'는 본문을 절로 나누어 출판한 최초의 성서일 뿐만 아니라, 외경에 대해서도 그 서문에서 개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서문에서 외경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읽고 해석하도록 공인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경전이 확증하는 내용에 일치할 경우에만 도움이 되는 책임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므나쎄의 기도'만은 〈역대기 하〉 끝에 편집해넣은 예외를 보인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King James Version : 또는 흠정역)도 외경을 경전과 구별하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만, 〈신약성서〉 관주(전후참조)에서 외경과의 관련구절을 여러 번 언급하여 외경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자 개신교 쪽에서도 외경에 대한 태도를 좀더 분명히 하기에 이른다. 1562년에 영국교회가 발표한 39개조 신앙고백 제6조는 "(외경은)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결정한 신앙고백 제1장 3절은 "외경은 영감으로 씌어진 책이 아니므로 경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서와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갖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개신교 가운데서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으나, 그중 성공회는 외경을 가장 존중하는 교회이다. 그들의 기도서에 붙어 있는 성구절에는 외경이 인용된다. 최근에 영국성공회에서 개정한 성구집을 보면 외경에서 인용한 것이 44개나 되고, 미국성공회가 사용하는 최신 개정판 성구집에는 110곳에 외경 인용이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중요하게 권장했는데도 외경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성서〉의 본문과 번역본
■ 본문비평(사본 문제)
인쇄된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은 자음, 모음 기호, 가락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모음 기호와 가락은 7~9세기 마소라(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학파가 만들어서 자음 본문에 붙인 것이다. 손으로 쓴 사본에는 여러 가지 오기가 들어 있다. 유형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성서 번역).
- 잘못 듣기
비슷하게 발음되는 낱말을 잘못 들어서 생기는 오기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부정사(lo⁾)와 인칭대명사 여격 그에게(lo)의 혼용, 후음 헷(ḥet)과 마찰음 카프(kaf)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흐(aḥ : 형제)와 아크(akh : 반드시)의 혼용 등이 여기에 속한다.
- 잘못 보기
비슷하게 생긴 글자와 낱말들 사이에서 오기가 발생한다. 베트(bet : 안, 속)와 카프(kaf : ~처럼) 사이의 혼용이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와 마소라 본문 〈이사야〉에서 많이 발견된다. 자음 글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자순도치(字順倒置)의 오기도 있다. 키르밤(qirbam : 그들의 속 생각)이 키브람(qibram : 그들의 무덤)으로 바뀐 예가 〈시편〉에서 발견된다. 자음 글자나 낱말이 중복되는 중복오사(重復誤寫 Dittograpy) 현상도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와 마소라 본문 〈에제키엘〉 등에서 확인된다. 겹쳐 나오는 자음 글자나 또는 낱말이 우연히 탈락되는 중자탈오(重字脫誤 Haplography) 현상도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에서 발견된다. 유사한 어두나 어미를 가진 2개의 구나 절이 서로 몇 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을 때, 사본을 베끼는 사람의 눈이 그 몇 줄을 뛰어넘기 때문에 생기는 탈락이 있다. 사본에서는 이러한 유사문미(類似文尾 Homoioteleuton)나 유사문두(類似文頭 Homoioarchton)로 인한 본문 탈락현상도 발생한다. 〈사무엘 상〉 14장 41절의 마소라 본문을 70인역이나 불가타 역과 대조해볼 때, 마소라 본문에서 이런 유형의 탈락이 많이 발견된다.
주석상의 문제
같은 자음 본문을 어떻게 발음하여 읽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본래 히브리어 성서 본문에는 모음이 없었으므로 DBR 같은 글자를 마소라 본문 〈호세아〉에서 보듯이 디베르(DiBeR)로 읽으면 '그가 말했다'가 되고, 70인역 〈호세아〉에서 보듯이 데바르(DeBaR)로 읽으면 명사 '~의 말'이 된다. 히브리어 성서에는 본래 낱말과 낱말 사이에 구분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다른 뜻을 읽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에 나오는 BBQRYM은, 마소라 본문에서 읽듯이 바베카림(BaBeQaRYM)으로 읽으면 '황소를 부려서'라는 뜻이 되고, 바바카르 얌(BaBaQaR YaM)이라고 읽으면 '황소로 바다를'이라는 뜻이 된다. 가끔 약자가 나오는데 그 약자를 잘못 해독한 경우도 있다. 마소라 본문 〈사무엘 하〉 1장 12절, 〈에제키엘〉 12장 23절, 〈아모스〉 3장 9절 등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마소라 본문과 70인역을 비교할 때 확인된다.
- 고의적 변경
사본을 복사하던 서기관들이 난해한 낱말을 설명하기 위해 쉬운 말로 난외에 주석을 단 것이 본문 안으로 들어간 경우가 있다. 때로는 사본을 복사하는 서기관이 두 사본을 앞에 놓고 비교해가면서 복사하다가 서로 다른 낱말이나 구절이 있을 때 그 이문을 융합시키는 이문융합(異文融合 conflation) 현상도 있다.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역사를 보면 본문을 정확하게 베끼고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세기 중엽에 나온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에 보면, 그리스어 70인역의 원본 문제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는 오기가 많은 모세5경 사본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보관하고 있던 '성전 두루마리'가 권위있는 사본이라는 언급이 있다. 랍비 전통에서도 제2성전 시대에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최종 정착을 위한 본문비평이 성전 두루마리를 근거로 실시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 본문과 사본들
70인역 성서의 원본
70인역 성서란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전설적으로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70명 또는 72명의 번역자가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서 번역한 것이다. 70인역이 사용한 히브리어 원본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르며 70인역의 히브리어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마리아 5경
사마리아 5경은 히브리어 본문의 교정판이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서체는 마소라 본문에 사용된 네모꼴 히브리어 서체(square script), 일명 아시리아 서체(Assyrian script)가 아니라, 페니키아-고대 히브리어 서체(Phoenician-Old Hebrew script), 즉 고대 히브리어 서체(paleo-Hebrew script)로 씌어져 있다. 마소라 본문과 5경을 비교해볼 때 약 6,000여 곳의 차이가 있으나 철자상의 차이가 그 주종을 이루고, 다르다고 해도 본문의 의미상 다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마소라 본문과 다른 6,000여 곳 중에서 1,900여 곳은 70인역과 일치한다. 마소라 본문과의 차이점 중에서 극히 일부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학을 반영하는 고의적 변경도 있다(출애 20 : 17 끝부분에 그리짐 산에 성소를 지으라는 말이 첨가됨).
- 쿰란 본문과 다른 두루마리들
유대 광야 두루마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BC 150년경의 십계명과 〈신명기〉가 기록된 '나시 파피루스'가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유대 광야의 여러 동굴에서 두루마리가 발견되면서부터 BC 3~2세기의 것으로 추산되는 180여 종의 서로 다른 〈구약성서〉 사본들이 공개되었다. 이 사본들은 가죽과 파피루스 위에 씌어진 것들이다.
쿰란의 제1동굴에서는 2개의 〈이사야〉 사본이 발견되었다(→ 쿰란 종파). 하나는 BC 100~75년경의 것으로 추산되는 〈이사야〉 전체가 기록된 1QIsab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야〉의 일부만이 기록된 1QIsaa이다. 전자는 마소라 본문 〈이사야〉와 차이가 많고, 후자는 몇 개의 차이가 있지만 마소라 본문과 매우 가까운 본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쿰란 제4동굴에서는 〈창세기〉 단편 5개, 〈출애굽기〉 단편 8개, 〈레위기〉 단편 1개, 〈신명기〉 단편 14개, 〈여호수아〉 단편 2개, 〈사무엘〉 단편 3개, 〈이사야〉 단편 12개, 〈예레미야〉 단편 4개, 소예언서 단편 8개, 〈잠언〉 단편 1개, 〈다니엘〉 단편 3개 등이 발견되었다. 쿰란 제11동굴에서는 〈레위기〉 단편을 포함하여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본문 형태를 지닌 〈시편〉의 마지막 1/3이 발견되었다.
이들 사본들은 그 연대가 BC 250~200년에 이른다. 이들 중 더러는 70인역에 반영된 히브리어 본문과 그 형태가 유사하고, 더러는 사마리아 5경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전(前)마소라 본문 형태와 유사하다. 이것은 마소라 본문이 7세기경에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마소라 본문이 이미 기원전부터 현재의 본문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조금씩 개정되어왔을 가능성을 반영한다. 유대 광야에서는 쿰란 외에도 마사다(73년에 붕괴된 유대인의 요새)에서 〈레위기〉·〈신명기〉·〈에제키엘〉·〈시편〉 등의 단편이 발견되었고, 알 무라바아트에서는 〈출애굽기〉·〈레위기〉·〈이사야〉·소예언서 등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나할 레베르에서도 약간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사본의 본문 형태는 마소라 본문 형태와 거의 같다.
마소라 본문들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서 코덱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카이로 예언서'이다. 이것은 895년에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에서 모세스 벤 아셰르가 쓰고 모음 기호를 붙였다. 그다음으로 오래 된 것은 레닌그라드 코덱스인 '후기 예언서'(916경)이다. 벤 아셰르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모음 기호가 티베리아 마소라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다음의 것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알렙포 코덱스'이다. 솔로몬 벤 부야가 썼고,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가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마소라 주기를 붙인 것으로서,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사본은 〈구약성서〉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으나 모세5경과 성문서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예언서 부분만 그대로 남아 있다.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의 체제를 따르는 또다른 두 사본이 있다. 하나는 BM(4445) 사본으로서 모세5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9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다른 하나는 레닌그라드 사본으로서 〈구약성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MSB 19a 사본인데, 이것이 완성된 것은 1008년이다. 이밖에도 1105년에 씌어진 예언서 로이클린 코덱스(Codex Reuchliana of the Prophets)가 있다.
- 마소라 자료들의 대조
일찍이(1050 이전) 미샤엘 벤 우지엘이 자신의 책 〈키타브 알 훌라프 Kitab alHulaf〉에서 벤 아셰르의 마소라 본문과 벤 납달리의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바가 있다. 솔로몬 예디다 노르지는 〈민하트 샤이 Minhath Shai〉로 알려진 본문비평주석에서 방대한 양의 마소라 본문 자료들을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1626년에 완성하여 1742년에 나온 '만투아 성서'(Mantua Bible)에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벤저민 케니콧은 615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52개의 인쇄본을 수집하여 2권으로 편집했다(1776~80). 조반니 베르나도 데 로르시는 731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300개의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고(1784~88), C.D. 긴스부르크는 70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17개의 초기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다(1908~26).
- 인쇄본들
1488년까지는 랍비의 주석성서에 포함되는 낱권들만 나왔다. 〈시편〉(1477)·〈모세5경〉(1482)·〈예언서〉(1485/86)·〈성문서〉(1486/87) 등이 이탈리아에서 인쇄되어 나왔다.
〈구약성서〉의 첫 인쇄본은 1488년에 이탈리아의 손시노에서 나온 것이다. 이어서 1491, 1493년에는 나폴리에서, 1494년에는 브레스키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인쇄되어 나왔다. 이상 3권은 유대교 쪽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교 쪽에서 나온 첫번째 〈구약성서〉는 스페인의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가 감수한 전 6권의 '콤플루툼 학파 대역 성서'(Complutensian Polyglot)이다. 이중 4권에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온켈로스의 아람어역(타르굼) 모세5경이 들어 있다. 알칼라에서 인쇄되었으며(1514~17), 1522년에 유포된 것으로서, 이 성서는 서유럽에서 히브리어 본문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히브리어 자음 본문에 모음 기호와 억양 부호가 첨가된 본문을 중심으로 아람어역 타르굼이 대조되어 있고, 중세기에 나온 유대교 랍비들의 주석이 함께 편집되어 있는 성서를 '랍비 성서'라고 하는데, 최초의 '랍비 성서'는 펠릭스 프라텐시스가 편집하고 다니엘 봄베르크가 출판한 것(1516/17)이다. '제2 랍비 성서'는 야코프 벤 하임 이븐 아도니야가 편집하고 봄베르크가 출판한 것으로서,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는데(1524/25),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전해져온 히브리어 성서의 표준판이 되었다. 이 성서에는 그 이전의 어떤 편집에서도 볼 수 없던 광범위한 마소라 주기 곧 본문비평 자료들이 들어 있다. 다만 불행하게도 벤 하임이 사용한 사본들이 후대의 것이고, 히브리어 본문이 단일 전승을 반영하지 못하며, 여러 사본의 본문을 절충하여 만든 본문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런던에서는 긴스부르크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서의 비평적 편집본이 나왔다(1894, 1908, 1926). 마소라 본문과 인쇄되어 나온 여러 사본들 및 고대역들과 대조하여 개정된 것이다. 긴스부르크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교 학자였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긴스부르크가 편집한 이후에 독일의 성서학자 루돌프 키텔과 파울 칼레가 편집한 히브리어 〈구약성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가 나왔다. 이 책은 처음 2판에서 벤 하임의 '제2 랍비 성서' 본문을 사용했으나, 알브레히트 알트와 오토 아이스펠트가 편집한 제3판(1937)부터는 벤 하임의 본문 대신 레닌그라드 코덱스(B 19a)를 사용했다. 이 편집본에는 2종류의 본문비평 장치가 있다. 하나는 편집자의 생각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항이나 극히 경미하다고 생각되는 사본상의 차이점을 열거해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비평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나 편집자의 판단에 사본상의 중대한 차이점으로 생각되는 사항들 및 편집자 자신의 비평적 견해를 적은 것이다. 1957년판에서는 유대 광야 두루마리와 비교한 것이 첨가되었다. 1960년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또다른 비평적 편집본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본 본문으로는 알레포 코덱스의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했으며, 사본 비교, 고대역 비교 등이 포함된 본문비평 장치는 현재까지 나온 다른 어느 비평적 편집본보다 더욱 더 방대하고 철저하다. 1965년에 〈이사야〉 견본이 나왔다. 가장 최근의 비평적 편집본은 K. 엘리거와 W. 루돌프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서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 1967/77)이다. 이것은 키텔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3판을 거의 40여 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학계에 내놓은 것이다. 편집진과 본문비평장치 집필진이 거의 다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작성 원칙과 배열방식도 완전히 그 면모를 바꾸었다.
■ 초기 역본들
- 아람어 타르굼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타르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타르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타르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타르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타르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타르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타르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타르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위요나단 타르굼).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타르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타르굼도 있다. 유대인의 타르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타르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 70인역성서(LXX)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배경에 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언급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가 이집트를 다스릴 때 기록된 편지임을 드러내려고 당시 관리로 있던 아리스테아스라는 그리스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학자들이 와서 히브리어 율법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된 사정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가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필로·요세푸스·〈탈무드〉·교부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편지의 저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율법서 번역이 끝난 다음에 이와 같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70인역이란 BC 3세기 중엽에 번역된 구약의 모세5경 곧 율법서 부분을 일컫는다.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그리스어로 번역되기까지는 그후 1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보고, BC 1세기까지는 번역이 완료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70인역 성서는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이방 세계에 알리는 통로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70인역을 자기들의 성서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유대교에서는 70인역을 버리고 자기들의 히브리어 본문성서를 다듬는 일에 더 열성을 보였다. 제2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편집되면서, 히브리어 본문과 70인역 사이의 차이점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되자,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읽던 사람들 쪽에서 최신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퀼라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테오도티온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티온이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티온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 성서'(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투스(교황 식스투스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 아르메니아어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아르메니아 문학).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 그루지야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그루지야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루지야 문학). 그러나 그루지야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 에티오피아어 역본
4,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에티오피아 문학).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 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 고딕 문학).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 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 라틴 문학).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수스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신학적 토론과 예배의식에서 사용되는 통일된 본문이 필요하게 되자, 다마수스가 이 일을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에게 맡겼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실력을 고루 갖춘 그리스도교 성서학자였다. 그는 3종류의 라틴어 〈시편〉 개정판을 낸 바 있다. 첫번째 개정은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되었으므로 '로마 시편'이라고도 한다. 2번째 개정은 팔레스타인에서 펴낸 것인데, 헥사플라 70인역에 입각하여 라틴어 역을 히브리어 원문 쪽에 가깝게 개정했다. 갈리아 지방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으므로 갈리아 시편이라고도 한다. 후에 이 시편이 불가타 역에 그대로 들어간다. 3번째 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번역이다.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지만 널리 유포되지는 못했다. 이것을 준비하는 동안 히에로니무스는 고대 라틴어 역을 다만 그리스어 역에 근거하여 개정한다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 성서를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390년에 시작하여 405년에 끝냈다. 그러나 이미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의 라틴어 번역이 70인역의 내용과도 달랐고 고대 라틴어 역과도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읽어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 오히려 라틴어 역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지도자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 성서로 인해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가 갈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걸렸지만 결국 히에로니무스의 새 라틴어 역은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8세기에 비로소 그의 번역은 라틴어 불가타가 되어서, 종교개혁 때까지 서방교회의 성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후로도 상당 기간 고대 라틴어 역과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역을 손으로 베껴서 보급하는 과정에서 번역문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 일종의 종합 본문이 되고 말았다.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본문의 변화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8, 000여 개의 사본들 사이에 이독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중세기에 불가타 역 회복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불가타 역을 공인하게 됨에 따라 개정본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고, 15세기 중엽부터 인쇄술이 발달하자 번역 본문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식스투스판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교황 클레멘스 8세가 1592년에 새 판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로마 교회의 공인 불가타가 되었다.
- 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 시리아 문학). 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마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 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누스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의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 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 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 아랍 문학).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 후기 및 현대 역본들(영어)
위클리프역본들
飜譯이라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영어 번역 성서는 '위클리프 역'(Wyclif's Version : 1382)이다. 이것은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서이다. 영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지 1,000여 년 만에 번역된 것이다. 그는 일반신도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성서를 번역했다. 그를 일컬어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와 함께 번역한 사람으로는 허포드의 니콜라스가 있다. 니콜라스는 〈구약성서〉 번역을 맡았으나 후에 추방되었다. 위클리프는 1380년에 〈신약성서〉를 번역했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완역은 1382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인쇄된 성서가 아니고 손으로 쓴 성서이다. 후에 J. 퍼비가 '위클리프 역'을 전체적으로 개역했다(1388). 위클리프는 1384년에 죽었다. 그러나 44년 후인 1428년에 그가 성서를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의 묘가 파헤쳐지고 그의 시신이 화형당했다.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서는 나온 지 33년 후인 1415년에 불태워지고 말았다. 당시 교회는 신도들이 성서 읽는 것을 금했었다. '위클리프 역'의 단점으로는 그것의 번역 대본이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 불가타였다는 점, 이미 낡은 번역이었다는 점, 고어투성이었다는 점, 독자를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 윌리엄 틴들의 역본
윌리엄 틴들은 먼저 〈신약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25년 쾰른에서 그것을 인쇄하여 4절판으로 출판했다. 보름스로 쫓겨간 다음 그곳에서 신약을 8절판으로 출판하여 3,000부를 몰래 영국으로 들여 보냈다. 일반신도들은 그것을 읽으려고 샀고, 워럼 대주교는 불태워버리려고 그것을 사들였다. 〈신약성서〉 번역을 마친 틴들은 곧바로 〈구약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30년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된 모세5경이 나온다. 그의 친구 G. 조이가 〈구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했는데, 〈시편〉에서 〈애가〉까지만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했고, 〈이사야〉는 라틴어 역에서 번역했다. '틴들 역 교정본'이 1535년에 나왔지만 아직 〈구약성서〉는 완역되지 않았다. 드디어 1536년 10월 6일 틴들은 교살되고 화형당했다. 틴들은 7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문장과 문체에도 유능한 학자였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의 80%가 틴들의 문체라고 한다. 그의 평생 목표는 평신도들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 마일스 커버데일의 번역본
1535년 10월에 나온 최초로 인쇄된 영어 성서이다. 번역자 마일스 커버데일은 함부르크에서 틴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번역은 유럽 대륙 취리히에서 인쇄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을 헨리 8세에게 봉헌했으며, 독일어 역과 라틴어 역 성서를 번역했다. 틴들의 〈신약성서〉와 모세5경도 참고했다고 한다. 커버데일 역은 틴들의 번역에 크게 의존하면서 아직 틴들이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독일어 역과 라틴어 역에서 거듭 번역하여 완성시켰다.
토머스 매튜 역본(1517)
틴들 역의 또다른 교정판이다. 1517년 유럽 대륙 안트웨르펜에서 인쇄된 것으로 생각된다.
큰 성서(La Grande Bible : 1539)
커버데일이 맡아서 펴낸 것으로, 틴들-토머스 매튜 역본(1537)의 재교정판이다. 이것을 '큰 성서'라고 하는 까닭은 판형이 유난히 컸기 때문이다. 1539년에 완성되어 성직자들에게 배포된다.
틴들의 번역 성서가 나오면서 1525~39년은 성서의 번역과 개역이 활발하던 기간이었다. 왕실 쪽에서의 묵인이 이런 번역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헨리 8세 때부터 가톨릭 쪽의 압력으로 번역이나 개역이 금지되기 시작한다. 틴들의 이름으로 된 성서 번역은 모두 금지되었고, 노동자나 여성은 성서를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큰 성서' 외에는 모든 성서가 금지되었고, '큰 성서'도 상류계급 사이에서만 읽혀졌다. 154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개신교도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일반 백성에게 성서를 보급하고 개방하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크랜머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자 타국으로 떠났던 종교개혁자들도 귀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치세 기간이 짧았고, 그의 뒤를 이은 메리 여왕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성서학자들이 약 300여 명이나 순교했다. 대주교 크랜머도 이때 순교했다. 커버데일은 유럽 대륙으로 피신하여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는 신학자 테오도르 베자와 장 칼뱅의 고향이다. 칼뱅의 동서였던 윌리엄 위팅엄이 존 녹스에 이어 제네바의 잉글랜드 교회 후계자가 되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제네바 성서' 발행에 가장 책임이 컸던 인물이다. 제네바 성서는 1560년에 완역되었다. 이 성서가 나오기까지 위팅엄을 도왔던 인물이 바로 커버데일 역을 냈던 커버데일이다.
제네바 성서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었다는 점인데 로베르 에티엔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제네바 성서는 큰 성서의 교정판이다. 틴들의 공헌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은 히브리어 본문과 라틴어 역 본문에 따라 철저히 교정된 것이다. 〈신약성서〉는 주로 틴들 역의 교정이다. 이 성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봉헌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에 즉위했고, 개신교 편을 강하게 들던 왕이었다. 제네바 성서가 당시 교회에서 '큰 성서'를 대신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신도들 사이에서는 널리 유포되었다. '감독성서'(1568)가 나올 때까지 이 두 성서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제임스 왕 역본이 나올 때까지 제네바 성서는 140여 회나 판을 거듭하면서 출판되었다.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가 바로 이 성서를 읽었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신대륙 북아메리카로 간 청교도들, 존 버니언, 셰익스피어, 심지어는 '제임스 왕 역본'을 낸 제임스 왕도 바로 이 제네바 성서를 읽었다. 제네바 성서의 〈신약성서〉는 1557년에 나왔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이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서인 제네바 성서 초판이다. 로렌스 톰슨(1539~1608)이 1576년에 제네바 성서의 신약을 교정하여 내놓았다. 주로 베자의 라틴어 역 〈신약성서〉(1565)와 비교하여 교정했는데, 이 교정도 1615년까지 45판이나 판을 거듭했다. 이것을 흔히 제네바 톰슨 성서라고 한다. 톰슨이 교정한 제네바 성서를 유니우스(1545~1602)가 계속 교정하여 1592, 1594, 1596년에 나왔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인 유니우스가 〈요한의 묵시록〉의 주석을 내면서 제네바 톰슨 성서의 묵시록 부분을 교정하여 〈요한의 묵시록〉 교정을 합친 제네바-톰슨-유니우스 성서가 1603, 1606, 1607년에 출판되었다.
감독성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제네바 성서가 읽히고, 교회의 강단에서는 '큰 성서'가 읽히고 있었다. 제네바 성서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던 대감독 파커는 '큰 성서'를 교정하여 기존의 두 번역성서를 대치하고자 했다. 교정 작업에 대거 참석했던 이들이 감독들이었으므로 이것을 감독성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서〉 본문은 제네바 성서 그대로이고, 〈신약성서〉 본문은 파커 대감독 자신이 많이 교정했다.
(1582/1610)로마 가톨릭 측에서 번역해낸 일상어역이다. 프랑스 랭스의 앨런 추기경이 시작했고, 본격적 작업은 두에대학교 히브리어교수였던 그레고아르 마르탱이 맡았다. 〈신약성서〉가 1582년에 나왔고, 〈구약성서〉도 곧이어 완역되었으나 출판 비용이 없어서 지연되다가 대학이 랭스에서 두에로 옮긴 뒤인 1609~1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랭스 〈신약성서〉로 알려졌으나, 〈구약성서〉·〈신약성서〉는 두에 성서로 불린다.
엘리자베스의 오랜 통치가 1603년에 끝났다. 여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크게 진전되었다. 1604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로 등극했다. 즉위하던 첫해 그는 원전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 번역을 지시했다. 1604년 6월 30일 제임스는 학자 54명을 임명하여 새 번역에 참여하게 했다. 현존하는 기록에는 실제로 번역에 참여한 학자가 49명으로 나온다. 모두 6개 반으로 나뉘어 4개 반은 구약을 번역했고 2개 반은 신약을 번역했다.
웨스트민스터 1반은 5경을 포함하여 〈역대기 상〉까지, 케임브리지 1반은 〈역대기 하〉에서 〈전도서〉까지, 케임브리지 2반은 외경 나머지와 므나쎄의 기도까지, 옥스퍼드 1반은 예언서를, 옥스퍼드 2반은 복음서·〈사도행전〉·〈요한의 묵시록〉을, 웨스트민스터 2반은 나머지 서신을 번역했다. 번역을 시작한 지 7년 만인 1611년에 번역이 완성되었다. 70인역 이후 2번째로 왕의 지원으로 번역된 성서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틴들과 커버데일 번역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라틴 역본, 랭스의 신약,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의 영향도 받았다.
1611년 이 번역본이 나올 때 'He'판과 'She'판, 2가지 판으로 나왔다. 이것은 일부러 2가지 판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쇄자의 오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룻기〉 3장 15절 끝에 성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보아스로 보아서 "He went into the city"라고 한 인쇄본과, 룻으로 보아서 "She went into the city"라고 한 인쇄본 때문에 본의 아니게 He판과 She판이 생긴 것이다. 한국어 개역 성서의 본문은 "(보아스가) 보리를 6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라고 하여 He판의 이해를 따르고 있고, 난외주(欄外註)는 시리아어 역 페시타와 라틴어 역 불가타를 따라 "이워주니 그가(룻이) 성으로 돌아가니라"라고 번역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She판의 이해를 따른 것이다. 1631년판에는 아주 치명적인 오기가 생겼는데, 이 오기 때문에 '악한 성서'(Wicked Bible)라는 별명이 생겼다. 〈출애굽기〉 20장 14절 "간음하지 못한다"가 not이 빠져서 "간음 할지니라"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쇄소는 이것 때문에 당시 300파운드의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1717년판에는 〈루가의 복음서〉 20장의 머리제목의 포도원(vineyard)이 초(vinegar)로 잘못 인쇄되어, 그만 '초 성경'(Vinegar Bible)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왕의 후원으로 번역된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혀야 했으며, 거의 40여 년 동안이나 반대자들과 싸워야 했다. 또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때 사용된 원본이 그다지 좋은 사본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1611년 발간된 이래 1615, 1629, 1638, 1654, 1701, 1762(케임브리지 성서), 1769년(옥스퍼드 성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영어 개역 성서(English Revised Version : 1881/85)
제임스 왕 역본의 본격적 개정작업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제임스 왕 역본의 〈신약성서〉가 대본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사본은 아주 빈약한 것이었고, 그후 새로이 권위있는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므로 개역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1870년에 개역에 착수하여 1881년 〈신약성서〉 개역이 나왔다. 영국에서는 그해 5월 17일, 미국에서는 3일 후에 같은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제임스 왕 역본에서 거의 3만 여 곳을 고쳤다. 그중에 5,000여 곳은 제임스 왕 역본이 사용한 사본과 영어 개역 성서가 사용한 사본과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서〉가 나온 것은 1885년이었으며 〈신약성서〉에 비해 개정범위가 좁았다.
미국 표준역 성서(American Standard Version)
영어 개역 성서가 제임스 왕 역본의 영국 개정판이라면, 미국 표준역 성서는 미국 개정판이다. 1900년에 〈신약성서〉가 나오고, 1901년에 〈구약성서〉가 나왔다. 이때 외경은 제외되었으며, 영국식 영어 표현들이 미국식 영어표현으로 바뀌었다.
개역 표준 성서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1901년에 나온 미국 표준역 성서의 개정판이다. 1928년 미국교회협의회 그리스도교 교육부가 미국 표준역 성서에 대한 판권을 갖게 되면서, 번역 본문에 대한 보호를 더욱 철저히 하게 되었다. 1937년 그리스도교 교육부에서는 미국 표준역 성서를 개정할 것을 결의하고 작업을 시작한 결과 1946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을 출판하고, 1952년에 〈구약성서〉 개정판을 출판했다. 이것이 바로 개역 표준 성서이다. 20여 개 대학과 신학교에 적을 둔 32명의 성서학자들이 작업을 맡았으며, 그중에는 유대인 학자도 1명 있었다. 1957년에 개정판이 나올 때 외경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이것은 성서 번역에서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를 반영시킨 최초의 번역이기도 하다.
- 유대교 영어 역본들
영어권에 살던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제임스 왕 역본과 영어 개역 성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인들로서는 그리스도교 쪽에서 번역한 이런 성서들을 사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히브리어 본문 전승이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 〈구약성서〉에 대한 유대교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번역, 〈구약성서〉의 몇몇 절들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해석들이 그들에게 불편을 주었다. 그리하여 미국에 있는 유대교 출판협회가 1955년에 유대교 학자들로 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여, 율법서(1962)·예언서(1978)·성문서(1982)를 출판했고, 1985년에 개정판을 출판했다(→ 미국 유대인 출판협회).
새 영어 성서(New English Bible : 1961, 1970)
기존 번역의 개정이 아닌, 철저한 새 번역이고, 영국식 영어 번역이다. 또한 전통적인 성서식 영어가 사라진 번역이다. 1946년에 번역을 시작하여, 1961년에 〈신약성서〉를, 1970년에 〈구약성서〉를 출판했다. 1970년에 완역이되어 나온 성서는 1주일 만에 3만 3,000부가 매진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 가톨릭 역본들
가톨릭 쪽에서는 20세기 전반부까지는 두에랭스 성서를 사용했으나, 중세기 후반부터는 독자적인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R. 녹스가 번역한 〈신약성서〉(1945)와 〈구약성서〉(1949)가 나왔고, 195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1936년에 그리스도교 교리협회에서 새 번역 계획을 세워 라틴어 불가타 역을 대본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했다(1941). 그러나 1943년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라틴어가 아닌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 성서를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을 계획하여, 협회번역(Confraternity Version)이 나오게 되었다(1952/61). 이것이 나중에 새 미국 성서(New American Bible)가 되었다. 구어체 성격의 또다른 역본인 예루살렘 성서(Jerusalem Bible : 1966)는 프랑스어판 예루살렘 성서(La Bible de Jerusalem : 1956)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현대 영어 성서(Today's English Version : 1966/76)
복음 성서(Good News Bible)라고도 한다. 미국 성서공회가 구어체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번역원칙상 전통적인 형식일치의 문자적 번역을 피하고, 내용일치의 의역을 시도했다. 1966년에 〈신약성서〉가 나왔고, 1976년에 〈구약성서〉가 나왔으며, 1979년 외경이 번역되었고, 199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새 국제역 성서(New International Version : 1973/78)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영국·아일랜드·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개혁교회가 연합하여 번역했다. 1973년에 〈신약성서〉가 나왔고, 1978년에 〈구약성서〉가 나왔다. 발행자와 판권 소유자는 뉴욕 국제성서공회(New York International Bible Society)로 되어 있다. 전통적 어법과 표현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본문비평의 결과를 번역에 많이 반영시킨 것이 특징이다. 〈구약성서〉 중에서 특히 〈사무엘〉과 〈이사야〉 등에는 사해 두루마리 사본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새 제임스 왕 역본(New King James Version : 1979/82)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을 현대화한 것이다.
- 신개역 표준 성서(New Revised Standard Version : 1989)
미국에서 나온 개역 표준 성서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1974년에 개정 작업이 시작되어 1989년에 출판되었다. 3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개정위원회에는 가톨릭 학자 6명과 동방정교회 소속학자, 유대교 학자도 각각 1명씩 있었다. 〈구약성서〉의 경우는 사해 두루마리 사본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 개역 영어 성서(Revised English Bible)
영국에서 나온 새 영어 성서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1989년에 나온 것이다.
■ 후기 및 현대 역본들(유럽 대륙)
프랑스어 역본들
처음으로 프랑스어 완역 성서가 나온 것은 13세기였다. 파리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자들을 동원하여 번역했는데, 그 대본은 라틴어 성서였다. 1487년에는 가톨릭 학자들이 성서를 번역하여 '큰 성서'로 출판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탕으로 알려진 피에르 로베르가 성서를 번역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했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뱅이 서문을 썼다. 1553년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이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의 장절을 구분하여 출판했다. 19세기 후반에 루이 스공이 프랑스어 역 〈구약성서〉(1874)와 〈신약성서〉(1879)를 출판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20세기에는 1956년에 완역된 도미니쿠스 수도회 학자들이 번역한 예루살렘 성서(La Bible de Jerusalem)와 1971~75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가 있다.
독일어 역본들
6세기에 고트어로 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었으며, 8세기에 와서 라틴어 역에서 번역된 〈마태오의 복음서〉가 바이에른(독일 남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9세기에 복음서들의 발췌 번역과 〈시편〉 번역이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 성서(Augsburg Bible)로 알려진 〈구약성서〉는 1389~1400년에 나왔다. 최초의 인쇄본 성서인 멘텔 성서(Mentel Bible)가 1466년에 나와 1533년까지 18판이 나왔다.
독일에서 성서 번역의 신기원을 이룬 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이다.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신약성서〉가 나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제2판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다. 뒤이어 나온 〈구약성서〉는 브레시아 히브리어 성서(Brescia Hebrew Bible : 1494)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터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독해력은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의 번역에는 11~12세기 프랑스의 랍비였던 라시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1534년 루터 역 성서가 완역되었다. 루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번역을 계속 개정했으며, 1534~46년에 11번이나 개정을 거듭했다. 마지막 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가톨릭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히에로니무스 엠세르의 번역은 불가타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지만, 루터 역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534년 요한 디텐베르거가 마인츠에서 엠세르의 번역·개정판을 낼 때 재세례파(개신교의 한 분파) 역과 1529년의 취리히 번역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톨릭의 표준 번역이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그뤼네발트 성서(Grunewald Bible : 1956년에 7판이 나옴)는 가장 주목할 만한 역본이다.
12~13세기에 독일어로 번역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이디시어 역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디시 문학). 인쇄본으로서는 야콥 벤 이삭 아슈케나지의 〈체나 우레나〉(Tzenah u-Rena : 1616)가 있다. 유대교에서 번역한 최초의 독일어 역 〈구약성서〉는 모세 멘델스존의 번역으로 1780~83년에 나왔다.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지만 히브리어로 쓴 것이다. 〈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어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역본은 고트홀트 살로몬의 역본이다(1837). 마르틴 부버와 프란츠 로젠츠바이크가 히브리어 문체의 특성을 살린 번역을 했다(1925). 최근의 역본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Die Bibel Einheitsübersetzung : 1980), 현대 독일어 성서(Die Bibel im heutigen Deutsch : 1982), 공동번역 성서에 프랑스어 예루살렘 성서의 해설을 함께 단 새 예루살렘 성서(Neue Jerusalemer Bibel : 1985)가 있다.
■ 아시아의 역본들
중국어 역본들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7세기에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3세기에 가톨릭이, 19세기에 개신교가 들어갔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은 개신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10년에 선교사 마르시만이 〈마태오의 복음서〉를 번역했다. 1822년에는 〈구약성서〉·〈신약성서〉가 간행되었다. 중국어 성서의 대표적인 두 역본은 대표역본(Delegates Version : 1854)과 화합역본(和合譯本 Union Version)이다. 대표역본은 '하느님'을 '신'(神)으로 표기한 '신판'(神版)과 '상제'(上帝)로 표기한 '상제판'(上帝版)으로 출판되었다. 화합역본은 중국의 표준 역본으로서 1891년에 시작하여 1919년에 완료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의 역본으로는 홍콩 성서공회에서 간행된 현대중문역본(現代中文譯本 Todays Chinese Version : 1979)이 있다.
일본어 역본들
최초의 번역은 귀츨라프의 〈요한의 복음서〉를 번역한 것이다(1837). 1880년에 〈신약성서〉가 번역되고 1888년에 〈구약성서〉가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역[明治譯]이다. 1917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이 나왔으며, 1954년에는 메이지 역에 이어 2번째로 완역 성서가 나왔다. 이것은 구어(口語)로 개정되어 나온 성서로서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인다. 1970년에 기존 역본을 개정한 신개역이 나오고, 1978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신약이 나왔고, 1987년에는 신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 한국어 역본들
- 예수 셩교젼셔(1887)
한국어로 완역된 최초의 〈신약성서〉이다. 번역자들은 J. 로스, J. 매킨타이어, 이응찬(李應贊), 김진기(金鎭基), 백홍준(百鴻俊), 이성하(李成夏), 서상륜(徐相倫) 등이다. '로스 역 〈신약성서〉라고도 한다. 1887년에 〈신약성서〉 27권의 합본이 나오기에 앞서, 1882년에 〈루가의 복음서〉부터 낱권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신약젼서(1900)
H.G. 언더우드, H.G. 아펜젤러, M.N. 트롤롭, S. 게일, W.B. 스크랜턴, 최병헌(崔炳憲), 조한규(趙閒奎), 정동명(鄭東鳴), 이창식(李昌植), 김명준(金明濬), 홍준(洪埈)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완역된 최초의 공인번역 신약전서가 되었다. 1900년 9월 9일 정동감리교회에서 이것을 감사·봉헌하는 예배가 있었다. 1904, 1906년에 걸쳐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다.
- 구약젼셔(1911)
레이놀스, 언더우드, 게일, 이승두(李承斗), 김정삼(金鼎三) 등이 번역한 최초의 완역 한국어 〈구약성서〉이다. 이것이 나옴으로써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합친 성서를 가지게 되었다.
- 신역 신·구약전서(1925)
게일과 이원모(李源謀)의 역본이다. 성서공회에서 다른 역자들과 함께 성서를 번역하다가, 번역원칙에 뜻을 달리한 게일과 이원모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짧게 줄인 풀이역이 특징이다.
- 셩경 역(1938)
1900년의 〈신약성서〉와 1911년의 〈구약성서〉를 개정한 것이다. 1936년에 구약전서(개역)가 나왔고, 1938년에 신약전서(개역)가 나왔다. 이 둘을 합본하여 펴낸 것이 셩경 역이다. 개역된 것이지만 옛 맞춤법으로 출판했다.
-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2)
성경 역을 '한글 맞춤법통일안'에 따라 다시 출간한 것이다.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된 뒤로, 한글학자들을 비롯하여 각계에서 성서공회에 개역 성서에 새 맞춤법을 채택해줄 것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1938년 개역은 끝내 옛 맞춤법을 채택했었다. 그러다가 1952년판에 이르러서 '한글 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역을 다시 편집·출간했으므로, 이 성서를 개역 한글판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글판'이라고 한 것은 아직 옛 맞춤법 표기를 그대로 쓴 개역성서가 계속 출판되고 있었으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6)
개역 성서의 최종 개정판이다. 1952년판 개역 성서를 800여 곳이나 고쳐서 출간했다. 신약전서 개역 한글판을 1956년에 출판했고, 다음해인 1957년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합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을 출판했으나, 여전히 남은 오기와 오역이 있었으므로 다시 300여 곳을 고쳐서 1961년에 최종 수정판을 출판했다.
- 신약전서 새 번역(1967)
한국의 성서학자들이 그리스어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으로서, 개역 성서 이후의 첫번째 새 번역이다. 〈신약성서〉만 나오고 뒤이어 〈구약성서〉가 나오지 못했다.
- 공동번역 성서(1977)
대한성서공회는 1968년에 세계성서공회연합회와 바티칸의 교회일치진흥국 사이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서 공동번역 계획이 합의됨에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교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성서 공동번역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여 1971년 공동번역 신약을 출판했고, 1977년 〈구약성서〉와 외경까지 완역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출판했다. 1977년판 〈구신약성서〉는 개정판이다.
- 성경전서 표준 새 번역(1993)
1983년 번역에 착수하여 1993년에 출판한 새 번역이다. 개역 성서의 개정이 아닌 새로운 번역이다. 현대 한국어,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표현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예배와 교육에 적합한 번역이 되도록 했으며, 고유명사의 음역은 개역 성서를 따르고,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써온 용어는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 번역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네 글자 YHWH를 '여호와'라고 번역하지 않고, 마소라 본문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번역 전통을 따라 '주'(主)로 번역했다.
■ 〈신약성서〉 27권
1~2세기에 씌어진 27권의 작은 책들이 모여 〈신약성서〉를 형성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하고 이해하고 해석한 교회 자체의 자기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초대 교회에서 유포된 여러 문헌들 가운데서 교회가 27권을 경전으로 구별했다. 경전(Canon)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논(kanon)은 길이를 측량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법이나 표준을 뜻한다. 27권 외에도 〈디다케 Didache〉(12사도의 교훈)·〈베드로의 복음서〉·〈클레멘스의 첫째 편지〉·〈바르나바의 편지〉·〈베드로의 계시록〉·〈헤르메스의 목자서신〉 등의 기록들이 유포되고 있었으나, 경전에 들지는 못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4세기까지 복음서 4권(마태·마르·루가·요한), 사도들의 행적 1권(사도), 21통의 편지(로마·Ⅰ 고린·Ⅱ 고린·갈라·에페·필립·골로·Ⅰ 데살·Ⅱ 데살·Ⅰ 디모·Ⅱ 디모·디도·필레·히브·야고·Ⅰ 베드·Ⅱ 베드·Ⅰ 요한·Ⅱ 요한·Ⅲ 요한·유다), 묵시록 1권(요한의 묵시록)을 경전으로 확정했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70인역 역시 초대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인 경전이다. 초대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신약(새 언약)을 구원의 성취로 보았으므로, 구약을 구원의 약속으로 보고 이름을 구약(옛 언약)이라고 불렀다. 〈신약성서〉는 교회가 없었더라면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교회가 〈신약성서〉에 포함된 기록들을 읽고 성장하지 못했더라면 그런 기록을 경전으로 고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경전화 과정
경전화 작업에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2세기말 이레나이우스가 열거한 〈신약성서〉는 4복음서, 바울로의 13서신 및 〈베드로의 첫째 편지〉·〈요한의 첫째 편지〉·〈요한의 둘째 편지〉·〈요한의 묵시록〉·〈헤르마스의 목자서신〉(이 책은 나중에 경전에서 제외되었음)·〈사도행전〉이다. 디아테사론(Diatessaron : '4복음서를 통하여')도 널리 유포되어 읽히고 있었다.
〈신약성서〉의 경전의 범위를 뚜렷하게 밝힌 것으로서는 소위 '무라토리우스 경전'(Muratorian Canon)이 있다. 이것은 170~180년경에 로마에서 씌어진 것인데, 발견자 안토니오 무라토리의 이름을 따서 '무라토리 경전'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신약성서〉 경전은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로의 13서신, 〈유다의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묵시록〉이다. 여기에는 〈헤르마스의 목자서신〉은 들어 있지 않다. 대신 〈솔로몬의 지혜서〉가 들어 있다. 사도성, 참교리, 광범위한 유포, 이 3가지가 2세기 경전의 기준으로 정해졌다. 〈헤르마스의 목자서신〉·〈클레멘스의 첫째 편지〉·〈디다케〉는 교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고, 교리에 있어서도 벗어남이 없었으나 사도성이 없다는 것 때문에, 즉 사도 시대와 관련이 없고 사도가 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전에 들지 못했다. 3세기에 와서 오리게네스(254경 죽음)는 〈신약성서〉의 낱권 책들을 '아무런 논란없이 인정된 책들'과 '논란이 되고 있는 책들'로 나누었는데 4복음서, 바울로의 13서신, 〈베드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사도행전〉, 〈요한의 묵시록〉은 전자에 속하고, 〈베드로의 둘째 편지〉·〈요한의 둘째 편지〉·〈요한의 셋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야고보의 편지〉·〈유다의 편지〉는 후자에 속했다. 이밖에 〈이집트인의 복음서〉·〈도마의 복음서〉는 그가 '가짜'(notha)로 분류했다. 〈디다케〉·〈바르나바의 편지〉·〈헤르마스의 목자서신〉과 같은 책에다가 그는 '성서'(Scripture)라는 칭호를 붙이기는 했으나 경전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4세기에 유세비우스는 당시에 경전이 된 책의 명단을 보여준다. 논란이 없이 인정된 것은 4복음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한) 바울로의 14서신, 〈요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첫째 편지〉였다. 논란이 된 것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교회 안에서 신도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있던 〈야고보의 편지〉·〈유다의 편지〉·〈베드로의 둘째 편지〉·〈요한의 둘째 편지〉·〈요한의 셋째 편지〉였고, 또다른 한 부류는 '가짜'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불결하거나 불경한 것이 아닌 〈바울로 행전〉·〈헤르마스의 목자서 신〉·〈베드로의 묵시록〉·〈바르나바의 편지〉·〈디다 케〉·〈히브리인의 복음서〉와, '가짜'이면서 이교적인 〈베드로의 복음서〉·〈요한행전〉 등이었다. 〈요한의 묵시록〉은 논란없이 인정된 명단에도 들어 있었고, '거짓'이기는 하지만 불결하거나 불경한 것이 아닌 책들의 명단에도 들어 있었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 때 현재의 〈신약성서〉 27권이 확정되었다.
〈신약성서〉의 본문과 번역본
- 〈신약성서〉 사본의 상태
〈신약성서〉의 경우 사본들이 많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사본을 제외하고도 3~18세기에 이르는 사본들이, 어림잡아서 복음서가 2,000여 권, 〈사도행전〉과 바울로의 13서신 및 공동서신을 합한 것이 400여 가지, 성서 본문이 인용된 성구집이 2,000여 권에 이른다. 여기에다 교부들이 인용한 성서 구절까지 합치면 〈신약성서〉 본문을 베낀 사본들의 수는 실로 방대하다. 〈신약성서〉는 이처럼 다른 일반 문학작품에 비해 사본의 수가 방대하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이렇게 방대한 사본들을 모으고, 본문상의 차이를 비교하고, 각 사본의 연대, 그것이 씌어진 장소, 편집형태, 개정여부 등을 비교·검토해보면, 사본의 수가 엄청난 만큼이나 사본들 사이에 본문의 차이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교부들이 인용한 성서 구절은 기록된 본문전승을 반영하는 것도 있지만, 기억에 의존하여 인용한 것, 인용하다가 이문(異文 different reading)을 융합한 것, 병행구조를 조화시킨 것, 또는 개략적으로 내용만 인용한 것 등 여러 형태이다.
- 필기도구
헬레니즘 시대에 공적인 기록은 비석이나 금속판에 새겼다. 문학작품이나 편지는 양피지파피루스에 썼다. 잠시 동안만 기록해둘 것은 질그릇 조각(오스트라카)이나 밀랍판에 썼다. 파피루스 조각을 풀로 부치거나 양피지 조각을 꿰매어서 두루마리를 만들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종교문헌이나 문학작품이 이런 두루마리에 기록되었다. 〈신약성서〉를 베낀 교회는 두루마리보다는 책 형태인 코덱스를 사용했다. 재료는 파피루스로 된 것도 있고 양피지로 된 것도 있다. 앞뒤 양쪽에 글을 쓸 수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값싼 파피루스로 만든 코덱스를 사용했고,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비로소 값비싼 양피지 〈신약성서〉 사본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일찍 만들어진 〈신약성서〉 사본들이나 단편들은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들이다. 인쇄술이 발달될 때까지는 양피지가 가장 좋은 코덱스의 재료였다. 4~15세기의 〈신약성서〉 사본들은 양피지로 된 코덱스가 많다. 양피지 코덱스는 본래 씌어진 본문을 지우고 다시 쓰기도 했다. 이러한 사본을 '지우고 다시 쓴 사본'(palimpsest : 그리스어로 '다시'라는 뜻의 palim, '지우다'라는 뜻의 psao를 합쳐서 만든 말)이라고 한다(→ 팰림프세스트). 이런 사본은 특수 처리를 하면 지워진 본문을 다시 재생해볼 수 있다. 때로는 이런 사본에서는 다시 쓴 본문보다 재생된 원래의 본문이 더 큰 가치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신약성서〉시대에는 그리스어 글씨체가 대문자체(majuscules : uncials)와 소문자 필기체(minuscules)의 2종류로 나뉜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소문자 필기체가 주로 사용되었다. 4~9세기의 〈신약성서〉 사본 양피지에는 대문자 글씨체와 소문자 필기체가 함께 나타나지만 그후부터 11세기까지 나온 사본들은 모두 소문자 필기체로 기록되어 있다. 초기에 나온 〈신약성서〉 사본들에는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끔씩 연자(連字) 부호인 하이픈을 넣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장·절의 구분도 되어 있지 않고, 구두점도 없으며, 오늘날 그리스어에서 볼 수 있는 억양이나 기음(氣音) 표시도 되어 있지 않다. 알파벳이 쭉 이어져 있을 뿐이다. 또 글자 위에 직선을 그어 표시한 약자들도 있다. 예를 들면 IC는 IHCOUC, 즉 '예수'의 약자이고, KC는 KYPIOC, 즉 '주'의 약자이다. 8~9세기의 사본에는 억양 표시와 기음 표시가 없다. 구두점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장이 구분된 것은 1200년경이고, 절이 구분된 것은 1550년경이다.
- 오기의 유형
사본을 베끼는 이들은 모본(母本)을 앞에 놓고 베끼기도 했고, 한 사람이 불러주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받아쓰기도 했다. 따라서 잘못 읽는 데서 생기는 오기, 잘못 듣는 데서 생기는 오기, 우연한 오기, 고의적 본문 변경에 따른 본문 이탈 등이 생기게 된다. 대문자체 사본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생긴 글자들 사이의 혼동에서 오는 오기들이 많이 발생했다. 초기 사본들에서는 관계대명사 OC(hos에 해당하는 글자)와 하느님의 약자 DC(DEOC, theos) 사이에 혼동이 발견된다. 중복오사와 중자탈오 현상도 보인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긴 오기도 많다. 영어로 예를 들면, GODISNOWHERE는 'God is now here'(하느님이 여기에 계신다)로 읽을 수도 있고, 'God is nowhere'(하느님은 아무 데도 안 계신다)로 읽을 수도 있다. 문맥에 따라 어떤 뜻으로 읽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동음이의어도 오기를 발생시키는 요인이다. 이런 종류의 실수는 그리스어의 어떤 모음과 복모음 사이에 발음상의 뚜렷한 구분이 없던 초기 사본으로 올라갈수록 더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e, i, u와 복모음 ei, oi, ui 등이 모두 '이'로 발음되었다. 철자가 다른데도 다 함께 '이' 발음을 내게 되는 것을 이타시즘(itacism : 또는 itacismo)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54·55절에서 nikos(승리)와 neikos(투쟁)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오기 neikos가 발생했다. 이런 이타시즘 현상은 복수 1인칭과 2인칭 대명사 '우리'(hemeis)와 '너희'(humeis)에서도 일어난다. he와 hu가 [hi]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다.
글씨체를 보고 사본의 연대를 측정하는 고문서학은 성서 사본의 연대측정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분야이다. 개인마다 필체가 다르듯이 세대마다 필체가 다르다. 방사능 연대 측정(radioactive-carbon text)도 있지만, 그것은 사본의 일부를 시험재료로 파괴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고, 고문서학의 필적감정보다 정확하지 않다는 문제점도 있다.
■ 본문과 사본들
17, 18세기에 알려진 대표적인 언셜 글씨체 사본들은 A, D, Dp, Ea, C 사본 등이다(→ 대문자).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A)는 〈신약성서〉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5세기초의 사본으로서, 복음서는 비잔틴 본문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나머지 〈신약성서〉의 각 책들은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1627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영국의 왕 찰스에게 증정한 것으로서 1751년 이래 지금까지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코덱스 베자 칸타브리기엔시스(D)는 5세기의 사본으로서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번역문의 대조판 사본이다. 4복음서, 〈사도행전〉, 〈요한의 셋째 편지〉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Dea로 표시된다. D는 서방 본문 전승을 반영하며, e는 evangelia, 곧 복음서를 가리키고, a는 acta, 곧 〈사도행전〉을 가리킨다. Dea의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다른 사본들에 비해 많이 다르다. 코덱스 베자는 뚜렷하게 길거나 뚜렷하게 짧은 본문들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된 편집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의 경우 다른 사본에 비해 코덱스 베자는 1/10이나 길다. Dea는 신학자이며 고전 학자인 테오도르 베자가 1562년 프랑스 리옹의 한 수도원에서 얻은 것이다. 테오도르 베자는 이 사본을 1581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에 기증했다. 그때부터 이 사본을 베자 칸타브리기엔시스라고 했다.
코덱스 클라로몬타누스(Dp) 역시 서방 본문이다. 여기에는 바울로 서신과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 있다. Dp라고 할 때 P는 바울로 서신을 가리킨다. Dp는 때로 D2로도 표기된다. Dea를 얻을 무렵과 같은 시기에 취득했다. 그러나 Dp를 얻은 장소는 클레르몽 수도원이었다. 그래서 이 사본을 클라로몬타누스라고 한다. 이 사본은 지금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코덱스 라우디아누스(Ea)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대조 〈사도행전〉인데 영국의 대주교 로드가 1636년에 옥스퍼드의 보들레이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6세기와 7세기초에 속하는 사본이다. Dea와 일치하는 데가 많다. 서방 본문이면서 비잔틴 본문과의 혼합을 보이기도 한다. 코덱스 에프라임(시리아 리스크립투스, C)은 재생 양피지 사본이다. 본래 씌어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것이다. 본래 씌어 있던 것은 5세기의 성서 사본이었으나, 12세기에 그것을 지우고 지운 본문 위에 4세기 시리아 교회의 교부였던 에프라임 시루스의 설교를 썼다. 1700년경 프랑스의 설교가이자 학자인 피에르 알릭스가 발견했다. 티셴도르프가 화학 약품을 써서 본래 거기에 씌어 있던 〈신약성서〉 본문을 60%까지 해독하여 1843년에 출판했다. 5세기 이후 그 성서 본문은 두 사람의 교정자가 교정했지만, 전체적으로 비잔틴 본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은 19세기까지 발견된 언셜 글씨체 사본들이다. 이런 사본들은 본문 비평에 큰 자료를 제공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새로운 언셜 글씨체 사본들이 더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S·B·W·O 등이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S)는 1859년 티셴도르프가 시나이 반도 산타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했다. 이전에 1844년 4세기의 성서 사본 43쪽이 발견되었는데, 〈구약성서〉의 일부는 빠져 있지만 4세기의 〈신약성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티셴도르프는 S사본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하고 그 사본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증정했다. 이 사본은 1933년까지 레닌그라드에 있다가 1933년 소련이 이것을 영국박물관에 10만 파운드에 팔았다. 옥스퍼드 출판부에서는 이미 1911년에 이 사본의 복사본을 출판한 바 있다. S의 본문 형태는 부분적으로는 서방 본문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 계통에 속한다.
코덱스 바티카누스(B)는 4세기 중엽의 사본으로서, 1475년 이래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889~90년과 1904년에 사진판으로 나온 적이 있다. 〈신약성서〉에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장 14절 이후가 없고, 목회서신·〈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요한의 묵시록〉이 없다. B사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므로 학자들에 따라서는 S사본보다 약간 고대의 것일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를 강하게 번역하는 B사본과 S사본은 둘 다 같은 때에, 곧 콘스탄티누스가 성서 50부를 제작하도록 명령했을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B사본은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를 반영하는 아주 초기의 사본으로서 가장 귀중한 고대 그리스어 본문이다.
코덱스 와싱토니아누스(W : 또는 프리리아누스) 는 4복음서 사본이다. 4복음서 순서가 서방 본문식으로(Dea처럼) 마태오·요한·루가·마르코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인 사업가이며 자선가인 C. L. 프리어가 1906년에 이집트에서 구한 것으로서, 지금은 워싱턴 D. C.의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예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명 '프리어 복음서'라고도 한다. W사본은 4~5세기경에 몇 가지 서로 다른 계통의 사본을 필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잔틴 본문 형태, 고대 라틴어역을 닮은 서방 본문 형태, 카이사리아 본문 형태,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다른 사본과 비교해볼 때 특이한 것은 〈마르코의 복음서〉의 16장 9~20절 안에서 14~15절이, 다른 사본과는 달리 더 길게 확대되어 있다는 점이다. 코덱스 코리데티아누스(θ)는 9세기 사본으로서, 그것이 발견된 카스피아 해 부근 카프카스 산 속에 있는 수도원의 이름 코리데티를 따서 부른다. 4복음서의 사본으로서 마태오·루가·요한은 대부분의 비잔틴 사본들과 유사한 본문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마르코는 3~4세기에 오리게네스가 사용했던 카이사리아 본문 형태와 유사한 본문을 가지고 있다. 이 사본은 그루지야의 수도 티플리스에 있다.
- 초서체 소문자 사본들
초서체 소문자 사본들은 대다수가 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극히 일부가 초기의 본문을 반영하고 있다. 20세기초 영국의 학자 K. 레이크가 '가계 1'(family 1 : f1, '레이크 그룹'이라고도 함)로 알려진 초서체 사본들의 계보를 추적해냈다. f1에 속하는 초서체 소문자 사본들 1, 118, 131, 209는 12~14세기경 씌어진 것들로서, θ사본에 반영된 3~4세기의 카이사리아 본문 형태와 유사한 본문을 지니고 있다. 19세기에 W. H. 페라르는 f13을 발견했다. 여기에 속하는 초서체 소문자 사본들은 13, 16, 124, 346인데, 일명 '페라르 그룹'이라고도 한다. 비록 일부는 후대(11~15세기)의 본문을 반영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카이사리아 본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초서체의 여왕'이라고도 하는 사본 33은 9~10세기의 것으로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요한의 묵시록〉을 제외한 〈신약성서〉 전체가 다 들어 있다. B사본과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사도행전〉과 바울로의 13서신은 비잔틴 본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교회에서 낭독되는 그리스어 성구집(Lectionaries)에 인용된 성서 본문도 대다수는 초서체 소문자 사본들을 반영하지만, 일부는 언셜 글자체 사본들을 반영한다. 성구집의 본문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여기에 반영된 본문 형태는 고대까지 소급되는 것들도 있다.
- 파피루스 사본들
이집트의 사막에 보관되어 있던 파피루스 사본들은 2~8세기의 〈신약성서〉 사본들이다. 금세기 최근 20여 년 동안에 발견된 〈신약성서〉 파피루스 단편 사본들이 출판되었다. 76개의 〈신약성서〉 단편 사본들 중에 반 이상이 2~4세기의 것이다. 파피루스 사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P52이다. 130~140년의 것으로서 현존하는 〈신약성서〉 사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한쪽 면에는 〈요한의 복음서〉 18장 31~33절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18장 37~38절이 기록되어 있는 코덱스형 사본 조각으로서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와 비슷하다. 현재 맨체스터의 존 라일런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30년대초 영국의 채광기술자 A. 체스터 비티가 이집트에서 3세기의 파피루스 사본 3개를 취득했다(→ 비티 성서 파피루스). 1934~37년 출판되었는데, P45, P46, P47로 분류되어 더블린에 있는 그의 개인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다. P45, 일명 '비티 성서 파피루스 I'(일부는 빈에 있음) 사본은 30쪽이나 되는데, 3세기초나 중엽의 코덱스로서 〈마태 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요한의 복음서〉·〈사도행전〉 등의 본문을 보여준다. 복음서들은 제각기 서로 다른 본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지워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가 주로 나타난다. 카이사리아 본문 이전 형태로 생각된다. P46, 일명 '비티 성서 파피루스Ⅱ'(미시간대학교의 파피루스 222를 포함)는 86쪽이다. 3세기초(200)의 코덱스로서 바울로 서신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 지〉·〈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 지〉·〈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어떤 부분은 많이 지워져 있으나, P46은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를 반영한다. P47, 일명 '비티성서 파피루스Ⅲ'은 3세기의 사본이며, 〈요한의 묵시록〉 9장 10절에서 17장 2절의 본문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묵시록 사본이기는 하지만 가장 좋은 사본은 아니다. 본문 형태는 A, C, S를 닮았다. 이밖에도 P66, P48, P72, P75, P74 등이 있다. P66은 146쪽이나 되는데, 파손된 부분이 더러 있는 〈요한의 복음서〉 사본이다. 제21장이 포함되어 있다. 이 코덱스는 200년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원본보다 100년 뒤의 것이다. 본문은 P45처럼 혼합 본문이지만, 초기 알렉산드리아 본문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P66과 다보드머 파피루스들은 스위스의 고본 수집가 마르틴 보드머가 이집트에서 구한 것으로서, 156~161년에 출판되었다. 제네바 근교에 있는 보드머 개인 도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P48은 3세기의 〈사도행전〉 사본으로 플로렌스의 한 도서실에 있다. 〈사도행전〉 23장 11~17절, 23~29절 본문을 가지고 있다. P75(보드머 파피루스 ⅩⅣ와 ⅩⅤ)는 2~3세기의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 사본이다. 본문은 B와 일치하는 곳이 많으나 알렉산드리아 본문 형태의 전신인 P66, P45 등과 유사한 점이 많다. P74(보드머 파피루스 ⅩⅦ)는 6~7세기의 〈사도행전〉과 공동서신 사본이다. 〈사도행전〉은 S 및 A와 유사하다.
■ 초기 번역본들과 그리스어 〈신약성서〉 편집본들
- 초기의 번역본들
〈신약성서〉가 씌어지던 무렵 지중해 동반부에서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통용되었으나, 다른 곳에서는 다른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로마가 지배 세력으로 군림했을 때 북아프리카·소아시아·갈리아·스페인 등에서는 라틴어가 새 언어로 등장했다(3세기경). 그리하여 고대 라틴어 곧 이탈리아어 번역 〈신약성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약성서〉의 경우 히에로니무스가 고대 라틴어 역과 그리스어 사본들을 참고하면서 라틴어 복음서 개정작업을 했다. 4세기말에는 〈신약성서〉 라틴어 번역 불가타가 나왔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관심 중 하나가 라틴어 역의 개정이었는데, 1592년에 클레멘스 8세의 이름을 딴 클레멘스 불가타가 나와서 권위본으로 인정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다시 불가타 개정 작업을 시작했다. 시리아의 에데사와 서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라틴어나 그리스어가 사용되지 않고, 시리아어(아람어와 관련된 셈어 중 하나)가 사용되고 있었다(→ 시리아 문학). 2세기에 나온 〈디아테사론〉의 원어는 시리아어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고대 시리아어 역 사본은 단편만 남아 있다. 〈페시타 시리아어 역〉(Syrpesh로 표기됨)은 4세기에 이루어진 역본이다. 〈신약성서〉 27권 중 22권이 들어 있으며 번역본문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필록세니아(Syrphil)와 하클리(Syrharc) 역본은 6~7세기의 것으로서 신약 27권이 다 들어 있다. 팔레스타인 시리아어 역(Syrpal)은 5세기에 번역된 것이지만 지금은 11~12세기의 성구집을 통해서 알려져 있고, 다른 시리아어 역과는 다른 본문 형태를 지녔다.
이집트에서는 3~6세기에 콥트어 역이 나왔다. 남쪽(상이집트)에서는 사히딕 역(Copsah), 북쪽(하이집트)에서는 보하이릭 역(Copboh)이 나왔다. 둘 다 엄격한 직역이며, 2~3세기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본문 형태를 반영한다. 드물게 서방 본문 형태도 발견된다.
고트어 역은 4세기에 선교사 울필라스가 비잔틴 본문형태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다. 5세기의 아르메니아어 역은 시리아어 역에서 거듭 번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아르메니아어 역본이 4~5세기에 나왔으며, 5세기에는 그루지야어 역, 6세기에는 누비아어 역, 6~7세기에는 에티오피아어 역이 나왔다.
- 후대 및 현대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편집본들
18세기의 〈신약성서〉 편집본들은 새로운 사본의 증거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소위 '공인본문'이라고 하는 텍스투스 레셉투스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 편집본들의 한계가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1719년에는 영국의 수학자 겸 신학자였던 웰스가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버리고 그것보다 더 고대의 사본들을 가지고 〈신약성서〉를 새로 편집했다. 1720년에 고대의 본문을 회복하려고 초기의 사본으로 되돌아가서 〈신약성서〉를 다시 편집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무시되어버리고 말았다. 1734년에 독일 루터교 성서학자 J. A. 벵겔은 사본들뿐만 아니라 사본의 계보들도 구별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고, 본문 비평의 기준을 계획했다. 1730~51년에 나온 J. J. 베트슈타인판 〈신약성서〉에는 옛 문헌이나 랍비들의 인용 자료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그가 편집한 본문보다는 본문에 관한 그의 이론이 더 탁월하다. 1767년에는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J.S. 제믈러가 벵겔의 사본 계보 분류를 더욱 정확하게 다듬었다.
독일의 학자이며 제믈러의 제자였던 J. J. 그리스바흐(1745~1812)는 본문 계보 분류를 콘스탄티노플 본문군(群)보다 앞서 있던 서방 본문군과 알렉산드리아 본문군을 포함시키는 데 적용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본문비평의 과학적 법칙을 따라 본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가 세운 법칙 중에 아직도 유용한 것은 "어려운 본문이 쉽게 읽히는 본문보다 더 원문에 가깝다"든가, "짧은 본문이 긴 본문보다 더 원문에 가깝다"는 것 등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언어학자 카를 라흐만은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무시하고 4세기 이전의 사본들을 사용하며 〈신약성서〉를 비평적으로 편집했다(1831). 티셴도르프의 시나이티쿠스 사본(S)과 그가 편집한 〈신약성서〉(제8판, 1864) 사본들을 비교해 보여주고 있으며, 풍부한 본문비평 장치를 제공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두 성서 학자, B.F. 웨스트컷과 F.J.A. 호트는 시나이티쿠스 사본과 바티카누스 사본을 사용하여 〈신약성서〉를 새로 편집했고, 본문을 중성적인 본문군(B, S, 가장 순수하고 오래된 동방 본문), 알렉산드리아 본문군(알렉산드리아에서 발전되는 동안 잘 다듬어진 중성 본문), 서방 본문군(D, 고대 시리아어, 고대 라틴어, 서방 교부들), 시리아 본문군(Ae와 비잔틴 전승) 등 4개 본문군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본문 가계도는 제임스왕 역본의 대본이었던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아주 열악한 사본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기에 반해 영어 개역 표준역(RSV)은 바티카누스 사본(B) 및 시나이티쿠스 사본(S)과 같은 우수한 본문 형태를 대본으로 번역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H. 폰 조덴이 또다른 비평적 편집본을 펴냈다(1902~13). 이 편집본에서는 사본군에 대한 그의 해박한 이론보다는 괄목할 만한 본문비평 장치가 더 귀중하다. 영국 학자 B. H. 스트리터는 웨스트컷과 호트의 사본 분류를 개정했는데(1924), 스트리터는 본문군을 알렉산드리아 본문군, 카이사리아 본문군, 안티오크 본문군, 유럽의 서방 본문군, 아프리카의 서방 본문군 등 5개 계통으로 나누었다.
현재 널리 읽히고 있는 비평적 편집본은 네스틀레-알란트의 '그리스어 〈신약성서〉'(Novum Testamentum Graece : 26판, 1983)이다. 에버하르트 네스틀레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처음 편집하여 출판한 것은 1898년이었다. 그것은 19세기 〈신약성서〉 본문 연구의 결과들인 티셴도르프, 웨스트컷-호트, 웨이머스(1886, 1901년 이후부터는 B. 바이스) 등의 본문을 기본 본문으로 삼았다. 에버하르트 네스틀레는 이들 세 종류의 그리스어판을 비교해가면서 다수의 사본들이 일치하는 다수결 본문(majority text)을 만들었다. 그의 아들 에르빈 네스틀레가 1927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 13판을 낼 때 사본 비교, 번역본 비교, 교부들의 인용구 비교 등이 첨가되면서 본문비평 장치가 더 확대되었다. 1952년 21판을 낼 때부터는 쿠르트 알란트가 네스틀레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편집에 가담했다. 1965년의 25판부터는 '네스틀레-알란트'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네스틀레-알란트의 25판은 1930년대 이후 새로 발견된 200년경의 파피루스 사본들을 본문 재구성에 반영시킨 것이다. 이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 세계성서공회연합회(United Bible Societies)의 그리스어 〈신약성서〉(The Greek New Testament : 1966)이다.
 

성서

유대교 정경 그리스도교 정경
개역성서 공동번역성서
토라 ( '율법서' ) 구약성서 구약성서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느비임 ( '예언서' )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사사기 판관기
판관기 룻기 룻기
사무엘 상 사무엘 상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사무엘 하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상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열왕기 하 열왕기 하
이사야 역대기 상 역대기 상
예레미야 역대기 하 역대기 하
에제키엘 에스라 에즈라
호세아 느헤미야 느헤미야
요엘 에스더 에스델
아모스 욥기 욥기
오바디야 시편 시편
요나 잠언 잠언
미가 전도서 전도서
나훔 아가 아가
하바꾹 이사야 이사야
스바니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하깨 예레미야애가 애가
즈가리야 에스겔 에제키엘
말라기 다니엘 다니엘
케투빔 ( '성문서' ) 호세아 호세아
시편 요엘 요엘
잠언 아모스 아모스
욥기 오바댜 오바디야
아가 요나 요나
룻기 미가 미가
애가 나훔 나훔
집회서 하박국 하바꾹
에스델 스바냐 스바니야
다니엘 학개 하깨
에즈라 스가랴 즈가리야
느헤미야 말라기 말라기
역대기 상 신약성서 신약성서
역대기 하 마태복음 마태오의 복음서
  마가복음 마르코의 복음서
누가복음 루가의 복음서
요한복음 요한의 복음서
사도행전 사도행전
로마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도 전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도 후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베소서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빌립보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새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가 후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모데 전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데 후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서 디도에게 보낸 편지
빌레몬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야고보서 야고보에게 보낸 편지
베드로 전서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 후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 일서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 이서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 삼서 요한의 셋째 편지
유다서 유다의 편지
요한계시록

요한의 묵시록

  외경(제2경전)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