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인생/Histrory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 제국시대

hanngill 2015. 6. 19. 09:24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 제국시대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그 영향권 전체의 역사.

 

알렉산드로스는 BC 336~330년 사이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복을 완료했다. 에게 해부터 인더스 강에 이르는 지역이 이 거대한 왕국에 흡수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중근동의 토착민과 그리스인 간의 혼인을 권장하여 그리스 문화를 심었지만, 행정구조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정복을 착수했을 때 직면한 두 적대세력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방호족과 이란 북부 및 북동쪽 변경지대를 수세기 동안 배회하던 유목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 소그디아나 수장의 딸 록사나와 결혼하는 등 호족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왕들이 고전했던 북쪽변방의 유목민들과의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도 문명세계의 한계를 맛보았다.

BC 323년 그의 사망 후 예하 장군들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나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셀레우코스 1세가 제국의 동부지역을 장악하자 곧 인도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BC 304년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의 설립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패배하여 인더스 강 유역을 잃었다.

BC 290~280년 동부지역 유목민의 침입이 있었으나 이는 곧 격퇴되었으며, 셀레우코스 1세는 아시아의 헬레니즘화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BC 2세기 이후 그리스 - 마케도니아인들의 이주가 격감하면서 그리스어는 기반을 잃었으며, 이란의 상류계급조차 헬레니즘을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셀레우키아나 수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던 이란인들조차 그리스 사상에 크게 물들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100년도 채 못 되어 이란 세계에는 여러 민족의 거센 동요가 일었다. BC 3세기경 사르마트인들은 흑해 북부연안을 점령했고, BC 3세기말에 이란족의 한 갈래인 월지는 박트리아를 침략했다. 또 이란계 유목부족이었던 파르니족은 BC 250년경에 파르티아 제국을 세워 500년간 존속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팽창한 로마 제국과 우열을 다투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와 같이 셀레우코스 왕국도 각 사트라프의 반란에 큰 타격을 입었다. 파르티아는 고원지대의 농산물이 빈약한 곳이었으나 동서간의 무역로인 비단길에 위치하여 대상으로부터 통행세를 받아 재정을 메웠다. 이 나라는 본래 셀레우코스 왕국에 속했으나 그 굴레를 맨 처음 벗어났다.

파르니 부족의 족장 아르사케스는 BC 247년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국가를 창설함으로써 파르티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색인 : 아르사크 왕조). 그들은 뛰어난 기마병이었으며 가부장적 부족전통을 계속 지켜나갔다. 아르사케스는 혈통이 가까운 파르티아족과 결합했으며 이란계 부족을 단합시켰다. 아르사케스는 부족들로부터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원래 셀레우코스 2세와 협력하여 파르티아를 공격하려 했던 디오도토스(BC 234 죽음)와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후자의 사후 아들 디오도토스 2세의 정책전환으로 서로 연합했다. 아르사케스는 북쪽의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 셀레우코스 2세와도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이후 아르사케스는 왕이 되었고, 비단길에 위치한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세워 죽기(BC 217~211 추정) 전까지 이 도시에 사는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르타바누스(BC 211~191 재위)는 아르사케스 2세라고도 한다. 그는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에서 권력의 기반을 다지면서 메디아 지역으로 영토확장을 시도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파르티아를 침공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불화는 셀레우코스 2세와의 타협으로 끝이 났다. 그후 아르타바누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역시 내실을 꾀하고 대외평화정책을 취하여 현상유지를 도모했을 뿐이다.

미트라다테스 1세의 왕위계승(BC 171경)은 파르티아 왕조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그의 즉위시부터 AD 10년까지 약 180년을 역사가들은 친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이 기간에는 그리스어가 파르티아에서 사용되었고 예술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미트라다테스 1세 때의 파르티아는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BC 155년 메디아를 정복했고, BC 148~147년에 수도를 엑바타나로 옮겼으며, BC 141년에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정복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미트라다테스 1세와 마찬가지로 아들 프라테스 2세도 동부지역에서 크고 작은 싸움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BC 129년 메디아인의 도움으로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프라테스는 그의 삶 대부분을 그리스인과 싸우는 데 소비했다. 이같은 운명은 그의 후계자이자 삼촌이었던 아르타바누스 2세(BC 128~124/123 재위)에까지 이어졌다. 미트라다테스 2세는 파르티아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서쪽으로 확장을 꾀했으므로 로마와의 충돌은 불가피했으나, 결국 유프라테스 강을 양국의 국경선으로 합의했다.

파르티아는 한무제(漢武帝:BC 140~87)의 사신을 영접했는데 이것이 중국과 이란 사이에 최초의 외교접촉이었다 (→ 색인 : 중국사). 한나라는 자신의 북쪽연방 유목민이었던 흉노족과 싸우기 위해 파르티아의 뛰어난 기병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트라다테스 2세의 파르티아는 동서를 다스리는 '왕 중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국위를 떨쳤다. 그의 사후 왕위는 아들 프라테스 3세(BC 70~58/57)에게 계승되었다.

카프카스 지역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에 로마의 세 집정관 중 한 사람인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울타리를 만들어 파르티아를 포위하려 했다. 이 정책은 동료 집정관 크라수스가 입안한 것이었다. 결국 양국이 충돌하게 되자 로마의 세 집정관 중 유일하게 무공을 못 세운 크라수스가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BC 53년 카레 근처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자신도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 색인 : 카레 전투). BC 48년 카이사르의 파르티아에 대한 복수계획은 그 자신이 암살되어 물거품이 되었고, 이 계획을 BC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추운 날씨 때문에 BC 34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권력투쟁으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전쟁의 승패가 불분명하고 그 결과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지역은 서로간의 전략요충지여서 그후 몇 세기 동안 평화의 장애물로 남게 되었다.

AD 12~162년의 150년간은 '반(反)헬레니즘' 시대로 알려질 정도로 파르티아의 고유문화를 숭상하고 외국적인 것을 배척했다. 아르타바누스 3세의 통치 아래 파르티아는 문화적으로는 찬란하나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평화에 걸림돌이 되어왔던 아르메니아에 그가 아들을 총독으로 임명하려 하자 로마가 즉각 반발했으나 37년에 협상하여 아르메니아의 현상유지정책에 합의했다. 아르타바누스 3세는 아르메니아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옛날 영역을 회복하려 한 것 같다.

51~122년 파르티아는 중앙권력의 약화로 몇몇 군소국가로 점진적 분열양상을 보이다가 1세기 들어 북부 11개와 남부 7개 등 18개 군소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중앙정부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이후 1세기말경에 파르티아 왕국에서는 잦은 왕권다툼이 일어나 두 사람의 왕이 동시에 등장하거나 왕위 잠칭자의 도전을 받기도 했다. 또 로마 제국과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었다. 예를 들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165, 194년, 즉 불과 30년 사이에 2번이나 로마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물론 파르티아도 복수전을 전개하여 로마의 영토를 침입하여 여러 도시를 초토화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의 파탄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가 224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파르티아는 무너졌다.

파르티아 제국의 건축술은 티그리스 강을 사이에 두고 자란 쌍둥이 도시였던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3면을 벽으로 둘러싸고 1면을 터놓은 커다란 홀(iwan)을 두는 이 건축양식은 그리스 양식을 점차 멀리하는 것이었으나, 이슬람 건축의 특징과도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막의 도시 하트라는 파르티아 도시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 도시는 군사요새로 그 성벽이 가장 인상적이다.

 

 

 

파르티아

Parthia

 

현재 이란의 호라산 지역과 대략 일치하는 고대 지역.

이 용어는 때때로 파르티아 제국(BC 247~AD 224)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이 명칭은 아케메네스 왕 다리우스 1세의 비시툰 비문(BC 520경)에 파르타바(Parthava)라는 말로 처음 언급되어 있지만 파르타바는 단지 파르사(Parsa:페르시아)라는 이름의 방언일 것이다.

파르티아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일부인 사트라피(속주)로 있던 시기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히르카니아(지금의 이란 고르간)에 합병되었으며, 이 둘은 모두 셀레우코스 왕국의 주(州)로 남아 있었다. 셀레우코스 1세(BC 312~281)와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281~261)통치기에 파르니(아파르니) 유목민들이 중앙 아시아에서 파르티아로 들어와 파르티아인들의 언어를 채택하고 원주민들에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전승에 따르면 파르티아 제국의 첫 통치자이며 창시자인 아르사케스 1세는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 왕 디오도토스가 지배하는 지역의 총독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도망가서 자신의 나라를 세웠다. BC 200년까지 아르사케스의 후계자들은 카스피 해의 남쪽 해안가에 확고하게 터전을 잡았다. 후에 미트라다테스 1세(BC 171~138 재위)와 아르타바누스 2세(BC 128~124 재위)의 정복에 의해 이란 고원 전체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이 파르티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파르티아 제국은 유목민의 동북부 국경선 침입과 또한 로마 제국의 위협에 시달렸다. BC 53년에는 카레(하란)에서 로마 군대와 싸워 그 유명한 전승을 거두었다. 비록 그들의 수도 중 하나인 크테시폰이 후에 로마에 의해 점령당했지만 파르티아인들은 적어도 로마가 동쪽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파르티아의 첫 수도는 다라(지금의 아비바르드)였던 것 같다. 이후의 수도들 중 하나가 헤카톰필로스로서 이곳은 현재의 담간 근처였을 것이다. 제국은 소수의 파르티아 귀족층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확립한 사회조직을 잘 이용했고 봉신국들의 발전을 허용했다. 파르티아인들은 창의적인 민족은 아니었지만 아시아와 그리스-로마 간의 무역 통로 대부분을 장악함으로써 상당히 치부(致富)했으며, 이것을 방대한 건축활동에 사용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제국은 견고한 국내 통치력이 부족했고 224년 남부 이란의 지방 통치자 아르다시르가 반란을 일으켜서 사산 왕조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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