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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가(雜歌)(좌창(坐唱))와 민요 》

hanngill 2010. 5. 9. 07:52

《 잡가(雜歌)(좌창(坐唱))와 민요 》

잡가는 좌창으로 불리우는 민속통절가요(民俗通節歌謠)를 가리키지만 본디 정가의 대(對)가 되는 모든 잡다한 속요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잡가는 물론 판소리 · 입창(立唱) · 민요 등 모든 민속가요를 가리키는 범칭이었다. 지금도 남도에 가면 판소리를 제외한 모든 민속가요를 잡가라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잡가 즉 민속 좌창은 한배가 긴 12잡가와 한배가 빠른 휘모리잡가가 있다. 서울의 12잡가와 휘모리잡가는 서울 문안과 근교에서 수공예의 장인들이나 채소밭을 가꾸던 밭쟁이들 출신의 소리꾼들이 불러오던 것이라 한다. 서울에서도 사계축(四契축)이란 만리재에서부터 남쪽으로돌아서 옛날 청패(청파동) 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의 소리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왜 이 고장 소리꾼들을 사계축이라 하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 잡가를 부르던 소리꾼은 문안 · 웃대 · 아랫대 등 두루 있었지만 사계축의 소리꾼 가운데 추조박(秋曹朴)과 같은 뛰어난 명창이 있고 이들이 현재의 잡가를 만들어내어 오늘날 명인에까지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추조박이란 추교신(秋敎信) · 조기준(曺基俊) · 박춘경(朴春景)의 3인을 뜻한다. 이들의 생몰연대(生沒年代)와 활동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개 조선후기 1800년대 초이었을 것이다. 그 중 나이가 아래이면서 소리 솜씨는 으뜸이었던 추교신(秋敎信)과 애오개(阿峴)에서 놋그릇 깎고 갓의 대우를 만들며 목청좋고 기골이 장대했던 조기준(曺基俊), 밭쟁이를 하던 박춘경(朴春景)이 사계축 소리를 도맡아 이끌었다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지역사회집단의 공공회당(公共會堂)을 도청(都廳) 또는 공청(公廳)이라 하였다. 서울지역의 경우 반지하식 움집으로 되어있는 공청을 속칭 깊은 사랑이라고도 하였다. 공청의 규모는 대체적으로 크게 지은 움집의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이곳에서 파를 기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파움’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였다. 움집으로 지은 것은 겨울철 난방의 편리를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크게 지은 움집이라 하나 겉보기와는 달리 천정엔 반자를 하고 벽을 따라 병풍을 두르고 보료를 깔아 사랑방으로 쓰기에 불편이 없어 소리방의 구실을 잘했던 것이다.

사계축과 같은 소리꾼들이 공청에서 소리만을 벌일 때에는 먼저 가사나 시조와 같은 느린 노래에서 시작하여 긴잡가로 넘기고 휘모리잡가나 빠른 민요로 판을 막았다.

가사 가운데 처사가(處士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와 같은 가사는 하규일(河圭一)과 같은 풍류방의 가객이 부르기 꺼리던 것이라 한 것으로 봐서 임기준(林基俊
(1868∼1940))과 같은 공청의 가객들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문화적 상황 아래서 ‘푸른 산중하에’ ‘창내고저’와 같은 사설시름시조, 수잡가(首雜歌)로 분류되는 변형시조와 그리고 ‘곰보타령’ ‘한 잔 부어라’ ‘만학천봉(萬壑千峯)’ ‘생매잡아’ ‘6·7월 흐린 날’ · 병정타령 · 순검타령 · 비단타령 · 바위타령과 같은 휘모리잡가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기 풀뭇골(치동)에살던 소릿꾼 이현익(李鉉翼)이 이런 휘모리잡가를 많이 지었다고 전한다.

긴잡가(긴雜歌)는 사계축 소리꾼들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라 한다. 사계축 명창에 추교신의 음악을 조기준이 이었다 하고 조기준의 문하에서 장계춘(張桂春, 1868∼1946) · 이경준(李慶俊, 1860∼) · 한인호(韓仁浩, 1860?∼?) · 박춘경(朴春景, 1850?∼1920?)이 계승하였는데 긴잡가의 발전에는 박춘경이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긴잡가는 유산가(遊山歌) · 적벽가(赤壁歌) · 제비가 · 소춘향가(小春香歌) · 선유가(船遊歌) · 집장가(執杖歌) · 형장가(刑杖歌) · 평양가(平壤歌) 등 8잡가와 달거리 · 십장가(十杖歌) · 출인가(出引歌) · 방물가(房物歌) 등 잡잡가(雜雜歌)를 통틀어 12잡가라 치는데 이 12잡가 가운데 첫손을 꼽는 유산가는 박춘경이 지었다. 박춘경의 문하에서 박춘재(朴春載, 1877 또는 1881∼1948)와 최경식(崔景植, 1874∼1949 또는 1876∼1948) · 주수봉(朱壽奉, 1870?∼?)과 같은 명창이 나왔다.

박춘재는 박춘경에게 시조와 잡가를, 조기준에게서 가사를 배웠다. 그는 1900년에 궁내부 가무별감(歌舞別監)을 역임했으며 원각사 · 광무대 시절에는 문영수(文泳洙)와 더불어 재담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맹인재담 · 장대장타령 · 개넋두리 등 재담으로도 이름이 높았지만 가사 · 시조 · 잡가 · 선소리에 두루 능하였고 발탈로도 이름이 높았다. 박춘재는 최경식 · 김홍패(金紅濬, 1877∼1950) · 보패(寶貝, 1860∼1945)와 함께 원각사 · 광무대에서 잡가 민요를 많이 공연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박천복(朴天福) · 오영근(吳英根) · 김경호(金慶浩)와 같은 소리꾼이 났다.

최경식은 조기준에게 가사 · 시조를, 장계춘에게 가사를, 박춘경에게 잡가와 민요를 배웠는데 서울 잡가의 전승에 공헌이 크다. 그의 문하에 최정식(崔貞植) · 유개동(柳開東, 1898∼1975) · 정득만(鄭得晩, 1907∼) · 이명길(李命吉, 1885∼1960) · 탁복만(卓福萬) · 박인섭(朴仁燮) · 원경태(元慶兌) · 이창배(李昌培, 1913∼1984) · 김수현(金洙鉉, 1898∼1970) · 김순태(金順泰, 1913∼1978) · 엄태영(嚴泰泳, 1883∼1951) · 김태운(金泰運, 1895∼1951)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그는 조선가무단을 주도한 적이 있으나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조선말기와 일제초기에는 박춘재 · 최경식 외에도 주수봉 · 한인호 · 이경준 · 탁순흥(卓順興) 등이 활약하였다.
주수봉은 박춘경에게 배웠으며 경기잡가의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또 조선권번(朝鮮券番) 사범으로 있으면서 이진홍(李眞紅) · 표연월(表蓮月) · 묵계월(墨桂月) · 김옥심(金玉心) 등 많은 여자 잡가 명창을 길러냈다.
한인호는 박춘경에게 배웠고 잡가와 재예로 이름이 높았다. 제자로 원범산(元範山, 1883∼1948)을 길러냈다.
탁순흥은 삼개 사람으로 잡가 시종의 대가였고 천자뒷풀이 장타령을 새로 짰다고 한다.
이경준은 청파동에 살았고 조기준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동배 명창 차학봉과 더불어 긴잡가 가운데 하나인 방물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일제 때에는 박춘재 · 최경식 · 주수봉 · 한인호 · 이경준이 계속 활동하였다. 한인호 문하에는 원범산, 최경식 문하는 최정식 · 유개동 · 엄태영 · 이명길 · 김태운 · 박인섭이 활동하였다.
한편 예기학원(藝妓學院)을 통하여 많은 여자 명창들이 배출되었다. 조선말기에는 서울에서 김홍도(金紅桃) · 보패 · 강진 · 연연 등 여자 잡가 명창이 있었다. 예기학원이 광교조합(廣橋組合)으로 되고 일본식의 권번이라 부르면서 한성권번 · 조선권번 · 종로권번 등이 생겨났다. 한성권번에는 유개동이, 종로권번에는 박인섭이, 조선권번에는 주수봉과 최정식이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이유색(李柳色) · 유운선(柳雲仙) · 박채선(朴彩仙) · 조목단(趙牧丹) · 김연옥(金蓮玉)이 1920년대에 활동하였고 1930년대에는 표연월 · 신해중월(申海中月) · 김옥엽(金玉葉) · 홍소월(洪笑月) · 기목단(起牧丹) · 장옥화(張玉花) · 임명옥(林明玉) · 임명월(林明月) · 손진홍(孫眞紅) · 박부용(朴芙蓉) · 곽명(郭溟8 · 곽산월(郭山月) · 조백조(趙白鳥) · 묵계월 등 수많은 여류명창이 잡가 · 민요 명창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최경식이 주동이 되어 경서도명창(京西道名唱)을 모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만들었다. 단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였다.


「남자 : 박춘자 · 권경춘 · 최화춘(崔和春) · 정한규(鄭漢圭) · 이건상(李健相) · 유개동 · 최정식 · 이명길 · 이명산(李命山) · 탁복만 · 엄태영 · 김태운 · 이칠성(李七聖) · 정득만 · 김종수(金鐘秀) · 이만흥(李萬興) · 원범산 · 김수현 · 최석조(崔錫祚) · 이순일(李順日) · 박윤병(朴潤秉) · 김두식(金斗植) · 최병숙(崔炳淑) · 박인섭(朴仁燮) · 김병규(金炳珪8 · 김창연(金昌淵) · 오성열(吳聖烈) · 조원식(趙元植) · 오봉수(吳鳳樹) · 이창배 · 임도길(林道吉) · 김경호(金慶浩) 여자 : 장채선(張彩瑄) · 이창순(李昌順) · 이진홍 · 김송죽(金松竹) · 이일선(李一善) · 채운선(蔡雲仙) · 강명자(姜明子) · 최명일(崔明日) · 최영자(崔英子)」

이 단체는 경기소리 명창의 총집합체였다. 그러나 실제 단체공연 활동으로는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1940년대의 조선음악협회에 조선악부 소속 조선가무단은 최경식을 비롯하여 정득만 · 이창배 · 이일선(李日善) · 이정화(李正華) · 이순길(李順吉) · 이향옥(李香玉) · 심연옥(沈蓮玉) · 이경자(李京子) · 이학자(李鶴子) · 박홍패(朴紅濬) · 김연옥(金蓮玉) 등 경기민속악인들이 남도악인과 함께 출연하여 공연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원범산은 한인호에게 배웠고 최경식에게 재수했으며 가사 · 시조 · 긴잡가에 뛰어났다. 최정식이 그의 문하에서 휘모리잡가를 배웠고 김태운 · 이창배가 그의 문하를 거쳤다.
최정식은 박춘재에게 잡가 시조를 배우고 최경식 · 최상욱(崔相旭)에게 가사 · 시조 · 잡가를 배웠다. 조선권번 사범으로 있으면서 정경파(鄭瓊波) · 묵계월 · 조백조 · 안비취(安翡翠) 등 많은 여류명창을 길렀다. 그는 작곡에도 재질이 있어 금강산타령 · 풍제가(豊祭歌) 등을 작곡하고 서도잡가 제존(祭尊)을 축소 개편했다 한다.

유개동은 장계춘에게 가사를, 박춘경에게서는 잡가를, 최경식에게 가사 시조를 배워 입창에 능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장국신(張菊心) · 장채선(張彩瑄) · 이비봉(李飛鳳) · 주학선과 같은 여자 명창이 나왔다. 뒤에 중요무형문화재 ‘산타령’ 보유자가 된다.
박인섭(1898∼1951)은 최경식에게서 가사 · 시조를, 박춘재에게 잡가를 배워 잡가 입창에 뛰어났다. 종로권번과 조선권번이 병합, 삼화권번이 되자 이곳의 사범으로 있으면서 잡가 시조를 가르쳤다.

조선말기 서도잡가명창 허득선(許得善)과 김방울이 서울에서 서도소리를 공연하였고 원각사 시절에는 평양출신 문영수(文永秀, 1867∼1930?)와 이정화(李正和, 1865∼1920)가 서울소리명창 박춘재와 더불어 공연하면서부터 서울에서도 서도잡가와 민요를 부르는 명창들이 많이 생겨났다. 김홍도는 서울소리 명창이나 서도소리 배따라기를 잘 불렀고 보패 또한 서울소리 명창이나 광무대에서 서도소리 개타령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평양과 해주에서는 김관준(金寬俊)이라는 서도명창이 나서 배뱅이굿 · 안중근의사가 · 까투리타령 등 여러 소리를 내었고 김종조(金宗朝) · 최순경(崔順慶) · 김칠성 · 김주호(金周鎬) · 이인수 등과 같은 여러 명창을 배출하였다. 허득선 · 문영수 · 이정화가 서도소리를 퍼뜨려 박춘재 · 최정식 · 박인섭 · 김태운 · 유개동 · 김경호 · 원경태와 같은 경기소리 명창도 서도소리를 능하게 부르게 되었다.

평양에서는 김밀화주(金密花珠)라는 여자 서도소리 명창이 있어 기성권번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 밖에 최섬홍(崔蟾紅) · 이진봉(李眞鳳) · 백목단 · 이계월 · 길진홍 등이 있었다. 김밀화주 문하에서 장학선 · 이반도화(李半島花) · 이정열 · 이부용 · 장금화(張錦花) 등이 나왔다. 이 가운데 이진봉 · 장학선 · 이반도화 · 이정렬 등 많은 명창들이 서울에서 서도잡가 명창으로 활동하였다.

남도소리에는 잡가라 이르는 소리 분야가 있으니 이는 민속가요 가운데 정가(正歌)와 판소리를 제외한 것을 총칭하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선소리(입창) 아니면 민요에 든다. 서울에서 조진영(趙進榮) · 장판개(張判介)와 같은 명창이 남도잡가를 많이 공연하였다. 잡가는 보염(報念)과 같은 선소리와 육자배기와 같은 민요이기 때문에 선소리 산타령 분야에서 언급하겠다. 왜냐하면 남도에는 서울의 좌창과 같은 잡가 분야가 없기 때문이다. 이화중선(李花中仙) · 박녹주(朴綠珠) · 김소희(金素姬) · 신금홍(申錦紅) · 김추월(金秋月) · 최소옥(崔素玉)과 같은 판소리 명창들이 서울에서 남도민요를 공연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1945년 광복이 되어 국악원이 발족되자 민요부장인 최경식과 그를 보좌하여 이창배가 국악 부흥에 노력하였다. 한편 경기민요 명창들이 국악예성사(國樂藝星社)를 조직하여 공연과 방송활동을 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명창들은 박천복 · 장소팔 · 정득만 · 이은관(李殷官) · 이복재(李福才) · 정봉선(鄭奉仙) · 윤일지홍(尹一枝紅) · 한정자(韓貞子) · 장국심 · 조백사(趙白史) · 지연화 · 김정숙(金貞淑) 등이었다.

6·25 전쟁으로 모든 단체는 해체되었고 많은 명창들이 공연활동의 불가능으로 전업하는 사태가 생기었다. 이창배를 비롯한 극소수 명창은 교육에 종사하거나 학원에서 후배를 양성하였다.
국악을 전공하는 학교로 국립국악원의 국악사양성소와 국악예술학교가 생겼는데 국악사양성소에는 이창배가 경기잡가 민요를 가르쳤고, 국악예술학교에서는 김순태 · 이소향(李少香)이 경기잡가 민요, 김소희 · 박초월(朴初月)이 남도민요를 가르쳤다.

1957년에는 이창배가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설립하면서 경서도(京西道)소리의 중심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창배는 잡가 입창 민요 사설을 정리하여 『가요집성(歌謠集成)』이라는 저서를 여러 권 내었고 1960년에는 을지로 입구에 있던 원각사에서 ‘제1회 청구고전성악연구학원 이창배 · 문해상 발표회’를 가졌다. 제1회 민요대발표회는 남녀 경서도 명창 27명과 이창배 문하생 50여명이 출연하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경서도소리 공연이었다. 이때 출연한 명창들은 유개동 · 김수현 · 정득만 · 박천복 · 김순태 · 원명길(元明吉) · 박천길(朴千吉) · 임유산(林有山) · 윤태봉(尹泰鳳) · 김효산(金曉山) · 이진봉 · 이소향 · 묵계월 · 정봉선(鄭奉仙) · 윤일지홍 · 최명월 · 백운선 · 정선녀(鄭仙女) · 이은주(李銀珠) · 노은화(盧銀花) · 김옥심(金玉心) · 장국심 · 주학선(朱鶴仙) · 강옥주(姜玉珠) · 김명희 · 최금란(崔錦蘭) · 지연화 등이었다.

1961년 같은 장소에서의 제2회 민요대발표에서는 제1회 때와 같이 경서도 민요 잡가 입창을 공연하였다. 이 때 이은관이 배뱅이굿을 공연하였다.
1968년에는 선소리 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면서 이창배 · 정득만 · 김순태 · 김수현(일명 태봉) · 유개동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는데 모두 경기잡가 민요의 명창들이었다. 동년에 구성된 사단법인 선소리보존회는 경기 12잡가보존회를 겸하였고 이사장은 이창배였다. 

1974년에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제1회 선소리 산타령 및 경기 12잡가 발표회를 가졌다. 이 때 출연한 명창은 이창배 · 정득만 · 유개동 · 김순태 · 박태여(朴泰汝) · 최창남(崔昌男) · 황용주(黃龍周) · 백영춘(白榮春) · 윤종평(尹鐘平) · 조순자(趙順子) · 김현규(金鉉圭) · 현범수(玄範洙) · 이은주(李殷珠) · 묵계월 · 안비취 · 김옥심 · 한정자 등이었다.

1975년의 2회 공연에서는 경기잡가가 ‘경기민요’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고 안비취(1926∼ ), 묵계월(1921∼ ) · 이은주(1922∼ ) 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1년에 이미 57호 보유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민요연구회를 조직하였던 바 이때 회원으로는 안비취 · 이소향 · 묵계월 · 이은주 · 김옥심 등이었고 회장에 안비취, 고문에 정득만 · 이창배 · 김순태가 추대되었다.

안비취는 본명이 복식(福植)이며 최정식에게 잡가를 배웠고 이춘희(李春羲) · 김숙근(金淑根)을 길러냈다. 묵계월의 본명은 이경옥(李瓊玉)이며 최정식 · 주수봉에게 배웠고 임정자 · 고주낭을 제자로 두었다. 이은주는 본명이 윤란(潤蘭)이며 원경태에게 배웠고 김금숙을 이수자로 배출했다.

한편 서울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서도소리 명창들을 대상으로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서도소리를 지정하였다. 장학선(1906∼1970)을 보유자로 인정하였으며, 1970년에는 보유자를 중심으로 서도소리보존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국립극장에서 서도소리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1971년에는 김정연(金正淵
(1913∼1987))과 오복녀(吳福女 (1913∼ ))를 보유자로 추가 인정하였다. 1972년에는 제2회 발표회를 가졌으며 이듬 해에는 서도가무발표회도 하였다.

한편 양소운(梁蘇云) · 이근성(李根性) · 지관용(池寬龍) · 최경명(崔景溟8 · 김실자 · 박동신(朴東信) · 장용수 등의 황해도 출신 명창들이 황해도 민속예술 보존회를 조직하였다. 1972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황해도민요 공연을 하였으며 이듬 해에는 제2회 발표공연을 가졌다.
서울에 거주하는 김소희 · 박초선(朴招仙) · 오정숙(吳貞淑) · 한롱화(韓弄化) · 성창순(成昌順) · 신영희(申英姬)와 같은 판소리 명창들이 가끔 남도민요 공연을 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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