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 박해의 역사
유태인 박해의 역사는 모세의 출애굽부터 시작하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는데 이당시 이집트의 노예였던 유태인들이 모세에 의해 인도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세월이 흘러 기원후 1세기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어지고 유태인들은 디아스포라(방랑)를 통해 전세계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후, 로마제국의 멸망 때까지 박해와 억압에 대한 완화가 반복 되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시기부터 서양사에서 유태인은 이방인으로서 여기저기서 배척 받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세기가 흐르고 이슬람의 세력이 커지면서 예루살렘은 이슬람 군대에 다시 점령당하게 되고 이들은 다시 스페인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에 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남유럽쪽에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 남부 유럽출신의 유태인들은 세파르디로 불리게 되고 중세 스페인의 종교 박해가 있을때까지 나름데로 번창하며 살다가 15세기 이후 대대적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한편,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간 유태인들은 독일, 영국(영국의 유태인 이민은 이미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떄부터 기원함) 보헤미아 등의 중북서유럽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아슈케나지로 불리게 됩니다. 러시아의 유태인 중에는 소위 “하자르 왕국(Kingdom of Khazar)” 출신이 있는데 이 왕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에 위치한 왕국으로서 혈통적으로 유태인이 아니며 당시 이지역에서 상업을 하며 경제력을 키우던 유태인들에 의해 전도되어 유태교를 받아들였는데, 세계사에서 비유태 혈통이면서 유태교를 국교로 삼은 예는 하자르 왕국 케이스가 유일합니다.
현재 하자르 왕국 문제는 매우 첨예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 유태인의 거의 80% 이상이 아슈케나지 유태인인데 이들의 기원이 하자르 왕국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에 있는 유태인들은 자기들의 땅을 주장할 권리가 없어지기 떄문에 아랍의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주장 입니다.(유태인 역사가 아더 코스틀러가 이러한 주장을 싫은 책 "13번쩨 지파"를 내놓고 엄청난 논란에 휩싸인 후 의문의 자살을 했습니다.)어찌 됐던 하자르 왕국 멸망 이후 이후 러시아에 병합된 이들은 당연히 유태인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또한 13새기에 폴란드 왕이었던 보레슬라프는 전쟁, 기근 등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약화되는 인구와 자신의 세력 확보를 위해 유태인 이민을 받아들입니다. 이들의 중심지가 오늘날의 폴란드 도시인 크라코프(크라카우-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멀지않음)와 카토비체인데 이 이주가 2차대전 당시 250만 이상의 유태인들이 폴란드에 살게 된 기원이 됩니다.
세파르디는 까스티야어와 히브리어가 결홥된 “라디노”란 고유의 언어를 사용했고, 많은 아쉬케나지들이 독일어와 히브리 방언이 결합된 유태인 사회의 링구아 프랑카가 된 “이디시어”를 사용하게 됩니다.(오늘날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는 북동유럽에서 건너온 이들 아쉬케나지 들입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원나라 시대 중국에도 상인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유태인 시나고그가 세워지게 되는데 후난(胡南)성의 카이펭 지방에 여행을 한 마르코 폴로에 의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십자군이나 흑사병, 종교상의 변혁 등을 거치면서 유태인은 여러 홀로코스트(집단 학살)을 경헙하는데, 중세초기에 기독교인들이 유태인을 박해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을 팔아넘겨서라기 보다(예수님의 피값으로 유태인이 방랑한다는 예기는 13세기 이후에 고착화 됩니다.), 유태인들이 기독교 소년/소녀들을 납치해서 소위 “피의 의식”(Blood Libel)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이 의식이 일부 광신 유태교도에 의해 행해졌다는 기록이 더러 있습니다.) 최초의 “피의 의식”에 대한 재판은 영국 노어위치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재판은 이후 나폴리, 사라고사, 다마스커스, 러시아의 키시니에프(1903년에 발생) 등 전유럽/중동에서 행해졌고, 서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잔인하고 사디스트적인 유태인에 대한 인상을 각인 시켰습니다.
또한 서구 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던 유태인에 대한 인식중 하나가 포주로서의 이미지인데, 실제로 폴란드 남부를 중심으로 백인 노예가 오스만 제국 등으로 팔려 나갔고, 이것이 서구인들 사이에서 유태인에 의해 행해졌다고 증폭됐어 이후의 근대사회까지 발생하는 서구사회 내 유태인 박해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됩니다. 히틀러가 살았던 비인에서도 나슈마크트 주변의 거리에서 유태인 포주가 운영하는 사창가가 있었습니다.
16세기에는 이태리의 베니스에서 최초의 유태인 거주지역인 게토가 성립되게 됩니다. 한편,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초기에는 유태인에 호의적이었으나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모로 신교와 충돌을 일으켰던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되고 이에 대한 글을 남김으로서 근대적인 의미의 반유태주의 선구자란 오명을 남기게 됩니다.
서구사회에서의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 고리대금업자 유태인의 이미지는 12세기 전후부터 보편화 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영국의 역사가 데렉 윌슨은 이에 대해 끊임없는 박해와 방랑 생활 속에서 자신의 재산이나 동산을 소유하기 힘들었던 유태인들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언제 어느 지역에서 추방된다 하더라도 그들 특유의 장사와 재정 기술을 머리속에 가지고 떠났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시대까지 고리대금을 부정한 사업으로 치부했던 서구의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에 자유주의가 만연 하는데, 유럽 각지의 게토나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살던 유태인들은 일시적으로 해방을 맛봅니다. 하지만 이후의 반동정치로의 복귀와 각국 지배자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유태인 정책은 천차만별의 행태를 띄게 됩니다.
이미 1500년에 신대륙에 정착한 유태인의 기록이 있었는데 본격적인 유태인의 미국 이민은 1849년의 샌프란시스코 금광 발견과 1881년 러시아 황제 암살(암살범이 급진적인 유태인 이었습니다.)에 및 이후의 유태인 박해(포그롬) 및 신대륙 이민에 의해서 입니다. 러시아의 유태인 박해는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들 러시아, 폴란드 계 이민들이 주로 정착한 곳이 뉴욕(브룩클린), 시카고 등의 미국 중동부 도시 들이며, 오늘날 시카고에는 슬라브식 성을 가진 유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조지 거쉰-러시아식으로 게오르기 게르쉰-과 재즈의 거장 베니 굿맨,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의 워너 형제들 등 슬라브 지역 유태인의 상당수가가 이떄 건너왔습니다. 러시아 황제의 유태인 박해는 엉뚱하게도 미국의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독일이나 중유럽으로도 많은 숫자가 건너 왔는데 이중 많은 이들이 히틀러의 가스실에서 죽게 됩니다.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떄의 유태인 박해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입니다. 짜르의 유태인 박해를 지켜보던 유태인들 사이에 분노가 극에 달하고 반러 감정이 생격나게 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노일전쟁 당시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에게 유태인 재벌가 로스차일드 계열의 "쿤 & 롭社"(오늘날의 리먼 브라더스)의 야콥 쉬프(제이컵 시흐)가 대부를 해줍니다. 이 돈으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고 쉬프는 국빈 대접으로 일본을 방문 하게 됩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태인 문제가 나올떄 가장 첨예한 대립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바로 “시온의정서” 입니다. 러시아제국의 비밀경찰에서 유태인 박해를 위해 조작 했다고 알려지는 이 책은 유태인의 지도자 그룹이 모여서 미래의 유태인 세계 지배를 하기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제작 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한글판을 읽어본적이 있는데, 성<Sex>이나 메스미디어를 통한 대중의 지배부분에서는 어떻게 19세기에 그런 글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시온의정서는 나치 치하에서 독일에 대량 인쇄 됐고, 세계 각국에서 반유태주의 얘기가 나올떄 단골로 나오는 책입니다. 짜르의 비밀경찰인 오크리나가 조작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지곤 있으나 확실한 진위 여부는 논란만 계속 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유태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영국은 20세기 초에 소위 동아프리카 이주안을 구상하는데 유럽 유태인들을 오늘날의 우간다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유태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됩니다. 1차대전이 일어나고 예루살램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와 대립하던 영국은 유태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1916년 벨포어 선언을 발표하고 유태국가 건설에 청사진을 재공 합니다. 사실 벨포어 선언은 공식적인 대외 발표가 아니라 영국 시온주의 단체 대표인 빅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당시 영국 외무장관 이었던 아더 벨푸어 경이 “(유태인이 영국의 對독일전 승리를 도와주면) 팔레스타인에서 유태인의 권리를 보장 하겠다”는 개인적인 편지 입니다. 벨푸어 선언이 나올 즘에 영국은 이미 독일에 항복을 고려 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구제책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 들이는 것이었고 영국에 있던 유태인 대표인 화학자 “카임 와이즈만” 박사(영국군에게 독일에 대항 할수 있는 독가스를 개발해주고 지지를 얻음. 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됨)에게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유태인들의 협력을 구하게 되고 결국 유태인 거부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움직여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한편 이에 대한 후속 작업으로서 전세계 유태인은 하루 아침에 친독에서 친영으로 돌아서게 되고 미국 內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운터마이어(Untermyer) 변호사나 그가 윌슨 대통령의 추문 사건을 협박해서 임명시킨 대법원 판사인 브랜디스(Brandies) 대법관 등의 유태인들이 서섹스호 사건(미국 전함 서섹스호가 독일 유보트에 격침 되었다는 사건, 완전 허구로 판명)을 조작해서 미국을 참전 시키게 됩니다. 훗날 서섹스 호 사건이 조작으로 판명 되면서 공식적인 미국의 참전 명분은 우리가 흔히 아는 루시타니아호 사건 이라고 얘기 되고 있는데,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루시타니아 호 사건은 1915년에 발생 하였고 미국의 참전은 1917년 4월으로 2년의 시차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섹스호 사건은 역사속에서 완전히 잊혀졌고 독일은 1917년 11월에 패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의 베르사유 강화 조약에도 위의 유태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독일 외상 인 유태인 발터 라테나우는 이 조약에 서명 했다는 이유로 몇 년 후 암살 당합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 땅과 폴란드 서쪽 단찌히를 비롯한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습니다. 이러한 유태인들의 배후 음모(설)에 독일인들은 크나큰 분노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가 유태인 학살의 단초가 됩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남부의 바이에른이나 기타 지역에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소위 소비에트 위원회가 성립합니다.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서방으로 망명(이 당시 파리시의 택시 기사으 1/3이 러시아인이었고 비자가 필요 없었던 국제 도시 상하이에서는 많은 러시아 귀족/장군들이 호텔의 문지기를 하고 이들의 딸들은 몸을 팔게 됩니다.)하고 그들의 재산을 박탈당한 속에서 많은 독일인들이 비슷한 운명을 겪지 않을까 공포에 떨게되는데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이 1919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주로 제대군인 출신의 우익계 병사들은 “자유군단”을 조직해서 이에 대항합니다. 1차대전후의 혼란기에서 실제로 많은 유태인들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 편에 서서 활약을 하는데 공산당선언을 한 마르크스는 차치하고라도 바이에른 소비에트 위원회의 의장인 쿠르트 아이즈너, 에리히 뮈흐잠과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자 리프트크네히트의 부인인 여전사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의 트로츠키(트로츠키의 역할은 참으로 결정적이어서 당시의 서구인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과 트르츠키 두사람만 기억 할 정도 였습니다.), KGB의 초대 국장 격인 제르진스키, 헝가리 소비에트의 당수로서 잠시나마 헝가리를 지배했던 벨라 쿤 등 여러 유태인 좌익 활동가들이 등장 합니다.(독일 역사가인 브리기테 하만의 책에 따르면 이당시의 독일내 좌익 지도자 그룹의 10% 이상이 유태인 출신 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익의 왜곡 선전과 맞물려서 상당수 독일 국민들에게 “공산주의=유태인”의 등식이 성립하고, 이러한 인식이 훗날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에 대해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됩니다.
1929년에 미국에서 세계대공황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독일경제도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당시 실업자가 정부 통계로 600만 이상 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들이 지지기반을 잃어가는 와중에서 독일인들은 극좌와 극우사이의 선택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택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서 33년에 국제 유태인 연맹(회장 운터마이어)이 암스테르담에 모여 독일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 합니다. 수출에 의존하는 독일은 이에 대한 반발로서 자국 內 유태인 상점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이후의 여러 유태인 박해 법안과 크리스탈나흐트(1938년 독일 외교관이 파리에서 유태인에 의해 살해된 것을 계기로 전독일의 유태인 소유 상점의 유리를 깨고 약탈한 사건)를 거치면서 결국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소각로로의 길을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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