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을 위해/宗敎, 經典

***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논리

hanngill 2016. 6. 10. 17:20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논리

       - 신앙과 종교를 이성의 눈으로 보자.


 종교, 정치, 이해관계가 있는 사안에 관해서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가지고 대하기 쉽다. 이 글을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

세계역사상 중세에 암흑의 시대 1000년이 있었다. 로마교회의 횡포로 인해 인간의 이성의 문을 닫아 버렸던 시대이다. 
이에 반항하여 인간의 이성의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이고 계몽사상이었다. 오늘날 이렇게 잘 사는 것도 다 이때부터 신본주의 이성의 암흑시대를 벗어나 인간 이성이 눈을 뜨고 휴머니즘과 자연과학 학문의 발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중세이전의 몽매에 허덕이는 신본주의 종교사상이 인간 이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정신적 문화적 산물이다. 인간의 정신적 안주를 위해 즉 구원을 위해 찾아낸 문화적 산물이다. 미래는 이성적 종교가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1.  대속론, 구원론, 삼위일체론은 억지로 지어 낸 것.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와 벌이 자손에게 대물림한다고 한다. 따라서 Adam과 Eve가 뱀의 간계에 따라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의 사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어긴 죄 ( 원죄 original sin)를 그 자손 대대로 내려 물려 주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모든 종교 또는 종파가 그러하듯이 시초에 관련된 일종의 설화인 것이다.

그런데 이 죄를 면할려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어야 한단다. 그러나 회개하지도 않고 용서를 빌지도 않고 제멋대로 살기에 하느님의 피조물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고 계속 선지자를 보내 회개하게 하였으나 이들이 다 죽임을 당함에 마지막으로 구세주 예수를 보냈다 한다. 예수는 회개하라고 외쳤으나 그도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제 인간은 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옥에 가서 영원한 괴롭힘을 받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원죄와 그동안 지은 죄로 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단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죄를 등에 지고 죽었다는 비약적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면하고 천당에 갈 수 있게 되었단다. 예수가 내 죄를 대속했다고  믿을 때 바로 나는 죄와 벌을 면한단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역시 죄를 짊어지고 지옥으로 가서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미 죄가 모두 사면되었다면 예수의 대속 사실을 몰라도 죄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조상이 지은 죄를 속죄하는 것은 자손의 도리이고 장차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조상이 지은 죄가 당연히 대물림되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부모가 자식이 지은 죄를 손자대대로 짊어지고 벌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연상하면서 읽어 봐야 이해가 잘 간다. 하느님과 인간 관계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죄를 자손에게 물려 받게 하는 것,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것이 참으로 해괴한 논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삼위일체설은 로마황제와 교황을 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 CE 터키의 Nicaea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해서 수개월 동안 교의를 정립해 나갈 때 하느님, 성령, 예수를 하나로 보는 삼위일체설을 억지로 만들었다. 이를 반대했던 파는 내 쫒겼다. 성경에는 예수가 하느님이라 하지도 않았고 이런 말 Trinity 도 없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자. 하느님은 인간에게 올바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심어 주었다. 이성 자체는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이성을 인간의 뇌에 심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기독교의 논리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 아닌가. 이를 따지면 못 믿게 되니 그냥 그렇다고 믿어 놓고 보란다. 그때 가서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의 잠재의식은 계속 반복 주입하면 비판없이 각인된다. 신발을 강아지라 반복주입하면 그렇게 각인된다. 이런 원리를 잘 아는 모양이다. 
인간은 태어 날 때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태어 났다. 때 묻은 자는 죽고 때 없이 새로운 자가 대를 이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늘 새롭게 태어 났다.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었다. 막 태어난 사람이 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원죄도 없고 구원받을 필요도 없다. 물론 하늘의 뜻(자연의 이치)을 거역하고  인간 사회에서 타인을 해하는 행위를 하였으면 이를 보상하고 벌을 받아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서 회개를 하면 무상으로 벌을 면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는 어디까지나 죄이다. 
죄란 무엇인가? 동물 세계에는 죄가 없다. 인간 세계에서 죄를 논하는 것이다. 죄란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악은 곧 타인을 해하는 것이다. 혼자 살면 동물처럼 악이 없다. 인류의 공존을 파괴하는 어떤 행위도 악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하였다. 이것이 인간 삶에 관한 천리인 것이다. 이것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된다. 이것 또한 천리이다. 신앙 종교랍시고 맹신하지 말고 이성적 해석을 통해서 바른 신앙과 종교로 나가야 할 것이다. 죄나 악은 인간관계에서 규정하고 정의한 것이다. (hanngill은 신앙과 종교를 구별한다)
인지가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우주가 보이는 오늘의 세상에 동물적 미개사회에서 전개되었던 미신들은 차츰 시들어 가고 있다. 오늘날 구미 각국의 그 번창하던 교회를 가보면 거창한 교회건물이 공동묘지로만 남아 있음을 많이 보아 알 수 있다.


2. 신앙은 영적변화를 일으키는 것.


무당이나 어느 종교나 다 같이 영적세계가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다. 영혼이 귀신이고 영 ghost 가 된다. 귀신이 있다고 믿는 자에게는 귀신이 보이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 자에게는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 억울하게 죽은 그 수많은 영령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면 귀신천지일 것이다. 귀신은 상상에서 만들어낸 허상이다. 기적이란 것도 없다1. 기도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있는 자는 무슨 일이든 자신감 있게 실행한다. 못한다고 포기하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다 정신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기독교에서 체험하는 귀신이나 기적도 다른 모든 종교에서 체험하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이라 생각된다. 이런 현상을 체험하고 신을 생각해 내서 이를 믿고 의지한다. 이 신이 전지 전능하다고 믿고 모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 즉 신앙을 할 때 느끼는 어떤 현상이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을 영적변화라 할 수 있다. 신앙으로 물적 변화를 가저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기도로써 물리적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로써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해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고  이 정신이 그런 방향으로 리드해 나가는 것인데 이를 신의 힘으로 믿는 것이다. 원시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한계상황 즉 궁지에 몰릴 때 어떤 선택적 신에게 혼신을 다해 간절히 소망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 어떤 확신(이것을 응답이라 한다)을 얻을 때 까지 기도하면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 질 수도 있다. 이것을 신의 영험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 후 이런 경험을 가지고 그 신에 대한 신앙은 깊어 가는 것이다. 영감에 맡길 때 이성은 판단을 중지한다. 오직 영적인 것이 우리를 리드하게 된다 (The power of subconscious ). 우리 머리는 그렇게 믿으면 그러한 것이 된다.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 또 그렇지 않다. 신앙을 통해서 긍정적으로 영적변화를 일으키고 신념에 따라 현실적으로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3. 모든 종교는 하나의 이성종교로 발전해야 할 것.2


진실은 이성의 판단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중세 기독교적 암흑시대를 벗어나 우리는 지금 이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학문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머리는 깨어 나가고 있다. 자기의 생각이나 사상에 확신을 가지고 이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성적 판단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신을 만들어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교의를 신의 명령이라 믿고 이에 따라 살 것이 아니다. 중세의 교부들의 철학이나 조직신학의 허구한 말 잔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신에 의지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으나 그냥 빠지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기존의 신앙과 종교가  개인을 복종시키고 사회를 통제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지금은 인지가 발달하여 개인의 존재가치를 파악하고 실존적 자기를 살아갈 노력을 하고 있으며, 오늘 날은 학문적 윤리가 있고 현자가 가르치는 종교적 도덕이 있고 공동체 법질서가 있어서  가정과 사회 질서를 지켜나가고 있다. 미래에는 이성이 지배하고 모든 종교가 이성적 종교로 발전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영감이나 감성이나 이성이나 하나로 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4. 인간에게 신앙은 피하기 어려운 것.


여기서 나는 신앙과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맹신하여 끌려가지 말고 이를 바로 이해하면서 믿자는 것이다. 종교는 물적구제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영적구제를 위한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는 나는 이제 아무 힘이 없다. 오직 기댈 곳은 이 세상을 주관하실 분 하느님3( 이 하느님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하느님과 동일하다)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 기도를 한다. 하느님 나 좀 도와 주세요. 내가 이 어려움을 해쳐 나갈 용기와 힘을 주세요. 내가 가는 길이 순탄하게 하느님이 도와 주세요... 이렇게. 열심히 기도을 하는 동안에 마음은 견고해지고 그 어떤 음성이 들리는듯 한다. 일어나라. 하면 된다. 해 보아라... 기원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이 이루어지리라 하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한다4. 이렇게 해서 다시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마지막 기댈 수 있고 이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그 분이 내 마음 속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이가 바로 하느님 신이다. 피조물 인간은 하느님 신을 향해서 기원하고 염원하면서 살아 간다. 나약한 인간은 이렇게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혼자 있다는 것은 외롭고 두렵다. 내가 내 신과 함께 있으므로 해서 얼마나 든든해지고 강고해지는가!5

어떤 종교도 다 비슷하리라 본다. 반드시 그리스도교 뿐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근본이 이와 같다면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종교를 빙자한 비인륜적 종교행위, 지나친 비이성적 허례허식 행위, 물질과 심신의 착취행위는 절대 부정한다. 


이 우주와 자연, 그리고 생명체 특히 인간의 구조를 보면 신비하기만 하다. 어떤 힘이나 법칙이나 존재자가 만들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만들지 않은 것은 무질서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 존재자가 신인 것이다. 인간이 신을 인식하고 그 존재 법칙과 이치를 알아 따라 살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신을 인간 집단이 왜곡해서 신앙하고 종교를 만드는 것이 잘 못이지 창조주 신은 존재한다. 기독교나 기타 많은 종교가 주장하고 있는 신앙이나 종교관을 볼때 올바른 신관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신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다.6


http://blog.daum.net/hanngil/12409402

신앙과 종교

http://blog.daum.net/hanngil/12407801

모든 종교가 독버섯처럼 음지에서


hanngill

201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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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tion in the Bible
This word is used of the deliverance of the Israelites from the Egyptians (Ex. 14:13), and 

This word is used of the deliverance generally from evil or danger  in the New Testament  it is specially used with reference to the great deliverance from the guilt and the pollution of sin wrought out by Jesus Christ, "the great salvation" (Heb. 2:3).

how shall we escape if we ignore so great a salvation? This salvation, which was first announced by the Lord,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히브리서는 AD 60년대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salvation 이란 말이 나온다.


Origin of Salvation. 영어 단어 salvation 의 기원:

1175-1225;  Middle English  salvatio (u) n < Late Latin  salvātiōn- (stem of salvātiō), equivalent to salvāt (us) (past participle of salvāre to save1; see -ate1) + -iōn-  -ion; replacing Middle English  sa (u) vaciun, sauvacion < Old French  sauvacion < Late Latin, as above .


The redemption of man from the bondage of sin and liability to eternal death, and the conferring on him everlasting happiness

- This is the great salvation


기독교에서는 신본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신본주의로 해석하고 싶다. 지옥과 천당의 개념도 현실적 인간의 행복한 삶을 지향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구원받고 천당가고자 한다면 바로 천당가야지 왜 현실에 머물러 안달복달하고 살고 있는가?   나는 사는대로 살다가 죽으면 새로 태어나서 새로운 일기장을 쓰고 싶다.


내가 평생 살아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는데 누가 꼭 지켜 보호해 주는 것처럼 구제된 기억이 남아 있다. 나를 보호해 주는 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따르는 것 같다. 인생이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운명을 신이 주관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신앙이다. 기독교에서 단순히 ' 믿고 의지만 하면 구원을 받고 천당간다' 고 하는 말 처럼 신에 대해 더 긴 설교가 필요 없다. 교부 철학이나 조직신학이나 다 신이 있다고 예수가 하느님이라고 억지로 증거하고 설득하는 이론에 불과하다. 내 마음에 하늘을 주관하는 하느님 신이 이미 확고히 자리 잡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기도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이다. 신앙이 없다고 못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신앙이 있으면 천국같고 신앙이 없으면 지옥같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종교는 현세를 위한 것이지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세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내세는 그냥 만들어 본 말이다.


※ 그리스도교 구원론에 관하여 심사숙고해 보았다. 학자로서 훌륭한 한 후배님으로부터 간곡한 글을 접하고 고민했다. 그렇게 좋은 구원의 경지라면 나도 들어가보고 싶었고 또 그의 간절한 권고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 글을 올린 것이다. 그 후배님께 감사하면서 또한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종교란 인생진로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1. 기적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다 이미 있는 자연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자연의 이치가 하느님의 로고스이다. 이를 하느님이 수시로 변경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르면 다 기적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기적은 일어 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이성종교는 理神論, deism 과는 다르다. 이성종교는 신앙의 대상이나 전하는 말씀이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는 종교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존재의 법칙 즉 Nature' law, Logos 가 곧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대상 신이라 여긴다. [본문으로]
  3. 하느님이 우주의 생성과 운행 존재의 법칙을 가지고 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the God, Yahveh, Allah 는 이 하느님이다. [본문으로]
  4. 적극적 소망은 긍정적 확신을 낳는다.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도 있는 법이다. 이미 지난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서 한 번 살아보자는 결의가 생긴다. 이 결의가 나도 모르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본문으로]
  5. 내 마음속에 영접하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민족의 정서에도 맞다. 그러나 다른 자연신이나 어느 특정 지역의 신이나 인간을 하느님이라 가장하여 신으로 영접하는 것은 곤란하다. [본문으로]
  6. 어떤 이론으로도 신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속에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을 내가 느껴 인정하는 것 뿐 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들쳐가면서 이스엘 사람이 말하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외쳐도 불 필요한 헛소리일 뿐이다. 오직 내가 절실하여 마음속에 영접할때 만이 하느님이 느껴지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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