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물리학의 전망
물리학의 패러다임 변혁을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눠볼 수 있겠다.
Ⅰ. 고대 및 중세 : 아리스토텔레스
․정신과 물질의 상호관계가 미분화된 상태
Ⅱa. 근대 (고전물리학) : 뉴턴, 데칼트
․정신과 물질의 엄격한 분리. 자연현상의 객관성과 실재성.
․관찰자와 무관한 자연법칙
Ⅱb. 현대 (20세기 물리학 : 상대론과 양자물리학)
: 아인시타인, 하이젠버그, 쉬뢰딩거.
․정신과 물질의 분리
․자연법칙과 인식에 있어서 관찰과 관찰자의 중요성
Ⅲ. 미래의 과학 전망
․정신과 물질(심리학과 물리학)의 통합적 접근
이상의 큰 틀을 염두에 두고 먼저 근대과학인 고전물리학의 과학철학적 관점을 요약하고, 20세기 물리학의 위치를 아주 간략하게 짚어본 후, 미래의 과학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필자의 졸저 『물리학과 대승기신론』(1999. 서울대학교 출판부)의 내용에서 일부 (pp.63-66; pp.121-129) 발췌한 것이다.
1. 고전역학의 과학 철학적 관점
고전역학은 문자 그대로 옛날의 역학이며 모범 또는 전형이 되는 역학이란 뜻이 되겠는데, 오늘날에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치되었다는 점에서 옛날의 ‘틀린’이론이란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동력학의 전형적인 이론체계이고, 기초적이며 현실 생활에서 대단히 유용한 이론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물리학을 공부하려면 먼저 고전역학부터 기본으로 배우는 것이 상례이다. 고전 역학은 우리의 일상적 자연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개념적 혼란이 없이 학습할 수 있기도 하다. 관찰과 현상의 관계에 있어서 고전 역학의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현상의 실재성 (realism) : 자연 현상은 인간의 존재나 관찰 여부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우리의 관념과 무관한 실재이다. 자연 현상이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지, 단지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관념과 환상에 불과한지, 또는 자연 그 자체는 알 수 없고 자연과 인간의 인식 체계간의 상호 결합의 결과인지 등등의 과학 철학적 논의는 옛날부터 있어 왔으며 간단히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고전 역학 체계 내에서는 자연 현상은 실재하는 것이며, 인간은 관찰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소박하게 믿고 과학탐구를 한다.
㈁ 법칙의 객관성 : 실재하는 현상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며, 이것은 누가 언제 어디서 보든 꼭 같은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실험 등으로 이를 찾아낼 수 있으며, 이것이 과학자의 할 일이다.
이 법칙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법칙의 기원 또한 큰 문제인데, 뉴턴 등 고전 역학의 창립자들은 하나님이 이 법칙을 준 것이며, 이 법칙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일이 된다고 믿었다. 자연법칙도 인간의 인식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정반대의 주장등 다양한 견해가 있음은 물론이다.
㈂ 정신과 물질의 분리 : 자연현상은 인간의 정신, 감정등 심리적 활동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진행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여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던가, 변형시킨다던가, 고장난 시계가 다시 돌아가도록 한다던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늘의 천둥벼락, 천재지변, 가뭄 홍수 등도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법칙에 따른 현상이다. 이 분리의 관점이 근대 과학(실험과 관찰에 토대를 두고, 수학적 정식화를 하는 과학)의 기본적 출발점인 바, 근대 이전의 미신적 태도와 비과학적 종교로부터 과학을 해방시켜 기계적 자연관을 발전시키는데 큰 동인을 제공하였다.
㈃ 관찰자(주관)와 관찰대상(객관)의 분리: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 대상은 서로 분리되어 구분된다, 예를 들어 멀리 있는 별과 지상의 관찰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상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뜰의 꽃과 관찰자인 나도 서로 떨어져 있어 명백히 구별된다. 고전역학의 탐구 대상은 거의가 이와 같았으나, 20세기에 들어서 가능해진 원자 세계의 경우 실험기구(이는 주관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와 실험대상(원자)의 분리는 그렇게 명백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양자 역학에서는 이 분리 관점의 타당성에 의문이 제기 되었다. 또 다른 예로 사람이 자신의 뇌의 활동을 관찰하는 경우에는 주관 즉 객관인 상황이다. 이 경우 고전 역학적 접근은 전면적 재검토를 요하게 된다.
㈄ 관찰대상과 나머지로의 분리 : 실험과 관찰에서 대상은 어느 제한된 공간상의 일부에 국한되고, 그 밖의 나머지 전 우주와 적절히 분리될 수 있다고 본다. 고립된 대상을 따로이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것들의 영향을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달의 운동을 연구하는데 멀리 있는 별들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까이 있는 태양과 지구 등의 영향은 적절히 고려해야하며, 그것은 고전역학체계의 관심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분리 고립된 대상의 취급 가능성은 예를 들면 마하의 원리 (멀리 떨어진 모든 별들의 영향이 달의 질량을 결정한다.)라든가, 생물처럼 기본적으로 주위 환경과 에너지와 정보를 교환함으로 존재하는 열린 체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 관찰 행위와 현상의 분리 : 자연 현상을 얼마든지 정밀하게 측정하여 정확한 관찰자료를 얻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즉 관찰 행위가 현상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가이다.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한다고 해서 달의 운동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전 역학에서는 대부분의 관찰과 현상 관계가 이와 같다고 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찰 행위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잘 계산해서 빼주면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그릇에 담긴 물의 온도를 재는데 온도계의 영향은 있지만, 그것을 보정해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에서는 관찰 행위가 현상의 상태를 크게 흔들어 놓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계산 보정이 불가능해진다. 이점이 고전 역학과 양자 역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2. 20세기 물리학의 위치: 불교사상사적 관점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등이 시작하고 뉴턴에 의해 확립된 역학(力學)체계는 20세기 이전까지는 과학의 전범(典範)으로 객관적인 자연의 진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역학의 확립에 힘입어 발전한 물질에 관한 화학이론, 전기에 관한 이론, 열 현상의 연구 등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역학의 개념과 이론체계의 바탕 위에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었다. 이를 고전물리학이라 한다. 19세기 말경에는 자연에 관한 중요한 발견은 거의 다 되었고, 새로운 원리나 이론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갑작스럽게 고전물리학이 그 밑바탕부터 무너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상대성이론의 출현과 양자개념의 도입으로 과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때문이었다. 20세기의 끝에 도달한 지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자연현상의 기본 이론으로서, 소립자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아직까지는 이 두 이론의 잘못된 점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20세기의 물리학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 이론의 한계가 어딘지 아직 모르고 있다는 뜻이며, 또한 무엇을 해야 좀더 나은 이론으로 발전되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은 두 개의 독립된 원리체계인데, 이들이 어떻게 하나의 원리체계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물리학 이론은 어디까지나 그 시점까지의 학설일 뿐이다. 그것은 계속 발전되고 또는 부정되면서 확장되는 등의 변화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물리학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인가? 이를 살펴보는 한 가지 방법으로 부처님의 깨치신 세계에 비추어 물리학을 내려다보는 것도 일리 있는 일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불교의 사상사적 발전에 비추어 물리학의 위치를 가늠해 보도록 시도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20세기 물리학의 자연관은 대체적으로 부파불교 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논했듯이, 무아설(無我說)에서 사람의 영혼이나 정신의 실체성을 부인하고 생명체를 물질의 일시적 집합체로 본다는 점은 물리학이나 생리학의 생명관과 일치한다. 그리고 현상계를 이루는 물질적 존재들이 객관적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도 기본적으로 같은 주장이다. 또 일체의 존재를 이루는 기본 요소로 법(法)을 상정하는 것도 물리학에서 원자나 소립자로 모든 물질이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과 유사하다. 혹은 물질적 존재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시공간상의 ‘사건’을 기본요소로 보는 상대론적 관점과도 유사하다. 양자물리에서 ‘파동함수’를 기본적 요소로 취급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일체현상이 공(空)하다고 보는 중관불교나, 아라야식만이 유일하게 있으며 일체의 현상은 거짓 환상에 불과하다는 유식불교나, 또는 불교의 기본적인 철학인 유심론의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물리학은 더 커다란 개념 혁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3. 미래 과학의 전망
㈎ 존재의 상대성
연기론(緣起論)의 핵심 주장인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현상적인 존재는, 혼자 독립하여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있게되는 상대적인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이든 그것 자체로서의 고유한 특성을, 다른 것과의 관계없이, 가질 수 없으니 이를 무자성(無自性)이라 하고, 따라서 여타와의 관계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성질들은 실재가 아니며 영속적인 것이 아니므로 공(空)이라 한다. “일체의 현상적 존재는 절대적 독립성이 없고 오직 다른 것과의 상대적 관계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라고 고쳐 쓴 연기론의 진술을 ‘존재의 상대성 원리’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는 중요한 원리가 몇 있는데 그 중의 첫째는 갈릴레오가 맨 처음 제안한 ‘상대성 원리’ 인바, 운동은 상대적이란 내용이다. 어떤 물체의 운동이든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것이지, 혼자서 하는 절대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특히 가속도가 없는 등속도 운동을 할 때 이 원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가속도가 있는 경우에는 언뜻 생각하기에는 절대 가속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중력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역시 상대적임이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밝혀졌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운동의 상대성’에 바탕하고 있다. 두 명의 관찰자가 상호 운동 관계에 있을 때 그들 각각이 보는 시공간과 자연현상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상대성 이론이다. 연기론을 비롯한 동양 사상에서는 운동만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되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노자의 도덕경(2장)은 좋은 예이다.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지만 그것은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다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알지만 그것은 불선(不善)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가 낳는 것이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은 서로가 성립시키는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며,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의 고하(高下)가 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音)과 성(聲)은 서로가 있어야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연기론은 모든 현상적 존재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상대성 이론의 확장 방향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제안한 상대성 원리에서 바로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올 수 없었듯이, 연기설에서 바로 과학적 연기론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인시타인의 경우 상대성 원리에 더하여 ‘광속 일정’의 원리가 필요했듯이 과학적 연기론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원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장래에 상대성 이론의 발전된 형태로서 과학적 연기론이 정립될 것을 기대해 본다.
㈏ 관찰자와 소립자
물리이론에서 관찰의 역할이 중심적 주제로 된 것은 양자역학에서 이었는데 특히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관찰의 한계와 영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으며, 관찰에 관한 논의를 광범위하게 촉발시켰다. 아직도 양자 현상에서 관찰행위가 현상의 인지에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미진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대체로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고전 물리에서는 “관찰과 관계없이 객관적인 자연현상과 법칙이 있으며, 사람은 점점 더 정교한 관찰로 이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관점이었는데,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은 현상자체를 흔들기 때문에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관찰의 정확성에는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관찰과 무관한 독립된 자연법칙이 있다는 주장은 하기 어렵다. 그러나, 관찰대상으로서의 객관적인 자연현상의 존재는 인정한다.”정도로 요약 할 수 있다.
기신론의 유심사상에 의하면, 일체 현상이 오직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지며 그 과정은 첫째로 무명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고, 둘째로 움직이는 마음에서 인식주관이 생기고, 셋째로 인식주관이 성립됨에 인식대상이 나타나며, 넷째로 인식대상들을 분별하는 생각들이 일어난다고 되어있다. 이는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에 대하여 양자역학의 관점보다 훨씬 강한 주장이다. 객관적 대상이 있으므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있으므로 대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물질과 정신의 통일적 견해와 같은 비약적인 탈바꿈을 하기 전에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기본을 찾는 과학이기에 20세기 말 현재까지 소립자들의 발견과 그들의 성질 규명을 목표로 많은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모르는 것도 많아서 물질의 기본을 밝히려는 노력은 벽에 부딪쳐 뚜렷한 진전이 없이 오리무중에 빠진 상황이다. 미래의 과학을 전망하는 의미에서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다. ‘물질의 기본은 가장 간단한 원초적 물질’이라는 기본 가정은 타당한가? 물질의 근본은 물질인가? 유심론의 입장에서는 물질의 궁극이 되는 물질이란 있을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환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의문은 ‘인식자의 주관에서 물질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는 궁극적 물질(Atom)을 찾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물리학은 새로운 비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 허공법계와 우주
공간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 곳에서 물체들이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상하 전후 좌우로 무한히 퍼져 나갈 수 있는데 무한히 펼쳐진 이 전체를 우주라 한다. 이것이 공간과 우주에 대한 상식적 이해라 하겠다.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은 물체들의 단순한 운동 터 이상으로 시간 및 물질과 밀접하게 연관된 동력학적 체계를 형성하게 됐으며, 그 크기도 시간에 따라 변하며, 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역사를 아인시타인의 장방정식(field equation)에 의하여 계산할 수 있는 과학적 우주론의 대상이 되었다. 또 양자물리의 기본적 법칙에 의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진공이란 있을 수 없으며, 텅 빈 듯한 곳도 자세히 보면 무한히 많은 파동들이 격렬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상이 대체로 본 양자 상대론적 우주공간 이론이라 하겠는데, 정확히 말하면 양자론과 상대론의 결합은 아직껏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 공간에 대한 이해 역시 미궁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불교에서는 공간과 우주는 인간과 별개인 무생명의 빈터가 아니다. 기신론의 경우 모든 대상이 인간의 주관에 의해서 나타나며, 삼계유심(三界唯心)인 만큼 마음을 떠난 독립된 객관적 실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관찰자와 분리 독립된 절대적 실체로서의 공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과 공간이 밀접하게 연결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은 미래의 과학에서 밝힐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1)
“동물들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살므로 마음 한 번 가지고 몸 한번 행동하고 말 한 번 한 것이라도 그 업인(業因)이 허공법계에 심어져서, 제 각기 선악의 연(緣)을 따라 지은 대로 과보가 나타나니, 어찌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리요”
저 허공 하늘은 텅 빈 것이 아니며, 양자의 파동만으로 가득찬 물질 현상만도 아닌, 인간의 의식과 밀접히 연결된 법계(法界)인 것이다. “일월성신(日月星晨)과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이 모두 한 기운 한 이치 어서 하나도 영험하지 않은 바가 없나니라”1)란 말씀처럼 일체의 천문기상 현상까지도 인간의 의식과 떠나 있는 것은 없다.
유식(唯識)의 관점으로 볼 때 우주내 일체현상은 결국 ‘아라야식’의 전변에서 나타나는 허환(虛幻)에 불과하다. 공간과 우주는 물질의 운동 터로 보이지만 실은 아라야식의 펼침인 것이다.눈에 보이는 우주는 광막하여, 빛의 속력으로 간다해도 태양까지는 8분쯤 걸리고, 은하수 끝까지는 수 만년, 마젤란 성운까지는 수 십만년, 퀘이자 까지는 수 억년이나 걸린다.이렇게 큰 우주이지만 마음의 전변이란 측면에선 아무런 거리가 없는 ‘하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에 끌리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우주는 그대로 ‘한마음’으로 직관적 파악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면 객체로서의 우주란 우리의 환상에 불과하므로 분별하여 만들면 무한하지만 분별을 멈추면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미래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가? 자못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물리와 심리의 통일
근대 자연과학의 정립과 성공은 물질현상과 인간의 심리 현상을 완전히 분리하고, 엄격하게 통제하여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반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신 현상은 주관과 객관으로의 분리도 어렵고 객관적인 실험과 반복적 관찰이 어렵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틀 안에서 다루기가 힘들다.
자연과학과 심리학의 이러한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래에는 이 두 분야가 어떤 형태로든 융합될 것으로 전망할 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유사과학의 형태로 마음에 의한 물체의 변형과 이동, 정신 집중에 의한 벽을 뚫고 보기, 몸을 공중에 띄우기, 미래 예언 등에 대한 관찰보고 및 대중시연이 행해지는데 이들 중 어떤 것은 사실적인 현상으로 연구 가치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들이 20세기 현재로서는 정통 과학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혹세무민의 사기행각인지 순수한 이적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무조건 비과학적이라고 내몰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자연과학의 틀이 갖고 있는 한계점을 밝힐 수 있는 좋은 힌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신론의 견해를 따른다면 물질과 정신을 나눠보는 분별식은 낮은 차원의 식이다. 이러한 거친 분별인식은 이보다 세밀한 심식에 바탕하고 있는 바 아무런 분별이 없는 한 마음에 무명의 바람이 불면 움직임이 일어나고 [업식業識의 생성], 이에 바탕 하여 인식주관[전식轉識]이 생겨나며, 인식대상[현식現識]은 인식주관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분별식은 이 인식대상을 구분하여 헤아리고 기억하는 사고 활동인 지식(智識)과 상속식(相續識)이다. 자연 과학의 틀은 이 분별식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물리학과 심리학의 통일을 위해서는 세밀한 심식의 수준까지 인식의 바탕을 올려야 할 것이다.
물리학과 심리학이 하나의 통일된 학문으로 융합되려면 물리학의 한계를 아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기신론의 다음 글은 이에 대한 적절한 안내가 됨즉하다1)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과 심(色과 心)을 추구해 보건대, 육진경계(六塵境界)가 필경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으며, 또한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시방으로 찾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 六塵境界 畢竟無念, 以心無所相 十方求之終不可得)
이 글의 해석을 원효는 그의「대승기신론소」에서 26)
“‘오음의 색과 심을 추구해 보건대’라고 한 것은 색음(色陰)을 색이라 하고 나머지 넷은 심이라 한 것이다. 각각 해석하는 중에 먼저 색관(色觀)을 해석하였으니, 모든 색을 부러뜨려 극미에까지 이르게 되어도 영구히 얻을 수가 없으며 마음을 떠난 밖에는 생각할 만한 상(相)이 없기 때문에 육진(六塵)이 필경 무념이라 한 것이다. 다만 마음 밖에 달리 색진(色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색을 찾아보아도 또한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형상이 없어서 시방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원효의 해석을 따른다면 물질의 근본을 알기 위해 물질을 계속 쪼개나가는 일은 아무리 오래 한들 자연의 궁극적 원리에 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마음밖에 따로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를 거쳐 도래할 것인지 아직은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이십세기 말에 소립자 물리학이 부딪친 근본적 장벽은 이러한 시기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예고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통일이 멀지 않은 미래에 시작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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