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행복하게/On My Travels

개성 답사 2008.5.20.

hanngill 2008. 5. 26. 12:23

 

2008년 5월 20일

하룻내 개성 開城 답사 하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 의해 장막으로 반세기를 넘게 가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옛 수도 고려의 500 년 도읍지 개성을 방문하게 되어 다소 마음이 설레였다.

고려가 세워지고 500년이나 우리 반도의 서울이었으니 그 자연환경과 지세 그리고 선인들이 살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유적을 볼 수 있을가 하는 기대와 공산 독제치하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가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픈 생각을 가지고 방문 길에 올랐다. ( 이번 여행의 참 성격은 실로 즐기는 관광이 목적이 아니다. 누구나 같은 심정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방문 혹은  답사라고 하고 싶다.)

 

 집결지 임진강역에서 현대아산버스를 타고 도라산 아래 남측출입사무소에 모여 (전국 각지에서 온 500명정도- 하루에 이 이상 인원은 북측의 수용능력 부족으로 불가하다고 함)  07시부터   출경 수속을 이행하고 08시에 관광증 ( 여권 비자인 셈)을 목에 걸고 현대아산 개성관광차 11대 (이 차로 오늘 하루 여행을 하게 된다 )에 몸을 싣고 북측으로 출발하였다. 날씨는 무척 쾌청하였다. 처음으로 넘어 가 보는 비무장 지대 DMZ , 차창 밖 좌우로 보이는 손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어쩜 평화롭게 보였다. 조그마한 한 나라에서 철조망으로 갈라 막아 놓고 총들고 서서 서로 적대하며 못 들어오게 경계하고 있는 이 꼴이 무슨 짓인가 !  무엇때문에 그러하고 있는가 !  잘 살자고 그러는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이 불합리를 합리라고 우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   남쪽 군인은 크고 통통하게 잘도 생겼는데 북쪽 군인은 야위고 작고 초라하여 남북 차이를 여기서부터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약 15 분간 달려 북측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또 다시 입경수속을 밟았다. 마치 입국이 까다로운 다른 나라를 들어 가는 기분이다. 소지품을 조사한다. 즉시 내용 확인이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 외에는 못가지고 들어 간단다.  신문지 한 장도 못 들어 간단다. 북한 인민이 남한 신문 보면 큰 일이란다. 어느 나라가 이러한가. 쇠땡이로 보아서는 뒤 돌아 서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입경 수속을 마치고 08시 40분에 현대아산의 개성관광차를 타고 개성 관광? 에 들어 갔다. 

 오늘의 일정은 송악산 벅연폭포와 관음사를 보고 개성시내 통일관에서 점심을 먹은 후 포은 정몽주 사당이 있는 숭양서원과 선죽교를 들러보고 고려시대의 대학인 성균관(고려 박물관)을 가 보기로 되어 있다.  개성으로 가는 길은  북측출입사무소에 바로 이어서 남한이 건설한 개성공단을 통과해 지나 간다.  개성공단은 그 규모가 대단하다.  우리은행도 들어와 있다. 아스팔트 길도 여기까지는 잘 포장되어 있다. 곧 여기를 통과하여 개성으로 들어 가니 벌써 보이는 것이 민둥산에 똑 같이 허름한 벽돌 기와집 들이다. 이런 붕어빵식 집들은 우리 남한이 새마을 사업을 한창 하고 지붕개량을 하고 있을 무렵 지은 것 같다. 오히려 우리 보다 앞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찌하여 뒤로 가고 말았는가?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길이 헐어 있고 우리 차외에는 다른 차가 보이지 않는다. 밖에 보이는 개성 시가지는 회색지대이다. 사람이 사는 도회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안내원이 뭐라고 지껄여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보고 벌써 그들이 사는 모습에 대하여 추측이 가는데 말이 필요 없다. 박연 폭포까지 약 30 키로미터를 간다.  차창 밖으로 오가는 사람을 볼려하는데 하나도 안 보인다. 그 사이 수 많은 시골 동네를 보았는데 동구 앞에는 어김 없이 군발 하나가 서 있다. 우리가 가는 사이 사람을 못 나오게 하는 모양이다. 들에도 사람이 안 보인다. 한 참 논일을 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논이 모심을 준비가 안되어 있고 밭은 척박하여 작물이 안되는 성 싶다. 소나 돼지 우리도 안 보인다. 개나 닭등 가축도 안 보인다. 도대체 사람 사는 마을 같지가 않다.  가는 곳이 다 비어 있다  낮에도 유령이 나 올 것 같은 빈 집들만 보인다.( 아마 사람을 가두어 둔 것 같다. 도로옆 가까운 집 유리창을 들여다 보니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벌써 마음은 관광기분이 아니다. 내 맘뿐이 아니다. 차내 사람들의 표정이 다 그래 보인다.

 

한 참을 가다가 송악산내 분지로 들어가니 갑자기 여기 만큼은 숲이 좋아 보였다. 이런 숲속 계곡을 얼마간 굽어 들어 가니 우리가 탄 차들이 설만한 주차장이 보인다. 여기서 내려 조금 더 들어 가니 길일성 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어색한 글을 빼곡히 새겨 넣어 놓은 크나큰 바위비석과 광장이 있었다. 여기서 사진을 찍는 것을 안내원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좋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이 지금 이렇게 김일성부자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집단화 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찍어 가는지를 모르는 성 싶다. 조금 더 올라가니 매점이 하나 보이고 곧 박연 폭포가 보인다. 가물러서 물줄기가 약하다. 물이 많을 때는 장관일 것 같았다.  황진이黃眞伊 의 청아한 애교스런 시가詩歌와 서화담徐花潭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의 호탕한 담소 소리가 섞여 들려 오는듯 싶다.  맑은 물과 수려한 숲이 인상적이다. 여기도 어디나 처럼 바위에 사람 이름이 많이 새겨저 있어 흉하게 보였다.  여기에서 쉬면서 하루를  사색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아늑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위로 2 킬로미터 정도의 숲속 산길을 걸어서 관음사로 가는 길은 참 기분 좋았다.  아직 오염이 없는 자연 그대로라서 아주 좋았다.  고려시대 축조된 대흥산성문을 지나면 곧 관음사가 있다.  오래된 사찰로 경관이 아름다웠다.  조금 더 올라가면 대흥사가 있다. 여기 송악산에는 여러 유명한 사찰들이 많다.  관음사, 대흥사, 영통사등.  영통사는 관모산 아래 대각국사 의천이 1027년 창건한 고려의 대표 사찰이다. 임진란때 소실되어 그대로 있다가 남북이 합작하여 2005년 복원되었다.  국교가 불교인 고려시대 수도 부근의 이런 사찰들에 큰 스님들이나 큰 인물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일정에 따라 곧 하산해야 함이 아쉬웠다.  다시 개성 시내로 향하게 되었다.  되 돌아 오는 길에 다시 차창 밖을 내다 보아도 인적이 드물다. 저렇게 산 등성이까지 개간 해 놓고 사람은 얼마 없으니 어떻게 저 논 밭을 경작할 것인가 염려 스럽다.  농기계라고는 모심는 기계 하나 보았다. 넓은 들에 나와 일하는 사람들이 별로 안 보인다. 이 농지를 다 인력으로 하기에는 벅찰 것 같다. 어쩌다가 몇 사람씩 보이는데 움직이는 거동이 느려 보인다. 못 먹어 힘이 없어서 일까?  못 먹어서 자라지를 못해서 일까 ? 모두 다 사람들이 작고 말라 있다. 차는 없고 그나마 자전거 몇대씩이 보일 뿐이다. 농지는 땅심이 없어 여기 저기 조금씩 보이는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걱정된다. 

 개성 시내로 들어 왔다. 회색도시다. 집은 헐어 있고  그래도 쓸만한 건물은 관청이나 김일성 부자 김정숙 찬양 건축물이다. 가는 곳 마다 김일성가 찬양 문구나 축조물이 보인다.  문화재 설명 건판에도 어김없이 김일성 김정일 찬양문구가 들어 가 있다. 대로변 상가인지 아닌지 간판을 보니 우리의 시골 작은 마을 동네 간판 같기도 하다.  남한의 1950년 60년초가 연상된다. 그보다 더 한것은   인구 15 만이 넘을 도시가 사람이 안 보인다. 차도 없는 빈 거리이다. 큰 길에 차는 없고 인도에 자전거 탄 사람 몇 보았을 뿐이다. 그나마도 우리 일행 500 여명 풀어 놓으니 사람 사는 것 같다.  점심은 통일관에서 13첩 반상으로 개인별로 그릇이 13개가 나온다. 한식으로 우리가 늘 먹는 음식들이었다. 한복으로 예쁘게 차려입은 써빙 아가씨들이 특산 30도 소주도 한 잔씩 딸아 준다. 짓 굿게 한 잔 더 달라 해 봤더니 한 잔씩밖에는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통일관 식당 부근에서만 왔다 갔다 하며 사진을 찍었다. 다른 곳에는 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안내원 말이 김일성 동상이나 김정숙 기념관이 들어가게 사진 찍어 달랜다.  시내쪽을 찍을려니 말린다. 도대체 어느나라에 이런 곳이 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식당에서 음식 남겨 나오면 종업원이나 안내 아가씨들이 먹는 단다. 그래서 먹다가  남겨주기를 기다린단다.

 

점심을 마치고 나서 버스 5 대 6대로 나누어 일부는 숭양서원으로 일부는 선죽교로 향했다. 거리에는 다른 차는 보이지 않고 인도에 자전거 탄 사람 몇 보았다.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로 깔끔하게 차려 입은 여인 몇이 인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시컴한 사람들과 대조적이었다. 이 부근 대학 다니는 여대생인가 아니면 아마도 연기가 아닌가 의아심이 간다. 참말로 15 만 인구가 사는가 의심 스럽다. 내가 본 사람은 고작해야 일이백명도 안될 것 같은데...  

숭양 서원은 이조 선조때 유림들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을 추모하기 위해 정몽주의 집터에 새운 사당이요 서원이다.  숭양서원과 선죽교를 구경하고 나서 고려 박물관으로 향했다. 

 고려 박물관은 고려시대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개성부근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 해 놓았다 한다.  경내 들어서면 우람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 온다. 우리 남한 향교에 가도 큰 은행나무등이 눈길을 끄는 것처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 보존 된 것 같았다. 

 

 일정을 마치고 나니 피곤하다.  만월대, 왕건릉, 공민왕릉, 영통사를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채, 그리고 개성 시가지를 둘러 보지 못한채, 개성 사람들을 만나 보지도 못한채 서운함을 금치 못하면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출경 수속시에 사진기 사진을 일일히 들여다 보고 검사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나는 메모리를 빼 두었는데 그것은 묻지 않았다. 더 많이 찍어 올 것을 ...

 

 

그라도 여기 저기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오고 간다.

 

개발이 안 되어 있으나 그 덕에 자연 오염이 없어 좋아 보였다. 

우리 남한의 50년 60년대 초에 그러 했듯이 자연 오염이 없고 시냇물이 맑아 목욕하고 빨래를 할만 하였다. 어찌 보면 자연 오염이 없어서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자연은 한 번 훼손되고 오염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남한도 이점 각성하고 함부로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보호하는데 개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런 기회에 상기해 보기 바란다. 건성으로 여행 관광하지 말고...

 

과연 북한 당국이 인민을 위한 정부인가?

이렇게  유서 깊은 도시가 폐허가 되고, 인민들은 처참하게 사는데 그래도 김일성 김정일 찬양노래만 부르고 있어야 하는가?  인민들 머리가 돌아 버렸는가?  생각이 갇혀있고 복종에 길들여저 있어 짐승같이 노예처럼 살아야 되는가?   들은 이얘기로  굶어서 힘이 없어 농사일 하려 들에 나가지 못한다 한다.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몇 안 보이던데 풀뿌리 케러 나가느라 학교에 못 간다 한다. 과연 그러한 느낌이 든다.  어디 가나 생기라곤 없다. 산에도 들에도 먹을 것이 없어 보인다.  산새도 물고기도 안 보인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가 있는가?  내 민족 내 동포이고 내 혈족들이 이렇게 사는 것을 보니 한 없이 아픈 맘으로 뒤 돌아 왔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어찌해서라도 북한 굶주린 사람들을 살려 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생각 나지 않는다. 일단 사람을 살려 놓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 계획을 세워 공존의 길을 가야 한다. 북한 당국자들과의  협상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국민을 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 원조하는 것은 그들 배만 채워주는 꼴이 되고 만다. 개성 공단 같은 공장을 휴전선 부근에 많이 새워 그들에게 일터를 주고 먹는 것과 교육하는 것을 지켜보아 가면서 도움을 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핵무기가 한 반도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 집단의 생존을 위해 보유하려는 것이다. 대단히 위험하다. 반드시 제지해야만 한다. 햇볕정책도 효험이 없을 것이다. 먹을 것이나 줄것을 우리가 직접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법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지금 북한 민족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좌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정부나 민간 단체는 직접 나서 북한 주민을 도와 주어야 한다.

 

한 편 북한 동포는 남한이 지금 주고 싶어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어 주저하고 있슴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면 고맙게 받고 가슴으로 뜨거운  민족애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일일이 트집이나 잡고 몽리 사나운 말투 좀 그만 쓰고  부드럽게 서로 다가 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북한이 변해야 한다. 남한 사람 모두가 북한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제 변하여 바른 정신으로 돌아 와야 한다. 주는 재미도 있고 받는 고마음도 있다. 정상으로 돌아 오라.

 

  hanngill

 

개성은 송도(松都), 송악(松岳), 개경(開京), 송경(松京)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본래 경기도에 속했었으나, 북조선 치하에서 1951년에 개성지구(開城地區)로 바뀌었고, 개성직할시를 거쳐 2003년부터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개성특급시(開城特級市)의 인구는 2000년 현재 145,000명으로 추산된다

 

 *** 개성 답사의 길을 터주고 다녀 올 수있게 주선해 준 관계자 여러분들과 현대아산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뱍연폭포

 

 

 

 

 

누가 쓴 글인지 바위에 멋들어지게 새겨넣은 훌륭한 글이다.

날라 흘러 똑 바로 떨어지기 삼천자라

 이거 하늘에 은하가 떨어지는거 아닌가

폭포수 쏟아 지는 것이 마치 우주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은

대단한 감동을 칠언시로 과장법을 써서 표현 한것이다. 

( 이 글씨를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던데 마구 밟고 지내더라)  

 

 

 박연폭포 못 가에서 쉬고 있다

 

 

 위성에서 찍은 개성시 중심가

 

 위 아래 사진은 점심을 먹은 통일관 음식점 앞에서 찍은 것이다. 위는 개성시 중심 공원에 세워놓은 김일성 동상이고 아래는 같은 자리에서 찍은 개성 중심시가지의 사진이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다.  교차로에 교통정리원은 왜 새워 놓고 있는지?

 

 

 중심가 사거리 - 우회전하면 바로 남대문이 있다

 

 

 

 

 

 숭양서원

  포은 정몽주 영좌

 

 숭양서원 뜰

 

 

 

 성균관에 들어서면 넓은 뜰과 크나큰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성균관 뜰

 

 

 성균관

 

 관음사 대웅전

.

 

암굴 관음상

 

 

 관음사 탑

 

13첩 반상

 

 

 통일관식당 전면

 

 

 

 

 

 

 

 

 

 

 

 

 

 

 

 

 

 

 

 

 

 

 북측의 안내원

 

 

****

북측의 실상을 담은 사진은 찍지 못하였다.

여기 사진은 안내를 받은 지역 범위 내에서만 찍은 사진들이다.

도시나 농촌의 실상은 우리의 상상을 벗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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