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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330년 - 145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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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콘스탄티노폴리스 | ||||
공용어 | 중세 그리스어, 라틴어 | ||||
정부 형태
초대 황제 마지막 황제 |
전제 군주제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 콘스탄티누스 11세(1449~1453) | ||||
국교 | 동방 정교회(380년 국교로 승인) | ||||
약사 • 콘스탄티노폴리스 설립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330년 5월 11일 1453년 5월 29일 | ||||
인구 • 1281년 어림 |
5,000,000명 | ||||
통화 | 노미스마(솔리두스, 히페르피론) |
그리스의 역사 |
청동기 시대 (c. 3650-1100 BC) 고대 그리스 (c. 1100-146 BC)
중세 (330-1821 AD)
근대 그리스 (1821 AD-현재)
함께 읽기 |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으며,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1]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주로 현대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갈라져나온 정확한 시점을 잡을 수는 없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24년이 중요한 분수령이다.[주 1]
비잔티움 제국은 서기 306년경부터 1453년까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이 나라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 등 외적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했다. 그러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죽은 뒤 제국은 다시 쇠퇴기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수도를 수복하고 제국을 제건했으나, 14세기의 내전으로 비잔티움은 국력을 소진했다.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목차 |
[편집] 국호
- 그리스의 이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비잔티움 제국은 영어식으로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며,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써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으로 표기하며, ‘동로마 제국’으로 쓰기도 한다.
이 제국을 "비잔티움"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부터였다. ‘비잔티움’이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옛 명칭인 ‘비잔티움’은 역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 작가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대중화되었다.[3] 그러나 이 표현이 서방 세계에서 일반적인 용어으로 굳어진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4] 이전에는 비잔티움 제국이나 아니면 오스만 제국 내의 그 후손들을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n 1](라틴어: Romania, 그리스어: Ῥωμανία), ‘’‘로마 공화국’‘’(라틴어: Res Publica Romana,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6],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7],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8]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세월 동안 다민족 국가이면서도[9] 그리스-로마 전통을 이어받은 나라였다.[10]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 이 나라를 대개 ‘’‘그리스인들의 제국’‘’[n 2]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이 나라에서비잔티움적 요소가 점차 우세해졌기 때문이다.]].[11]
서방 세계에서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들의 제국'(Imperium Graecorum)으로 지칭하는 데는 이 나라가 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거부하는 함의도 있었다.[12]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가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보고 서기 800년에 샤를마뉴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기 때문에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에이레네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동로마 제국이 로마의 계승국이라는 주장은 전면적으로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의 지배자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이들은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전자의 경우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쓴 까닭이다.[13]
대조적으로 페르시아와 이슬람, 슬라브 세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로 보는 생각이 널리 인정받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주로 ‘’‘룸’‘’( روم , ‘로마’)라고 불렀다.[14][15]
오늘날의 역사 지도에서는 기원후 395년에서 610년까지 제국을 가리킬 때는 보통 '동로마 제국'이라고 쓰는데, 610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제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당시 이미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그리고 기원후 610년 이후의 지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편집] 역사
[편집] 로마 제국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 지배 체제라는 새로운 행정 제도를 만들었다.[16] 그는 자신과 공동 황제를 두어 아우구스투스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밀리아누스가 퇴위하자 사두 체제는 무너졌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조 세습 원칙을 세웠다.[17]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를 옮겼으며,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18] 기원후 330년 그는 비잔티움 땅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번째 로마로 삼아 천도하였는데, 이 곳은 동방과 서방 사이의 교역로 사이에 자리잡은 요충지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개선하였다.[19]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안정적인 통화였다[20])를 안정시켰으며, 군대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으며,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한편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국가의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풂으로써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는 교리를 정하지 못하며, 이를 위해서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를의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잘 보여주었다.[21]
395년 제국의 상태는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이 효과를 본 시기로 볼 수 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황위는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부 양 지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22] 동부 제국은 다키아, 마케도니아, 아시아, 폰투스, 오리엔트, 트라키아, 이집트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부 제국은 대개 서부 제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도와주었는데, 동부 제국은 더욱 도시 문화가 확고하였고, 재정 자원도 풍부하여 공물을 지불하여 침략자를 구슬릴 수 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파괴되지 않았다. 훈족의 아틸라가 침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테오도시우스는 이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고 한다) [23]을 바쳤다. 또 훈족이나 다른 이민족과 교역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기까지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24]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해버렸고, 동부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유리한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이들은 결국 비잔티움 군대의 용병으로 싸우게 된다.[25]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부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탈리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노 황제는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하였다. 그는 고트의 임금을 이탈리아로 보내 '이탈리아 군부 총감'(magister militum per Italiam)으로 삼았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스스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노 황제는 서방 영토에 대한 최소한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22]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의 권력이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하게 된 것은 498년의 일이었다.[22] 아나스타시우스는 자신이 정력적인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임을 드러내었다. 그는 일상적인 거래에 널리 쓰이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하였다.[26] 그는 또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145,150kg의 금이 있었다.
[편집] 서방 영토 재정복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7년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하였다. 그는 일리리아인 농민의 아들로, 숙부 유스티누스 1세(518–527) 치세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27] 532년에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사산 제국에 많은 연공을 마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에 황제는 니카 폭동에서 살아남았으며, 폭동은 3만 명의 폭도가 죽으면서 끝났다. 이 성공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권력이 공고해졌다.[28] 동고트족 임금 테오다하드가 교황 아가피토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와 평화 협정을 맺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황제가 황후 테오도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자 안티모스 1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비난케 하는데 성공하였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옛 속주의 반달족을 몰아내도록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약 15,000명의 군대를 파병하면서 서방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수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키는 것은 548년의 일이었다.[28]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비잔티움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인들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을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29]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소환되었다.[30]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3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테이아스도 마찬가지로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31]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임금에 반역을 일으키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을 청하였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하게 되었다.[32]
동부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561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사절들이 50년간 화평을 맺었다. 550년대 중반 유스티니아누스는 대부분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발칸 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이곳은 슬라브인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559년 황제는 쿠트리구르와 스클라베니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다. 황제는 퇴역한 벨리사리우스를 불렀으나, 위기가 끝나자 곧 자신이 상황을 관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도나우 함대를 강화한다는 소식에 쿠트리구르인들의 우려하였으나, 제국은 이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고, 강 사이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한다는 조약을 맺었다.[28]
유스티니아누스는 입법 사업으로도 유명하다.[33] 529년 열 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설치하고 카파도키아인 요한네스가 위원장으로 삼아 고대 로마 법전을 개정하게 하여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였다. 로마법을 수합한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6세기에 동부 지역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력은 여전하였으며, 자연철학자 요한네스 필로포노스 같은 대표적인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철학과 문화가 부상하면서 옛 문화를 압도하게 되었다. 로마노스가 쓴 성가는 성체 전례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건축가들은 니카 폭동으로 파괴된 옛 성당 자리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22] 6세기와 7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일련의 전염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고, 경제가 쇠퇴하여 크게 약화되었다.[34]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 유스티누스 2세는 페르시아에 연공을 바치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는 사이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6세기 말에는 비잔티움령으로 남은 이탈리아 영토는 반도의 1/3 정도에 불과하였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 싸우는 반면 아바르족에 공물을 지불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조공만으로는 아바르족을 달래지 못하였다. 아바르족은 582년 발칸 지역의 시르미움과 싱기두눔 요새를 함락하였으며, 투르크인들이 도나우를 건너 침입하였다. 이때 황제가 된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의 호스로 2세와 화평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대한 접근권을 얻었으며, 602년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22] 한편 서방 영토에 이민족이 다시 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영토 확보에 힘썼다.
[편집] 줄어드는 영토
[편집]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우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35] 포카스는 비잔티움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수차례 포카스를 목표로 음모를 꾸몄다. 610년에 결국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헤라클레이오스에게 폐위당한다.[36] 헤라클레이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깊숙히 쳐들어왔으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37] 헤라클레이오스의 반격은 성전의 성겪을 띄게 되며, 그리스도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38]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분으로 여겨졌다)[39]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헤라클레이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40] 이 전쟁으로 두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했으며, 이후 발흥한 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무력하게 되었다.[41]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으며,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된다.[42]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하게 장악했으며,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년에서 678년 사이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무찔렀으며, 우마위야 왕조와 30년간 휴전 조약을 맺었다.[43] 그러나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되었으며,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더욱 빠르게 쇠퇴했고, 여러 도시의 주민들은 옛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다시 요새화하던가 아예 주변 요새로 이주했다.[44]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줄었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곡물 생산지를 잃자 인구 500,000여명에서 겨우 40,000~70,000여명으로 줄고 말았다.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45] 옛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테마 제도가 들어서는데, 이 제도에 따라 아나톨리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를 받게 되었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레이오스가 임시 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되었으나 7세기에 이 제도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잡는다.[46]
페르시아와 뒤이어 아랍 세력을 막으려고 발칸 반도에서 상당한 병력을 빼내오다보니 슬라브족이 점차 발칸 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으며, 아나톨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가 소규모 요새지로 전락했다.[47] 670년대에 불가리아인이 하자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왔으며, 680년에는 새로이 생긴 불가리아 정착지들을 해산하려고 파견된 비잔티움 군대가 패배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의 아스파루크 칸과 조약을 맺어 과거엔 명목상이나마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던 수많은 슬라브 부족들이 새로이 생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권 하로 넘어가게 되었다.[48] 687년~688년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 황제는 슬라브와 불가리아에 원정을 단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그가 어렵게 싸우면서 비잔티움의 패권이 발칸 북부에서 예전같지 못함을 보여주었다.[49]
헤라클레이오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외부인들'을 행정직에 앉히면서 도시 귀족들의 권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695년에 권력을 잃었으나, 처음엔 하자르에서 다음에는 불가리아로 피신했다. 705년에 그는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권좌를 되찾고 정적들을 탄압하는 공포 정치로 일관했다. 결국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는 711년에 다시 한번 도시 귀족의 지원으로 쫓겨났으며, 헤라클레이오스 황조도 여기서 막을 내렸다.[50]
[편집] 이사우리아인 왕조에서 바실레이오스 1세 즉위까지
이사우리아인 레온 3세 황제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반격을 개시하여 주로 테르벨 칸의 도움 덕분에 그의 군대로 아랍인 32,000여명을 죽였다. 레온은 본격적으로 소아시아의 테마를 공고히 재조직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에서 대승을 거두고, 불가리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826년 아랍인이 크레테를 점령하고, 시칠리아까지 공격했으나, 863년 9월 3일에 페트로나스 장군이 랄라카온 전투에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알 아크타와 싸워 크게 이겼다. 한편 불가리아 황제 크룸의 지도로 불가리아가 다시 제국의 큰 위협으로 떠올랐으나, 814년에 크룸의 아들 오모르타그가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51]
8,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레온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이콘을 금지했으나, 제국 전역에서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에이레네 황후의 노력으로 787년 제2차 니카이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도록 정했다. 에이레네는 자신과 샤를마뉴의 결혼 협상을 추진했다고 하나, 고백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황후의 총신인 아이티오스 때문에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고 한다.[52] 813년에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가 성상파괴 정책을 다시 추진했으나,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의 도움으로 이콘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53]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데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의 이른바 포티오스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황 니콜라스 1세 콘스탄티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가 총대주교로 승격되는데 도전했다.
[편집] 마케도니아인 왕조와 부흥
[편집]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867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옛 위상을 되찾았으며, 제국의 방어적인 군사 구조의 효율성 덕분에 황제들은 동방 재정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테 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년) 비잔티움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했으며, 이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 (827년~902년) 무슬림은 오늘날의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에는 팔레르모를, 842년에는 메시나를, 859년에는 엔나를, 878년에는 시라쿠사를, 900년에는 카타니아를, 그리고 902년에는 비잔티움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타오르미나 요새를 정복했다.[54]
그러나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다른 지역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 (856년), 멜리테네 아미르를 무찔렀으며 (랄라카온 전투, 863년), 바실레이오스 1세는 유프라테스 강쪽으로 반격을 가했다. (870년대) 제국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남는다.
904년에 비잔티움을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 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제국은 시련에 처했다. 비잔티움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하여 보복했으며, 2년 뒤에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이아 시를 약탈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무슬림 세력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911년에 크레테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렇듯 비잔티움 제국과 아랍 사이의 경계는 반격과 방어가 번갈아 이뤄지면서 유동적인 상황이었다. 한편 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으로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이들은 보스포로스의 아시아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이번에는 격퇴되어 907년에 비잔티움 제국이 바랑인과 외교 조약을 통해 침략자를 막으면서 제국의 군사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었다. 바랑인을 무찌른 사람은 유명한 장군인 요한네스 쿠르쿠아스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한 승리를 거두고 (943년), 에데사를 재정복했는데 (944년), 이 일은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와 경축받았다.[54]
병사 출신의 황제인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969년 재위)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969년~976년)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테와 키프로스를 되찾았다. 요한네스 1세 치세에는 제국 군대가 남쪽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제국 최대의 위협인 파티마 왕조가 자리잡은 동부에서 알레포 토후령과 인근 지역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55] 수차례 전쟁 끝에 바실레이오스 1세가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제국은 아랍의 마지막 위협 세력을 무찌른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하여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하여 바실레이오스 2세는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 계획을 세웠다. 1025년에 바실레이오스 2세가 죽은 뒤, 1040년대에 원정대가 출정하여 당초의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룬다.[54]
[편집] 불가리아와 제국의 전쟁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간의 해묵은 갈등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 문제는 새로이 기독교화된 불가리아에서 두 세력의 종교적 수위권을 놓고 다시 불거졌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의 도움을 구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비잔티움은 패배했으며,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비잔티움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바실레우스)의 관을 부여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의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는 다시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저령했다.[55]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거대한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은 패하고 이듬해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923년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다시금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이들은 9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성전을 벌였다. 927년에 시메온이 죽자 발칸 반도 상황이 그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시의 스뱌토슬라프 1세의 침략을 받았으나 3년 뒤에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시를 무찌르고 불가리아 동부를 다시 제국 영토로 수복했다.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다시 제국에 저항했으나, 바실레이오스 2세(976년~1025년)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바실레이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문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이후 몇 년 동안 황제는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놔둘 수 밖에 없었다. 두 세력의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스페르케이오스 전투와 스코폐 전투에서 승리하여 불가리아 군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하여 조직적으로 불가리아의 거점을 줄여나갔다. 결국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는 완전히 패배했다.[56] 생포된 불가리아 포로들은 각 100명 가운데 99명은 눈을 멀게 하고 100번째 병사는 한쪽 눈만 남겨 고향으로 인도하게끔 했다고 전한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년, 불가리아의 마지막 요새가 항복했으며, 이 나라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승리로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도나우 강 국경선을 확보했다.[55]
[편집] 키예프 루시와 제국의 관계
850년에서 1100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키예프 루시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다. 두 나라의 관계는 동슬라브족의 역사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다. 비잔티움 제국은 재빨리 키예프 공국의 주요 무역 및 문화 교류 상대가 되었으나, 늘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두 세력은 968년~971년에 불가리아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루시인은 흑해 해안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하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제국은 루시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루시인은 보통 자기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조약을 맺었다.
포르피로게니타 안나 공주와 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하고 뒤이어 루시가 기독교화되면서 루시와 비잔티움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가 루시의 수많은 성당과 교회를 건축하는 데 초빙되면서 비잔티움 문화가 전파되었다. 수많은 루시 사람들이 비잔티움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했으며, 이 가운데는 유명한 바랑인 근위대도 있었다.
[편집] 절정
이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이르렀다.[55] 제국은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케이아 바깥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바실레이오스는 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를 치욕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리하여 황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땅이었던 이 섬을 수복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1025년에 그가 죽으면서 시칠리아 수복은 계획에 그치게 된다.[55]
11세기에는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미 조직 분리가 공식적으로 선언된 바 있었으나, 그해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성 소피아 성당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으면서 수백년간 이어져온 동서 교회의 분리의 분수령이 되었다.
[편집] 위기와 분열
그 뒤로 비잔티움 제국은 시련을 겪는데, 테마 제도가 부실해지고 군대를 소홀히 한 탓이 컸다. 니케포로스 2세와 요한네스 치미스케스, 바실레이오스 2세는 기민하게 군대 단위(타그마타)를 개혁하여, 방어를 중시하고 시민군을 직업군으로 개편하며, 원정군을 점차 용병으로 충원했다. 그러나 용병은 비싼데다 9세기에 침략 위험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진지와 값 비싼 요새를 유지할 필요도 줄어들었다.[57] 바실레이오스 2세는 사망 당시 풍부한 재정을 확보해 두었으나 후계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바실레이오스의 바로 뒤를 이은 황제들은 아무도 군사적/정치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제국의 행정은 점차 문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비잔티움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물가 상승만 초래했으며, 금화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이런 판국에 군대는 불필요하게 재정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위협으로도 비쳐지게 되었다. 결국 자국 군대는 정리되고, 그 대신 계약에 따라 외국인 용병을 불렀다.[58]
또 제국은 새로 등장한 야심찬 외적의 침략에 직면한다. 8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나타난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영토를 침공했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단락되기까지 양 교회가 싸우는 사이에 노르만족은 느리지만 꾸준히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영토로 진출했다.[59] 한편 1069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크로아티아의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의 침공으로 달마티아 해안 도시의 영향력을 잃었다.[60]
그러나 가장 큰 재앙은 소아시아에서 벌어졌다. 1065년과 1067년에 셀주크 튀르크는 제국 국경을 넘어 아르메니아로 첫 원정을 감행했다. 이 사태로 말미암아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이 중시되면서 군사 귀족 출신의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1071년 여름에 로마노스는 셀주크 세력을 정규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부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놀라운 패배를 당하고 생포당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에게 예우를 갖추어 대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58]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미카엘 두카스를 지지하는 정변이 일어났으며, 미카엘 두카스에 대항해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케포로스 보타네이아테스가 반발했다. 1081년, 셀주크는 동쪽의 아르메니아에서 서쪽의 비티니아까지 아나톨리아 고원 전체를 석권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과 88km 떨어진 니카이아에 도읍을 두었다.[61]
[편집] 콤네노스 황조와 십자군
[편집] 알렉시오스 1세와 제1차 십자군
만지케르트 패배 이후 콤네노스 황조의 노력으로 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62] 콤네노스 황조의 첫 황제는 이사키오스 1세(1057년~1059년 재위)였고 두번째 황제 알렉시오스 1세였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등극하자마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아들 보에몽 드 타란토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침략을 받았는데, 이들은 디라키온과 케르키라를 점령하고 테살리아의 라리사를 포위했다. 1085년에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노르만족 문제는 일시적으로나마 완화되었다. 이듬해에는 셀주크 술탄이 죽어 술탄국은 내분으로 갈라졌다.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힘으로 1091년 4월 28일에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급습하여 섬멸했다.[22]
서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알렉시오스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흩어진 제국의 전통적인 방비 문제에 눈을 돌렸다.[63] 그러나 황제는 셀주크 세력이 차지한 소아시아 옛 땅을 회복하기엔 인력이 충분치 못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알렉시오스의 사절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서 동방에서 기독교도가 겪는 어려움을 전하며, 서방의 도움 없이는 이들이 계속 무슬림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고 역설했다. 교황은 알렉시오스의 요청이 서유럽을 결합하는 동시에 교황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64]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표식 아래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과 동방을 무슬림에게서 탈환하기 위해 무장 순례 원정을 개시하자고 촉구했다. 서유럽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22]
알렉시오스는 서방에서 용병 형태로 지원을 받으리라 예상했으며, 거대하면서도 훈련되지 않은 서방 군대가 그렇게 빨리 비잔티움 영토로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여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또 황제는 십자군 주력군의 여덟 지휘관 가운데 보에몽을 비롯하여 네 사람이 노르만족인 사실이 불만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야 하게 되자 알렉시오스는 이들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를 가했다. 그는 십자군 지휘관들이 성지로 가는 길에 그들이 튀르크인에게서 정복한 어떠한 도시나 영토도 제국에 되돌려주도록 서약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대신에 자신은 십자군에게 길을 안내하고 호위를 맡아주었다.[65] 알렉시오스는 수많은 중요 도시들과 섬들을 비롯하여 소아시아 서부의 상당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안티오케이아 공성전 당시 알렉시오스가 자신들을 돕지 않자 당초에 했던 서약이 무효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알렉시오스는 안티오케이아로 출정했으나 블루아의 에티엔이 모두 패배했으며 원정이 이미 실패했다며 알렉시오스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한 것이다)[66] 보에몽은 스스로 안티오케이아 공작임을 선언하고 곧장 비잔티움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1108년에 데아볼리스 조약에 따라 알렉시오스의 봉신이 되는데 합의하여 이로써 알렉시오스 치세에 노르만족의 위협이 일단락되었다.[67]
[편집] 요한네스 2세 마누엘과 제2차 십자군
1118년 알렉시오스의 아들인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 1143년까지 통치했다. 성실하고 헌신적인 황제인 요한네스는 반세기 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입은 피해를 만회하는 데 적임자였다.[68] 경건함과 더불어 온화하며 공정한 정치로 유명한 요한네스 2세는 잔인한 방식이 통하던 당시에 보기 드물게 도덕적인 지도자였다.[69] 이런 까닭에 그는 비잔티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렸다. 25년의 치세 동안 요한네스는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결정적으로 무찌르고,[70] 소아시아에서 튀르크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친히 지휘했다. 요한네스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동방에서 힘의 균형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투르크족을 수세로 몰았으며 소아시아 반도의 수많은 읍락, 요새, 도시를 수복했다.[71] 또 황제는 1120년대에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의 위협을 좌절시켰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임금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독일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맹을 맺는다.[72] 치세 후반기에 요한네스 황제는 동방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는 멜리테네의 다니슈멘드 토후국을 무찌르고, 킬리키아를 재정복했으며, 안티오케이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을 제압해 비잔티움의 수위권을 확인했다. 요한네스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임을 보여주고자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국가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했다. 황제는 정력적으로 원정을 강행했으나 십자군 동맹들의 배반으로 좌절되었다.[73] 1142년에 요한네스는 다시 안티오케이아를 압박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으나 1143년 봄에 사냥을 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레몽은 용기를 얻어 킬리키아를 침공했으나 패배하고 새 황제에게 자비를 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74]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택한 넷째 아들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주변 지역에 공세를 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함께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마누엘은 십자군 국가들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으며,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맺어 패권을 확보했다.[75]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들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1155년에 마누엘은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연합군내 분쟁으로 원정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1167년에 마누엘에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여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격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 해 동쪽 해안 거의 전체가 마누엘의 손아귀에 들어왔다.[76] 마누엘 황제는 황제와 서방 기독교 왕국들과 수 차례 동맹을 맺었으며 제2차 십자군으로 하여금 제국을 별탈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다.[77]
그러나 동부에서는 1176년에 마누엘 2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다. 그러나 패배의 손실은 이내 만회했으며 이듬해에 마누엘의 군대는 "선발된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78]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비잔티움 군대 사령관 요한네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를 데려왔을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군대를 모을 수 있었는데, 이는 비잔티움 군대가 아직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제 구실을 하고 있음을 나타냈다.[79]
[편집] 12세기의 부흥
요한네스와 마누엘은 활발한 군사 정책을 펴서 도시를 공격하고 방어하는데 상당한 자원을 동원하면서도 공세적인 요새화 정책을 제국 군사 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80] 비잔티움 제국은 미크리오케팔론에서 패배를 겪긴 했지만, 알렉시오스, 요한네스, 마누엘의 정책 덕분에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소아시아에서 국경의 안정을 강화하고, 유럽 국경에서도 안정을 확보했다. 1081년경부터 1180년경 사이에 콤네노스 황조의 군대는 제국의 안보를 확립하여 비잔티움 문명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81]
덕분에 서방 속주는 경제 부흥을 이루어 12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7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은 이래로 콤네노스 시대의 제국은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12세기에 제국의 인구는 늘었으며 새 농지 면적도 넓어져 생산이 증대되었다. 유럽과 소아시아의 고고학 자료를 봐도 도시 규모가 커진데다 새 도시의 수도 상당히 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역도 번성하여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이 에게 해의 항구와 이어져 십자군 왕국과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서 서방으로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교역했다.[82]
예술 분야에서도 모자이크화가 부흥하고, 지역 건축 학파들이 여러 독특한 양식을 창조하여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을 퍼뜨렸다.[83] 12세기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고전 시대 저자들에 대한 관심이 소생하면서 초기 인본주의의 모델을 창출했다. 테살로니케의 에우스타티오스는 비잔티움의 가장 특징적인 인본주의를 보여준다.[84]
[편집] 쇠퇴와 분열
[편집] 앙겔로스 황조
1180년 9월 24일에 마누엘이 죽자, 당시 11살이었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가 황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에 무능했으며, 프랑크인 세력을 등에 업은 안티오케이아의 마리아 때문에 섭정은 인기를 없었다.[85] 결국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어린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인데다 군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이용하여 1182년에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로 진군하여 라틴인들을 학살했다.[86] 그는 정적이 될지도 모를 세력들을 없앤 뒤 1183년 9월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으며 알렉시오스 2세를 제거하고 그의 열두살 난 아내 프랑스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아들였다.[86]
안드로니코스 2세의 출발은 괜찮았다. 특히 그가 제국 정부를 개혁하고자 쓴 수단은 역사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패를 뿌리뽑으려고 했는데, 안드로니코스 시대에 매관매직이 없어지고 편향 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으며, 뇌물의 유혹을 막기 위해 관리에게 적절한 봉급을 지불했다. 지방 관구에서 안드로니코스의 개혁은 빠르고 괄목할 성과를 보였다.[87] 귀족들은 안드로니코스에게 분노했으며 상황이 나빠져 안드로니코스는 점차 균형을 잃어 처형과 폭력을 일삼는 공포 정치로 돌아섰다.[88] 안드로니코스는 귀족 세력을 아예 절멸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귀족과 황제의 권력 투쟁은 대규모 살육으로 이어졌으며, 황제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무자비한 수단을 휘둘렀다.[87]
당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가 키프로스를 장악하고, 헝가리의 벨러 3세가 크로아티아 땅을 병합했으며,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군대의 지지를 받는 그도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게다가 1185년에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가 300척의 배에 80,000 병력을 이끌고 제국을 침략했다.[89]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100척 규모의 작은 함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보낸 암살자를 도로 죽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고 안드로니코스 황제를 살해했다.[90]
이사키오스 2세와 그의 동생 알렉시오스 3세 시대에도 중앙으로 집중화된 제국 정부와 방어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르만족은 그리스를 약탈했고, 1186년에 블라흐족과 불가르족은 반란을 일으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앙겔로스 황조는 국고를 탕진하고 재정 부패에 시달렸다. 비잔티움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며, 제국 중심에 힘의 공백이 커지면서 나라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1204년 이전에 이미 트라페주스에 일부 콤네노스 황가 출신 귀족이 세운 반독립 국가가 있었다는 사료도 있다.[91]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는 "그리스에 뿌리를 둔 앙겔로스 황조는 이미 약해지고 분열되던 제국의 황폐화를 가속화했다"라고 썼다.[92]
[편집] 제4차 십자군
- 제4차 십자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9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 사절과 회람을 통해 새 십자군 창설을 제의했다.[93] 당초 이 십자군의 목표는 레반트 무슬림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였다. 1202년 여름에 베네치아에 당도한 십자군은 예상했던 바 보다 규모가 작았고 이집트로 가기 위해 고용한 베네치아 함대에 지불할 비용도 충분하지 못했다. 또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 밀접한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과 십자군과는 이해 관계가 달랐다.[94]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함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달마티아의 차라 항구를 장악할 수 있게 자신들을 지원하도록 제안하여 승낙받았다. (이곳은 원래 베네치아의 종속 도시였으나, 반란을 일으켜 1186년에 스스로 헝가리의 보호하에 들어갔다).[95] 1202년 11월에 짧은 공성전 끝에 차라 시는 함락되었다.[96] 인노첸시오 교황은 베네치아의 이런 계획을 알고 거부했으나 묵살당했지만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하진 않았으며 이들에 대해 조건부로 과오를 면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94]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3세가 죽자 십자군의 지휘권은 호엔슈타우펜 가 출신의 슈바벤의 필리프의 친구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에게 넘어갔다. 보니파치오와 필리프는 둘다 비잔티움 황족과 결혼했다. 사실 필리프의 이복 형제이자 폐위된 장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도와줄 세력을 찾아 유럽에 와서 십자군과 접촉했다. 알렉시오스는 비잔티움과 로마의 두 교회를 통합하고, 십자군에게 은화 200,000 마르크를 지불하며, 십자군에 합세해서 이들이 이집트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보급 물자를 대주겠다고 제안했다.[97]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목표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는 계획을 알고 이 도시를 공격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교황 칙서는 십자군 함대가 차라를 떠난 뒤에야 도착했다.
1203년 여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당도했으며,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탈출했고 알렉시오스 5세 앙겔로스는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와 이사키오스는 당초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알렉시오스 5세에게 폐위당했다. 결국 1204년 4월 13일에 십자군은 수도를 점령한다. 이들은 사흘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훗날 수많은 이콘, 유물 등이 서유럽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베네치아에 나왔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매춘부가 총대주교좌를 총대주교좌에 앉히기도 했다고 한다.[98]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자행한 일에 대해 듣고는 분명한 말로 이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교황의 손을 떠난 뒤였는데, 교황 사절이 직접 십자군에게 성지로 진격하겠다는 맹세를 면제시켜 준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55][94] 질서가 회복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전에 맺은 합의를 실행하게 되었다. 플랑드르의 보두앵는 황제로 선출되고, 베네치아 사람 토마스 모로시니가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제국의 영토를 나눠가졌지만, 니카이아, 트라페주스, 에페이로스에선 비잔티움 세력이 건재했다.[94]
[편집] 멸망
[편집] 망명 정권
1204년 라틴인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 뒤로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국인 니카이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이 들어섰다. 또 트라페주스의 알렉시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기 몇 주 전에 트라페주스 제국이 성립했다. 세 후계국 가운데 에페이로스와 니카이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을 만한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니카이아 제국은 이후 몇십년간 살아남는데 급급했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면 아나톨리아 남부 영토 상당수를 잃는다.[99] 1242년~1243년의 몽골의 침입으로 룸 술탄국이 약해지자 아나톨리아에는 토후들과 가지들이 각자 공국을 이루며 할거하여 이 지방에서 비잔티움의 세력 역시 약화했다.[100] 이 때 토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스만 1세가 훗날 비잔티움을 멸망시킬 제국을 건국한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 덕분에 니카이아는 셀주크 세력의 공격을 잠시나마 받지 않게되어 북쪽에 있는 라틴 제국을 공격하는데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라스카리스 황조가 세운 니카이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으며, 에페이로스를 무찔렀다. 덕분에 미카엘 13세 팔라이올로고스 치세에 비잔티움 제국은 짧게나마 부흥을 이루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은 당시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막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미카엘 황제는 라틴인과 전쟁을 계속 벌이기 위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분노를 샀다.[101] 제4차 십자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수도를 복구하기 위해 대규모 건설 사업이 이루어졌지만, 이런 일은 광신적인 가지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소아시아 농민들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미카엘은 소아시아 영토를 지키기보다는 제국 영토를 넓히는 쪽을 택해서 얼마간은 성과를 봤다. 라틴인에게 다시 수도가 약탈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황제는 교회로 하여금 로마에 복종하도록 강제했으나 미카엘과 제국 정부를 증오하는 농민에 대한 임시변통책일 뿐이었다.[102]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노력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제국의 영광을 돌이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2세가 용병을 이용하다보니 부작용을 낳았는데, 카탈루냐 용병대가 농촌을 약탈하여 점차 제국 정부는 민심을 잃게 되었다.[103]
[편집]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안드로니코스 3세가 세상을 떠나고 내전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6년간 이어진 내전 때문에 제국은 황폐화되었고 1354년에 갈리폴리에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이들은 내전 당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용병으로 부린 바 있었다)이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104] 비잔티움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무찔러 봉신국으로 삼았다.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의 상당수 지방을 정복했다.[105]
황제들은 서방의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정부는 교회 통합을 고려하여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 시민들과 성직자들은 로마 교회와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106]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서방 지배자들은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의 남은 영토를 잠식하는 데도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107]
이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 벌판에 마을이 모여있는 정도 밖에 안되는 초라한 도시가 되버렸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약 80,000여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108] 수적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000여명으로, 이 가운데 2,000여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적으로 해자를 방어했으나,[107]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어버리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죽었다.[109]
[편집] 멸망 이후
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주스 제국을 정복하여 그리스인 세력을 모두 멸망시켰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이미 소멸된 비잔티움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아 1465년부터 1503년 죽을 때까지 지녔다.[13]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일부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메흐메트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여겼다. 한편 도나우 공국에서는 비잔티움의 일부 귀족을 비롯한 정교도 피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가 죽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써 황제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는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하였으며, 이들의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었다.(이 말은 카이사르를 뜻하며, 전통적으로 슬라브 사람들이 비잔티움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반 황제의 후계자들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러시아 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관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살아남았다.[110]
[편집] 사회
[편집] 경제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는 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 까지 비잔티움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또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국영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다른 나라와의 무역 등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또 비단길의 서쪽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비잔티움 제국은 한동안 쇠퇴가 침체기를 맡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다시 부흥하여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부터 12세기 말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화려함을 과시하였으며,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111]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비잔티움 국가는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공업의 발전에 밀려나 제국의 국내 산업은 쇠퇴하여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한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의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으며,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12]
교역은 제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섬유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을텐데, 특히 비단은 이집트로 수입되었으며, 불가리아나 서방에서도 유통되었다.[113] 국가는 국내외 무역을 강력하게 통제하였으며, 화폐 주조를 독점하였다. 정부는 금리도 직접 통제하였으며, 길드나 조합의 활동도 제한을 두었다. 황제와 제국 관리들은 수도의 물자 공급을 확실히 하고 곡물 가격을 억제하기 위해 때때로 위기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또 정부는 세금을 통해 잉여량을 저장해두었다가 공무원 급료나 공공 사업 투자로 다시 유통하기도 하였다.[114]
주요 산업인 농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별로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2세기부터는 서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농업 기술이 개선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눈에 띄게 낙후되었다.
[편집] 종교
조지프 라야는 "비잔티움 문화와 동방 정교회는 같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115] 동방에서 제국이 존속하면서, 황제는 교회의 일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잔티움 국가는 고대 종교 시대부터 일상적으로 종교와 관련한 행정ㆍ재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우스가 고안한 모범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 또는 전령으로 여겨졌으며, 황제는 타종교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고 행정이나 재정 등 종교 "외적"인 일을 맡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황제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고정된 형태로 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116]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도 교도들은 제국 역사를 통틀어 통일된 상태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이다. 제국의 로마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결코 제국 전체의 모든 그리스도 교도를 대표한 적이 없었다. 5세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보급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제국 교회를 분열시켜 오늘날 아시리아 동방 교회로 이어졌다. 6세기에 교회의 대분열 당시 오리엔탈 정교회가 칼케돈 공의회의 선언에 반대하여 제국 교회에서 떨어져나갔다. 5세기에 로마가 몰락한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대개 서유럽 게르만족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초기 제국에는 이들 종파와 더불어 아리우스주의나 다른 그리스도교 분파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동방 정교회는 제국에 남은 그리스도교도 대부분을 대표하게 되었다. 유대교도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소수 종교였다. 이들은 박해를 받는 시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기에는 보통 용인되었다.
로마가 붕괴하고 여타 동방 총대주교들의 내부 불화를 겪으면서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그리스도교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중심지가 되었다[117] 제국이 허울만 남으면 쇠퇴한 때에도 교회는 제국 국경 안팎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활발한 선교로 대부분의 동유럽권(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슬라브 민족)과 일부 중동권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자연스레 정교회의 본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키릴 문자와 동방정교회의 교회 헌법을 수용했다. [118] 게오르기예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정교 세계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소아시아와 발칸 영토의 대주교는 그 예하에 있었으며, 비잔티움을 잃은 지금에도 캅카스와 러시아, 리투아니아도 이에 종속되어 있다.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요소였다.[119]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교회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례, 결혼, 장례 등 개개인 생활의 중요한 순간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신학, 예술, 경제, 정치, 외교 등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편집] 정부와 관료제
비잔티움 정부에서 황제는 유일한 절대 군주였으며, 그 권력은 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졌다.[13] 8세기 말에 궁정에 집중된 민간 행정부는 수도의 대규모 권력 집중의 일환으로 형성되었다.(사켈라리오스 직위의 상승은 이런 변화와 관련이 있다).[120]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개혁은 테마 제도을 설치한 일로서, 테마는 스트라테고스 한 사람이 민간과 군사 행정을 전담하였다.[13]
"비잔티움적"이라는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비잔티움의 관료제는 제국의 상황에 맞게 개혁하는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비잔티움의 직위 체계와 서열 제도는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제국 행정이 질서 정연한 관료제로 보인다. 관리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엄격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각자의 직위에 대한 황제의 뜻에 따랐다. 실질적인 행정직이 있었으나, 권위는 관직이 아닌 개인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121] 8세기와 9세기에 민간 업무는 귀족의 지위에 오르는 지름길이었으나, 9세기부터 민간 귀족은 혈통 귀족과 대립하였다. 비잔티움 정부에 대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11세기의 정치는 민간 귀족과 군사 귀족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알렉시오스 1세는 새로운 궁정의 작위와 관직을 신설하는 등 중요한 행정 개혁을 추진하였다.[122]
[편집] 외교
로마가 몰락한 뒤 제국의 가장 큰 어려움은 제국과 주변 세력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주변 민족들이 공식적인 정치 제도를 이룰 때,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을 본뜨기도 하였다. 비잔티움의 외교는 주변 세력들을 국제 및 국가 내부의 관계망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123] 비잔티움의 외교망 사이에서는 조약이 주기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새로운 지배자가 왕가를 이루는 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비잔티움 사회의 의견, 가치, 제도로 포섭하였다.[124] 고전 저자들은 평화와 전쟁을 도덕적ㆍ법적으로 구분하길 좋아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외교를 다른 형태의 전쟁 수단으로 보았다.[125] 가령 불가르족이 제국을 위협하자, 이에 대응하여 키이우 공국에 돈을 주어 반격하는 식이었다.[125] 야만족 담당국은 최초의 대외 정보 기관으로, 제국의 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합하였다.[125]
비잔티움 사람들은 여러가지 외교 제도를 두었다. 가령 수도에는 여러 대사관이 수년 동안 상주하기도 하였다. 타국의 왕가 일원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유용한 볼모가 될 수 있었다. 또 중요한 관습으로 방문자들을 호화로운 모습으로 압도하는 것도 있었다.[123] 디미트리 오볼렌스키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문명이 보전된 것은 노련하고 책략을 갖춘 비잔티움의 외교 덕분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유럽 역사에 기여하였다고 한다.[126]
[편집] 문화
비잔티움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 그 위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통해 유지한 비잔티움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비잔티움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편집] 학문
고대의 저작들은 비잔티움 시대에도 계속 장려되었다. 그리하여 비잔티움의 학문은 고대 철학과 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127]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과학을 응용하는 면에서 여러 번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나(유명한 사례로 성 소피아 성당을 들 수 있다), 6세기 이후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고대 저술가의 사상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발전하는 측면에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128]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역병이 창궐하고, 이후 아랍인이 침략하는 등 특히 혼란기에 학문은 정체되었으나, 제국이 천 년을 넘긴 시점에서 소위 "비잔티움 르네상스"로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특히 천문학과 수학 등 아랍과 페르시아의 과학 발전에서 전문가 역할을 자임하였다.[129]
제국의 마지막 세기에 비잔티움의 문법학자들은 개인으로서나 저술로서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된 기여를 하였다.[130] 이 시대에 트라페주스에서 천문학과 여타 수리 과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약학은 거의 모든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131]
법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개혁은 법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레온 3세의 에클로가(Ecloga)는 슬라브 세계의 법 체제를 이루는 데 영향을 끼쳤다.[132]
[편집] 언어
- 중세 그리스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원래 비잔티움의 언어는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는 라틴어였다. 그러나 기원후 7세기경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사실상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삼았다.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사이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때때로 비잔티움 문화에서 의례적인 부분으로 나타나는 정도였다.[133] 더불어 민중 라틴어는 제국의 소수 언어였으며,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남부 블라크 언어의 시초가 된다고 보고 있다.[134]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부 지중해 속주를 일시적으로 회복하면서, 라틴어는 학술 언어 뿐 아니라 일상 구어로 제국에서 계속 쓰이게 된다.
궁정, 행정부, 군대를 떠나 동부 로마 속주에서는 그리스어가 서방 제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 라틴어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수 백년 동안 쓰인 주요 언어였다.[135] 그리스어는 그리스도교 교회, 학술, 예술 분야의 보통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다른 민족이나 여러 속주간의 교역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주로 쓰였다.[136] 라틴어는 한동안 주요 구어인 코이네 그리스어와 양층언어로 남았으며, 코이네는 더 이전의 문어와 공존하다가 결국 표준 방언으로 발전하였다.[137]
다민족으로 이루어졌던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다른 언어도 널리 쓰였으며, 시대마다 이들 가운데 일부 언어는 각 지역에서 제한적인 공용어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유명한 예로, 중세 시대 초입에 시리아어와 아람어는 동부 접경 속주에서 교양있는 계층 사이에서 더욱 널리 쓰이는 언어였다.[138] 비슷한 사례로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야어도 해당 지역에서 식자 계층에게 중요한 언어였으며,[139] 나중에는 외국과 접촉하면서 고대 교회 슬라브어, 블라크어, 아랍어도 각 영향권과 제국 내에서 중요해졌다.[140]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지중해 지역과 배후지를 통틀어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으므로, 중세 시대에 알려진 거의 모든 언어가 제국에서 쓰였는데, 심지어 중국어도 쓰인 경우가 있다.[141] 비잔티움 제국이 결국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의 시민들은 문화적으로 동질화되었고, 그리스 언어는 이들의 정체성과 종교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142]
[편집] 예술과 문학
비잔티움 제국과 그 영향을 받은 여러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 회화을 비롯한 여러 예술을 남겼다. 비잔티움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종교적 표현과 관련이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보자면 면밀하게 정해진 교회 신학의 비인격적 특성을 예술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잔티움의 예술 양식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무역을 통해 교류하면서 퍼졌으며, 이곳에서 그 양식은 12세기경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게 된다. 동방 정교가 확산하면서, 비잔티움 양식은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확산되었다.[143] 종교 건축 등 비잔티움 건축의 영향은 이집트에서 아랍, 러시아, 루마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난다.
비잔티움의 문학에서는 네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어, 그리스도교, 로마, 동방이 바로 그것이다. 비잔티움 문학은 역사, 연대기, 백과사전(포티오스 총대주교, 미카엘 프셀로스, 미카엘 코니아테스는 비잔티움의 위대한 백과사전 저자로 여겨진다), 수필, 세속 시문(비잔티움에서 유일한 진짜 영웅 서사시는 디게니스 아크리타스Digenis Acritas이다)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그 밖에도 교회와 신학 문학 및 민중 시가가 있다. 현존하는 비잔티움의 두루마리 서적 2,3천여 권 가운데, 세속 시가, 역사, 과학, 의사과학(pseudo-science)을 다룬 책은 330권에 불과하다.[144] 비잔티움 제국의 세속 문학이 가장 발달한시기는 9~12세기경이며, 종교 문학(설교문, 전례문, 시, 신학, 신앙 논문 등)은 훨씬 이전인 로마노스 시대에 발달하였다.[145]
[편집] 유산
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의 공격을 받은 비잔티움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가령 비잔티움과 아랍의 전쟁 덕분에 샤를마뉴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하며,[146] 또 봉건 제도와 자급자족 경제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도 한다.
수백년간 서방 역사가들은 '비잔티움적',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토,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이 말 속에는 비잔티움 문명과 남동부 유럽의 비잔티움이 남긴 유산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147] 비잔티움주의(Byzantinism)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ㆍ정치ㆍ철학에서 서방의 것과 반대되는 입장을 정의하는 표현이다.[148]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에는 서방 역사가들이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에 끼친 영향 등 좀 더 균형잡히고 정확한 방법으로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하여 비잔티움 문화의 복잡한 성격이 더욱 관심을 받으며, 전보다 더욱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있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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