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gora was an open "place of assembly" in ancient Greek city-states. Early in Greek history (900s–700s BCE), free-born male land-owners who were citizens would gather in the agora for military duty or to hear statements of the ruling king or council. Later in Greek history, the agora served as a marketplace where merchants kept stalls or shops to sell their goods under colonnades.
Classical Athens boasted a large agora in the very heart of the city. Under the Athenian dictators Pisistratus and Hippias, the agora was cleared to a rectangular open area of about 600 by 750 yards, bordered with grand public buildings.
Discovery
The ancient Athenian agora has been excavated by the 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since 1931. In the 1950s, the Hellenistic Stoa of Attalos was reconstructed on the east side of the agora, and today it serves as a museum and as storage and office space for the excavation team.
The word agoraphobia, the fear of critical public situations, derives from agora in its meaning as a marketplace.
from Gk. agora "open space" (typically a marketplace), from ageirein "to assemble,"
고대 그리스 도시에서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하는 집회장으로 쓰인 야외 공간.
호메로스의 작품에 처음 나오는 이 이름은 물리적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자체도 의미하고 있다. BC 5세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상생활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간주한 것, 즉 일상적인 종교활동·정치행사·재판·사교·상업활동을 모두 아고라라고 불렀다
(→ 그리스 예술). 동상·제단·나무·분수로 장식된 아고라는 도시 한복판이나 항구 근처에 있었고 주위에는 공공건물과 사원이 있었다. 흔히 기둥과 벽으로 이루어진
주랑이 아고라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주랑에는 상점이 들어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당시에는 아고라를 도심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학자들은 동쪽에서도 초기 단계의 아고라를 찾아냈고 미노아 시대의 크레타 섬(예를 들면 아이아트리아다)과 미케네 시대의 그리스(예를 들면 티린스)에서는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
BC 5~4세기에는 두 종류의 아고라가 있었다. AD 2세기에 활동한 작가 파우사니아스는 그 2가지를 각각 원시형 아고라와 이오니아형 아고라라고 불렀다. 그는 엘리스의 아고라(BC 470 이후 건설)를
원시형 아고라의 보기로 들었는데, 이 아고라는 주랑과 다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전체적으로 무질서한 인상을 준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유형의 설계를 본떠 재건되었다.
이오니아형 아고라는 좀더 균형이 잡혀 있고, 주랑을 연결하여 직4각형이나 정4각형의 3면을 이루게 한 경우가 많았다. 소아시아의 도시인 밀레토스와 프리에네 및 마그네시아아드마이안드룸에는 초기의 이오니아형 아고라가 있다. 이런 유형은 헬레니즘 시대와 고대 로마 시대에 널리 퍼졌고 더욱 발전했다. 이 후기의 아고라는 로마
포룸의 발전에, 로마의 포룸은 다시 아고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포룸은 아고라보다 더 엄격한 방식에 따라 설계되었으며 미리 계획한 건축물에 둘러싸였고 명확한 용도를 가진 균형잡힌 야외 공간이 되었다. 아고라의 용도는 시대에 따라 다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이 공간은 항상 대중 집회를 위한 장소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민회)는 아고라에서 프닉스 언덕(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있는 언덕)으로 집회 장소를 옮겼지만,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를 위한 집회는 여전히 아고라에서 열렸고 재판소도 아고라에 남아 있었다. 테살리아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는 상업용 아고라와 행사용 아고라가 계속 구분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고도로 발달한 아고라에서는 같은 물건을 파는 상인이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구역을 갖고 있었다. 많은 도시에서는 아고라노모이라는 관리를 두어 이 지역을 관리했다.
아고라는 연극이나 체육을 위한 특별한 건물이나 공간이 마련될 때까지 연극 무대와 운동장으로도 쓰였다. 아테네에서는 지위가 높은 여성들은 거의 아고라에 나타나지 않았다. 살인이나 그밖의 범죄로 기소된 남자들은 재판을 받기 전에는 아고라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자유로운 신분의 남자들은 거래를 하고 배심원 노릇을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빈둥거리기 위해서도 아고라에 갔다. 이 습관은 풍자 시인들이 자주 언급했다. 특별한 경우에는 시민에게 최고의 명예를 부여하기 위하여 아고라에 무덤을 만들어주기도 했다.