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인생/World Economy

미국 역사

hanngill 2014. 12. 9. 17:22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the_United_States
http://simple.wikipedia.org/wiki/History_of_the_United_States

https://www.youtube.com/watch?v=QW5AaiyK48E
https://www.youtube.com/watch?v=DQShK8XpFxk
https://www.youtube.com/watch?v=KMhkf5mAGgA

 

Ⅰ. 미국 역사의 의의


현대행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미국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는 행정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Waldo는 행정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행정(학)의 역사는 1887년 Woodrow Wilson의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에서 시작된 미국 행정(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미국 행정의 역사는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등의 타 부분과 매우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이러한 부분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역사의 흐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외교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인지하고 해결하는 것이 바로 행정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행정은 바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때문에 미국 행정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행정정책들인 'New Deal'이나 'The Great Society', 'Affirmative action'등은 바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며, 이러한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행정을 단순한 기술적 영역으로만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행정을 이렇게 설명하기에는 행정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개념은 매우 광대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 미국행정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이해와 함께 궁극적으로는 역사에서의 행정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Ⅱ. 미국 역사의 개관


1) 미국 정치사의 개관

상식적으로 미국의 역사는 Columbus에 의해 발견되고 May Flower를 타고 온 Pilgrim Fathers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는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인디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백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정책에 의해 미국의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Pilgrim Fathers 이후 몰려온 유럽인들은 영국이나 스페인국왕의 허가장을 받아 식민지로서의 역할을 하게되었으며, 청교도적 근성과 풍부한 자원에 의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후 영국은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게 되며, 따라서 식민지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가 강하여졌고, '보스턴 차 사건'으로부터 독립전쟁의 막이 올라 먼저 13개주가 독립을 선언하고 워싱턴을 중심으로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독립전쟁에 승리하게 된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고 본격적으로 나머지 북미대륙을 미합중국에 편입시키게 된다. 이 헌법제정과정에서 중앙집권을 지지하는 연방주의자와 지방분권을 지지하는 반연방주의자로 정파가 갈리고 나중에 반연방주의자들이 분파되면서 지금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당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즉, 미국 정치의 역사는 이러한 두 주류세력에 상호대립에 의해 이어져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의 대립은 실상은 지역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업중심인 북부와, 노예제도를 중심으로 한 농업중심의 남부의 경제구조의 차이, 민주주의에 대한 연방파와 공화파의 대립, 노예제 허용과 연방은행의 설립등의 사건에서의 양자의 갈등은 후에 남북전쟁에서 폭발하게 된다. 남북전쟁이후 노예제 문제는 일단락되게 되나, 연방파와 공화파의 구도는 전술한 대로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과 북부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으로 변형되게 되고 이러한 대립은 미국정치의 큰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2) 미국 경제의 개관

경제적으로 192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1930년대 극심한 공황이후 케인즈 사상을 기반으로 한 정부간섭주의가 도래하게 되었다.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주의, 자유경쟁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의 지나친 자유는 곧 빈부격차의 심화와 함께 지나친 생산에 의한 공황을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Roosevelt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부간섭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제적 이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호황과 불황이 교차할 때마다 미국정부의 경제정책기조로서 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역으로 경제의 상황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권획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방임경제를 기조로 하는데 양당의 입장이 일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3) 미국 사회의 개관

미국의 사회문제는 인종갈등과 빈부의 문제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619년 미국에 노예가 처음 들어온 이후 17세기 말 흑인노예가 대거 유입되면서 흑인은 미국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미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나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경제적 대우는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백인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도 흑인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되지 않으며 아직도 일부지방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공중화장실이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흑백갈등이 대표적으로 폭발한 것은 60년대이며, 오늘날에는 이러한 흑백갈등이 빈부격차의 문제와 맞물려서 미국사회의 잠재된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고, 오늘날 미국사회의 범죄와도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자유방임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의 경제구조에서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흑백문제와 더불어 미국사회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유럽 등과는 달리 노조세력이 미약하거나 귀족화 되어 있어 빈부격차의 문제가 바로 폭발할 가능성은 적지만 80년대 미국을 휩쓴 대량감원과 이로 인한 실업문제의 증가는 분명 미국 사회의 큰 문제점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미국 역사의 흐름


1. 미국의 독립과 헌법제정


미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럽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주로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영국의 식민지에 대한 조세압력에 저항하여 13개주가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전쟁을 일으켜 영국을 몰아내고 세워진 국가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독립배경에는 우리나라의 3·1운동식의 독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미국은 사실상 유럽인의 국가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이 유럽으로부터 굳이 자유를 찾아 우리나라가 일제라는 이민족에 대해 저항한 것과 같은 독립을 벌일 명분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프렌치-인디언 전쟁이후 영국에 의한 조세의 인상이 잇따름에 따라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인들이 보스턴 차사건을 계기로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프랑스등의 독립을 받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국가를 세우게 된다. 초기의 미국은 정치와 경제적 배경이 다른 13개주가 모여서 미국을 건설하게 되는데, 따라서 각 주마다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를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공업을 위주로 하고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연방파와 농업을 위주로 하고 지방분권을 추구하는 남부의 공화파로 나뉘게 된다.

헌법제정은 연방주의자인 메디슨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헌법을 지지하는 연방파와 지지하지 않는 공화파간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연방주의자인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의 연방은행설립도 사실상 북부 공업도시들에 유리한 것이었으며 연방주의자인 해밀턴과 공화주의자인 제퍼슨의 반목도 이러한 갈등에 촉진제가 되게 된다.

또 이 두 정파의 갈등이 첨예화 되게 된 것은 노예문제 때문이었다. 남부는 노예를 중심으로 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성행했기 때문에 노예제를 선호했으나, 북부는 노예제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데 문제가 많게 되었다. 따라서 노예문제는 서서히 불씨를 키워나가다가 마침내 남북전쟁에서 폭발하게 된다.

 

2. 남북전쟁 - 연방 vs 반연방, 북부 vs 남부, 반노예 vs 노예


남북전쟁은 기본적으로 노예문제를 둘러싼 전쟁이다. 분명 북부인들 가운데는 인권차원에서의 노예해방론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노예의 인권이 본질인 싸움은 아니며, 노예의 경제적 가치와 기존의 묵혀진 남부와 북부의 대립인 것이다.

유명한 링컨은 노예 해방의 아버지인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는 남북의 분열을 더욱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링컨의 이러한 발언에서 잘 나타난다.

" … 만약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이 존속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방을 위해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면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부는 해방하고 일부는 그대로 두어야 연방이 존속된다면 역시 또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국은 남북전쟁은 노예의 전쟁이 아닌 백인들의 전쟁중의 하나인 것이다.

 

3. 대량생산과 노동문제


1800년대의 잇따른 발명과 발견, 값싼 노동력의 유입, 풍부한 자원은 미국으로 하여금 산업혁명을 가능케하고 미국이 공업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농업·섬유, 철강, 운송등의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어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나서게 되었다.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세계최강국으로 들어서는 것은 몇십년 늦어지기는 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나고 19세기 후반에는 경제적으로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다.

동시에 산업혁명은 저임금, 여성 및 미성년자 고용, 도시 빈민촌, 노사간의 대립등 자본주의 경제의 여러 폐단들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들어 급진적 노조운동과 격심한 계급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전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연장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기술을 무기로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부심이 있었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작업을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반쯤 숙련되어 있는 기계의 감시인으로 전락했고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민자, 흑인, 여성등의 농업이 대거 공업으로 유입되면서 일자리에 대한 경쟁이 심해졌기 때문에 이는 노동환경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800년대말에는 정부는 철저한 자유방임정책을 폈기 때문에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거나 산업화에서 빚어지는 빈부격차의 문제를 해소할 방법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산업화의 모순들은 1900년대초까지 이어졌다. 1900년대 초에는 Taylor의 과학적 관리론이 유행하던 시기인데, 이러한 과학적 관리론은 사실상 노동자를 얼마나 더 착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들이 1800년대말부터 노동운동과 파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 고용주와 노동자들의 대립은 1886년의 헤이마켓 사건에서 폭발하고 이를 기념하여 1890년 최초의 메이데이 행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강력한 이익집단중의 하나인 미국 노동총연맹(AFL)의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4. 제국의 팽창주의와 1차 세계대전


미국은 전통적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고수해왔는데, 이는 1823년의 먼로독트린 이후 지속되온 것이었다. 즉, 미국은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유럽도 미국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말하는 미국이란 미국의 앞마당과 뒷마당을 포괄하는 중남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미국이 아메리카대륙 전체의 지배를 공고히 하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유럽국가들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냉전 기간 미국의 세계 경찰국가의 역할이나 지금의 아프리카, 유럽의 분쟁지역에 대한 개입도 이러한 먼로주의의 확대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미국의 고립주의는 1890년대부터 팽창주의로 전환되어졌다고 말해진다. 미국은 남북전쟁이후 알래스카와 하와이, 사모아등의 태평양 일대를 합병하고 멕시코등 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나갔으며 파나마 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가 일본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데 일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을 식민지화했다.

이러한 미국의 팽창주의의 중요한 원인으로는 19세기 후반의 급속한 산업성장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급속한 산업성장으로 값싼 원료와 미국산물품 시장의 확대가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저임금경제에서 축적된 잉여자본을 투자할 곳도 필요하게 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요구는 곧 해군력 증대로 연결되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이 최강의 해군을 갖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열강들의 팽창주의끼리의 대결인 1차대전에 처음부터 참전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국이 그간 내세웠던 고립주의의 기치를 내세워서였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의 대전참가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한 작전등으로 미국은 1차대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여 독일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결국 1차대전은 미국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대국에 섰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1차대전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사실 1차대전이 미국내의 역사와 관련해서 끼친 영향은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러나 1차대전의 대전결과처리에서 독일은 어마어마한 배상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함께 2차대전을 불러오는 불씨라고 할 수 있다.

 

5. 경제공황과 뉴딜 - 정부간섭주의의 시작


1) 공황의 시작


1차대전이후 미국에는 연달아 보수적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딩 - 쿨리지 - 후버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정부는 자유방임주의의 보수적 경제정책을 지속시켜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보수적 경제정책은 친기업적 정책을 의미하며 이와함께 신흥공업과 새로운 생산기술의 발달, 산업전반에 걸친 기계화, 기업조직의 거대화, 새로운 기업경영방식의 도입과 신용제도의 정비가 미국 경제를 비약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경제는 자동차, 화학, 전기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 된다. 이밖에 토목, 석유등의 산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라디오와 영화가 보급되었으며 국내총생산과 1인당 국민소득도 늘어났다. 국민 개개인도 집집마다 라디오와 자동차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모든 면에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빈부격차의 심화로 20년대 절정을 이룬 자유시장정책은 경제성장의 과실이 기업가와 일부부유층에게만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부품표준화, 공장자동화, 분업에 의한 일련공정으로 기업가들은 물건을 싸게 많이 만들게 되었으나 노동자들은 단순작업을 되풀이하는 기계로 전락하였다. 이들은 기계에 밀려 실업자로 전락하였고 사회적 구매력은 감소하게 되었다. 대량생산으로 물건은 넘치지만 이를 살 사람은 줄어들게 되었다.

2) 공황의 결과

이러한 상황은 계층간 소득분배의 불균형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상류부유층의 소득이 1/3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전체적 소득도 늘어나고 저축도 증가했으나, 성장이 정체되면서 돈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점차 증권등 투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과도한 여유자금은 주가가 기업체의 실질가치 이상으로 높아지는 주식시장의 거품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증시의 거품현상은 결국 1929년 10월 24일의 이른바 '암흑의 목요일'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식가격의 폭락으로 기업들은 엄청난 자산손실을 입었고 은행에서 빌린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기업들이 속출했으며 기업들의 연쇄파산으로 경제전체가 붕괴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공황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의 장기침체를 겪고 난 후에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케인즈등의 경제학자들이 득세하게 되었고 1932년 루즈벨트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뉴딜정책이 새로이 제기되기 되었다.

3) 공황의 극복


1933년 루즈벨트는 공황으로부터 탈출을 위해 국가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정책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뉴딜정책의 핵심은 '구제와 부흥'으로 이전에 자유방임적 경제정책에서 탈피해서 미국역사에서 정부가 본격적으로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즈벨트는 공공사업국, 상품금융공사등의 기관을 설치했으며,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국내시장을 확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뉴딜의 결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뉴딜정책의 가장 큰 의의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적 의미의 정책(policy)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행정부의 권한이 더 막강해지면서, 정부가 의회를 리드해 가게 되었다. 또한 경제정책의 기조가 민주당의 정부간섭주의와 공화당의 자유방임주의가 공존하는 계기가 되었다.

 

6. 2차대전의 발발


1) 2차대전의 배경과 경과

2차대전의 원인은 북미와 유럽의 열강,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공황을 타개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공황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 미국은 뉴딜정책들의 국가개입을 통해 타개하는 실마리를 찾으려 했고 영국, 프랑스등은 식민정책의 강화를 통해 공황을 타개하려고 하였지만, 독일 같은 경우는 1차대전의 패전으로 식민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1차대전의 배상금 때문에 공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은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가 성립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의 재무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아시아에서 공황타개를 위해 식민지의 팽창을 시도하던 일본도 이 지역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2차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은 전격작전으로 프랑스까지 점령하고 영국을 노리게 되었다. 또한 일본도 필리핀등을 점령하였다. 이때까지 미국은 전통적인 고립주의로 돌아가 중립을 지키게 되었으나, 루즈벨트는 이러한 고립주의를 파기하고 무기대여법등을 통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경제체제를 전시체제로 전환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의 진주만 침공도 일조하게 된다.

미국의 참전은 다시 1차대전같은 양상을 빚어내면서 1945년 독일의 항복과 일본에의 원폭투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2차대전의 영향 - 미국의 공황해소와 냉전의 등장


2차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전쟁기간에의 전시경제로 인해 막대한 자원의 동원과 인력이 이루어져 미국은 공황에서 완전히 탈피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더 많은 권한을 가져오게 되었고, 전시경제로 인한 정부의 경제개입도 더 확고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과정에서 자본주의 서구와 사회주의 소련이 대립이 심화되게 되었다. 독일, 일본등의 식민지 처리과정에서 자본주의를 이식하려는 미국과 사회주의를 이식하려는 소련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냉전은 1950년대의 미국의 보수로의 회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7. 냉전의 도래와 미국의 보수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냉전이 도래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각자의 영향권을 확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이 폭발한 것이 국내적으로는 맥카시 선풍이고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이었다.

맥카시는 위스콘신의 상원의원으로 미국 의회와 정부를 공산주의자가 뒤덮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전쟁과 원자탄 기술의 소련유출인 로젠버그사건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맥카시 선풍은 전체적인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보수화는 루즈벨트의 진보주의와 트루만의 페어딜정책으로 서서히 시작된 흑인의 인권개선등의 민권정책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2차대전을 거치면서 군부와 산업체가 연계되면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출현하게 되었다.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임하면서 이러한 군산복합체라는 강력한 이익집단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1954년의 브라운대 토페카 교육위원회 사건의 판결과 55년의 몽고메리 버스투쟁등은 60년대의 뜨거운 진보의 시대로 나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8. 1950년대(트루먼-아이젠하워) - 냉전과 진보의 혼재


9. 1960년대(케네디-존슨-닉슨) - 위대한 사회, 월남전 확산

 

1) 케네디와 민권정책


1960년대는 케네디의 당선과 함께 시작되었다. 케네디는 대외적으로는 반공노선을 대내적으로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케네디는 소련에 대항하여 후진국을 자본주의 영역으로 놓기 위해 미국의 발전모델을 이식하려 하였으며, 여기서 파생된 것이 비교·발전행정이론이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민권운동에 부응하여 인종통합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케네디의 정책들은 미국사회에 많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보수적 분위기는 많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케네디의 많은 민권정책들은 좌절당하였다.

그러나, 케네디의 죽음으로 인해 오히려 상황은 역전되었다. 케네디의 자리를 이어받은 존슨대통령은 케네디가 생전에 해내지 못한 많은 민권신장법안들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2) 존슨과 '위대한 사회 (The Great Society)

 

이러한 진보주의 흐름의 도래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 사회의 빈곤을 발견하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지속된 경제적 풍요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했으며, 빈곤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알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2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인구의 거의 25%가 빈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존슨대통령은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를 선언하고, 여러 가지 경제정책과 민권정책을 실현하게 된다. 여기서 정책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며, 우리가 공부하는 많은 정책의 이론과 사례들이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다.

존슨대통령은 시정조치와 고용평등조치등을 시행하면서 미국사회의 민권개선을 위한 획기적이고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책들을 취했다. 또한, 워렌을 대법원장으로 하는 법원도 갖가지 진보적 판경을 내림으로써 60년대가 위대한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3) 월남전과 진보진영의 암운

 

케네디와 존슨이 월남에 적극 개입하게 된 것은 당시 계속되던 냉전의 산물로 공산주의가 월남을 교두보로 아시아에 진출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한국전쟁과 맥카시즘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의 물결이 높아지는 가운데 케네디와 존슨은 월남의 공산화를 막고 일대에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하기 위하여 월남개입에 강도를 높이게 된다.

연인원 수십만과 엄청난 전비가 투입된 월남전은 결국 1976년 월남의 패망으로 사실상 미국의 패배가 된다. 이러한 월남전이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다.

64년 버클리 대학에서 시작된 반전운동은 흑인인권운동과 함께 미국 내의 사회문제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2차 대전이후 탄생한 군산복합체의 경제와 보수주의, 전쟁이라는 숨막히는 체제에서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은 여기서 탈피하려는 시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사회문제 탈피를 위해 '위대한 사회'정책을 폈던 존슨행정부는 월남전에 더욱 깊게 개입함으로써 반체제세력을 탄생시켰고, 인기가 하락하게 되었다. 결국 존슨은 재선에 실패하고 보수주의자인 닉슨이 당선되게 된다.

 

10. 1970년대(닉슨-포드-카터) - 월남전 패전, 경제침체, 에너지위기


1) 사회혼란, 월남전패전과 보수로의 회귀


닉슨은 케네디에게 패배한후 거의 10년만에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공화당의 보수주의자인 그는 어려운 시기에 당선되었다. 먼저 당시는 반전운동이 극에 달하던 때로, 학생들은 무장하고 학교를 점거하기까지 하였으며, 범죄가 증가하는등 사회의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닉슨등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혼란의 원인이 진보세력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진보세력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주의들은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민주당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진보적 입법은 계속되었다.

경제적으로 공화당은 자유방임 노선을 택했지만, 당시 월남전 전비의 후유증과 세계적인 경제침체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증가하였고, 결국 닉슨은 정부간섭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전비로 인해 위대한 사회정책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다.

 

2) 에너지와 위기와 경제의 쇠퇴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닉슨은 사임하게 되었다. 월남전 패망과 워터게이트는 미국민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경제의 위기였다. 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인플레이션과 경쟁력 약화는 미국 경제를 침체시켰으며, 여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석유파동이었다. 이러한 석유파동은 연쇄적으로 자동차산업등의 침체를 낳고 이는 미국경제침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2차대전후 베이비 붐 세대들이 한참 사회에 나설 시기였으므로 실업률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러한 침체의 시기에 카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카터는 도덕정치를 외치며 당선에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이 시기는 미국이 가장 혼란스럽고 난관에 봉착했을 때였다. 게다가 카터 스스로의 지도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카터는 정치적으로 외토리가 되었다. 결국 1979년 80년에 미국경제는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거기다가 80년 4월의 이란 인질구출작전의 실패는 카터를 결정적으로 수렁에 빠뜨렸다.

 

3) 70년대의 사회상


혼란과 침체의 상황에서 수많은 소외세력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행하였다. 흑인과 히스패닉, 그리고 여성들은 70년대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행하였다.

또한 급진주의가 퇴조하였다. 60년대의 열정에 가득찬 진보적 운동들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이를 본 후대들은 그러한 길을 다시는 가려하지 않았다. 사회개혁이라는 거창한 목표대신에 개인의 능력개발에 초점을 두었고 따라서 조깅이나 건강식의 섭취, 요가와 수련 등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개인들은 내향적이 되어갔다. 또한 이러한 무기력의 부정적 영향으로 광신적 종교도 성행하게 되었다.

 

11. 1980년대(레이건-부시) - 보수로의 대회귀 (레이거노믹스)


1) 보수주의자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70년대의 어두운 상황에서 보수주의의 물결을 타고 레이건이 등장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과거의 전통적 가치관과 균형예산으로 되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자유방임체제의 부활을 통해 경제를 재건하고 군비확장을 통해 잃어버린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또한 민주당주도의 의회도 공화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레이건이 취임하던 날은 이란에 444일간 억류된 인질들이 풀려난 날로 레이건은 강한 미국을 바라는 미국인들의 희망속에 극적인 분위기에서 출범하였다.


2) 레이건의 보수주의 경제정책 -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레이건은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는 방안으로 첫째 정부지출을 줄이고 둘째 감세정책을 시행하였으며 환경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였다. 이러한 경제정책으로 레이건은 인플레이션을 잡고 금리를 인하하여 미국의 산업이 굴러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기업가에게만 유리한 것으로 레이거노믹스는 미국 전체의 경제는 부흥시켰지만, 경제구조를 심각하게 왜곡함으로써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게 되었다.

 

3) 빈곤의 심화


80년대 들어서 미국의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철강, 전기, 자동차등의 공업에서 국가경쟁력 제고와 정보화 사회의 진입이 시작되면서, 또한 노조의 영향력을 벗어나 기업의 임의대로 고용을 조정할 수 있는 산업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80년대 말 미국을 휩쓴 리스트럭처링, 리엔지니어링, 다운사이징의 여파로 미국은 대량감원의 회오리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재취업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실제 재취업이 되는 곳은 임시직이나 일용직등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문제를 낳게 된다. 마약이 성행하며 범죄가 증가하고 AIDS등이 횡행하게 되었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미국은 다시 강대국의 명예를 회복했을지는 모르나, 빈부의 골과 사회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12. 1990년대(부시-클린턴) - 진보도 아닌 보수도 아닌


걸프전의 영향으로 부시의 인기는 반짝했지만, 아직 경제회복의 기미가 안 보이면서 클린턴이 부상하게 되었다. 오랜동안의 보수주의에 지친 미국의 국민들은 케네디와 이미지가 비슷한 클린턴에게 표를 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미국과 유럽에는 진보진영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클린턴은 진보진영이기는 하고 부분적으로 진보적 정책이 시행되기는 했으나 사실상 그의 경제정책은 보수적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자유방임주의와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국제경쟁력이라는 단어의 대두와 함께 전세계의 무역질서를 자유화하고 국내적으로는 기업친화적인 경제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Ⅳ. 결어


미국의 역사는 정치적으로는 연방주의, 반연방주의 진보 대 보수의 사조가 경제적으로는 정부간섭주의와 자유방임주의가 교차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진보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미국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미국의 초강대국의 지위는 건재하며 당분간 계속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미국의 좋은 시절은 끝나고 여태까지 잠재되었던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서서히 터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행정은 이러한 역사 위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고 있다. 행정은 사회에 영향을 받기도, 영향을 주기도 한다. 미국의 역사를 우리가 뭐라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것이 행정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지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