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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女眞族] [민족] <naver, daum>

hanngill 2007. 7. 27. 16:28
여진족 []
요약
동부 만주(滿)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본문

여직()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挹),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수() ·당()나라 때는 말갈()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여진족이 한국과 관계를 가진 것은 발해()가 멸망한 뒤 이들이 그 고토()에 준거한 고려 초기부터이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 양안()의 서여진[西]과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인데, 고려가 이들 두 곳의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한 것은 왕건의 북방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인은 활 ·말 ·화살 ·모피 등 전쟁 도구를 조공()하고, 의료 ·식량 ·농기구 ·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

이와 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소[]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이때 고려에 복속한 여진인으로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어 우야소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의 장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보내어 우야소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을 보내 겨우 화맹()을 맺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 ·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의 양성, 군량()의 비축 등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기군(:)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려부대)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편성, 특별부대로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까지 진출하여 함주()를 중심으로 9성()을 쌓았다. 또한 남방의 민호()를 옮겨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 안에 호국인왕사()와 진국보제사()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9성을 쌓은 뒤 이의 방어 자체도 어려웠고 또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을 쌓은 지 만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 주었다.

 

그 뒤 아구다[]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당시 집권자 이자겸()과 경주파 문신()은 금나라와 타협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원() ·명() 교체 이후에는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

고려를 이은 조선 초기의 대여진정책은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썼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조공무역(貿) 및 국경무역을 허락하였으며, 한양에는 이들의 사신(使)을 접대하는 북평관()까지 설치하였다. 당시 여진은 말 ·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 ·의복재료 ·농기구 ·종이 등을 교환해 갔다. 한편, 무력정책으로는 국경지방에 진보()를 설치하여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태조는 경원에 성보()와 주() ·군()과 역참()을 두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강계부(), 1414년에는 여연군()을 두어 여진의 준동에 대처하였다.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 사람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는 남이() ·어유소()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西]하였고, 신숙주()는 회령()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련위()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한 뒤 하삼도() 백성 l만을 이주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서북 방면의 건주위() 여진족이 침입하여 도원수 윤필상()이 이를 격퇴하였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추장 우디거[]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이 이를 물리치는 등 여진족은 조선의 북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피웠다. 그 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가 선양[]에 후금()을 세우고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써 조선을 정복, 그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하게 되었다.

 

 

 

청[淸, Ch'ing dynasty]


명의 지배 아래 있던 만주의 여진족은 1616년 누르하치의 지도 아래 흥경(興京)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라 칭하며 후금(後金)을 세웠다. 후금은 주변국을 계속 정복하여 중국 동북부의 만주 전체와 내몽골을 차지한 뒤, 1636년 국호를 중국식 명칭인 청(淸)으로 고쳤다. 1643년 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순치제(順治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예친왕(睿親王)이 섭정이 되었다. 이듬해 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이 이자성(李自成) 휘하의 농민 반란군에게 함락되려고 하자, 명의 황제(崇禎帝)는 동북부를 지키던 오삼계(吳三柱)를 불러들여 방위하게 했으나 오삼계가 도착하기 전에 베이징이 함락되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당할 수가 없어 청에게 도움을 청했다. 청은 오삼계와 합세하여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점령한 후(오삼계는 곧 청에 복속) 중국 전토를 제압했다.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명나라의 뒤를 잇는 중국 왕조가 되었으며, 1683년 명나라의 마지막 유신(遺臣)으로 타이완에 웅거했던 정선공(鄭成功)의 후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의 중국통일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